정점 ⓒ넷플릭스
넷플릭스가 ‘한국형 YA(영어덜트) 호러’라고 홍보한 <기리고>가 공개된 날 또 한 편의 스릴러 영화도 안방극장을 찾았다. 샤를리즈 테론이 아찔한 익스트림 스포츠를 하다가 숨 막히는 대자연의 절벽에서 끔찍한 인간을 만나는 영화 <정점>(원제:Apex)이다. ‘apex’는 ‘정점, 꼭대기, 뾰족한 끝’이라는 뜻이다. 톰 크루즈가 ‘미션 임파서블2’에서 매달리던 암벽을 떠올리면 될 것이다. 여기엔 ‘최상위 포식자’라는 뜻도 있다.
‘정점’의 발타사르 코르마쿠르 감독은 언제나 인간을 극한의 환경으로 몰아넣고 그 밑바닥을 확인하는 데 탁월한 재능을 보인다. 크라카우어의 베스트셀러 『희박한 공기 속으로(Into Thin Air)』를 기초로 세계 최고봉인 눈 덮인 에베레스트를 기를 쓰고 올라가려는 인간의 오만을 건조하고, 냉철하게 담은 <에베레스트>(2015)에서 유감없이 보여줬었다. 이번 신작 <정점>에서는 호주의 거친 야생과 그보다 더 잔혹한 '인간 사냥꾼'을 대조시키며 서바이벌 스릴러의 정점을 찍으려 시도한다. 절벽 위에 매달린 신체의 공포(수직)와, 정체불명의 사냥꾼에게 쫓기는 공포(수평)가 맞물리면서 영화는 단순한 서바이벌을 넘어선다. 여기서 자연은 배경에 가깝고, 진짜 위협은 점점 인간의 얼굴을 또렷하게 드러낸다.
정점 ⓒ넷플릭스
● 사샤, 암벽을 오르고 급류를 타고 빌런을 만나다
영화는 강렬한 오프닝으로 시작된다. 노르웨이의 거대한 암벽 '트롤 월(Troll Wall)'에 매달린 텐트(포탈레지)에서 깨어나는 사샤(샤를리즈 테론)와 남편 토미(에릭 바나)의 모습은 이들이 단순한 등반가가 아닌, 아드레날린에 중독된 익스트림 스포츠 마니아임을 보여준다. 하지만 갑작스러운 사고로 남편 토미가 추락사하며 사샤의 삶은 송두리째 흔들린다. 5개월 후, 사샤는 남편을 잃은 죄책감과 트라우마를 떨쳐내기 위해 호주의 완다라 국립공원으로 향한다. 그녀에게 등반과 카약은 단순한 스포츠가 아니라, 죽음의 문턱까지 자신을 밀어붙여 생존의 의미를 되찾으려는 처절한 몸부림이다. 하지만 평화로워야할, 평온해야할, 힐링을 주어야할 그곳이 한순간에 악몽의 수렵장으로 바뀐다. 친절하게 다가와서 끔찍하게 정체를 드러내는 벤(태런 에저튼)이다. <킹스맨>에서 ‘남자의 매너’를 익혔던 그의 변신은 팬들에겐 경악에 가깝다. 트롤 월의 장관에 이어 호주의 대자연이 주는 익스트림 스포츠의 도파민 폭발도 잠깐. 벤은 단순한 살인마가 아니었다. 인간이 자연보다 더 예측 불가능하고 잔인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영화는 호주 뉴사우스웨일스의 블루 마운틴 국립공원과 미국 그랜드 캐년 워킹 트랙 등에서 올 로케이션 촬영을 진행했다. CG를 최소화하고 실제 험난한 지형에서 촬영된 장면들은 사샤가 겪는 육체적 고통을 스크린 너머로 고스란히 전달한다. 특히 사샤가 거친 급류를 타고 카약으로 탈출하는 장면이나, 좁은 동굴 속에서 벌이는 사투는 발타사르 코르마쿠르 감독 특유의 '날 것' 느낌이 가득하다. 이런 노력 덕분에 관객은 영화를 보는 내내 축축한 습기와 차가운 암벽의 질감을 시각적으로 느낄 정도이다.
정점 ⓒ넷플릭스
<에이펙스>의 백미는 결말부에 있다. 사샤는 벤이라는 괴물을 물리치기 위해 자신이 그토록 두려워했던 등반 기술을 다시 꺼내 든다. 이는 남편의 죽음 이후 멈춰버린 자신의 시간을 다시 흐르게 하는 의식인 셈이다. (그 전에 벤이 묶인 사샤 앞에서 끔찍한 식인 ‘의식’을 장광설로 풀어놓는 장면이 있다)
익스트림스포츠와 트라우마 끝에 ‘치유’의 순간을 맞이한다면 다소 맥이 풀리는 이야기일 수도 있을 것이다. ‘클리프행어’, ‘버티컬 리미트’, ‘127시간’을 재밌게 본 사람이라면, 그리고 좀 오래된 영화인데 <딜리버런스>(서바이벌게임,1972)를 기억하는 사람이라면 <정점>이 꽤 재밌는 영화임을 알 것이다. 물론 이 영화에는 외계생명체도 없고, ‘맥가이버 같은 자연인’이 펼치는 신박한 대자연 적응기술 같은 것은 등장하지 않는다. 샤를리즈 테론의 의지와 태런 에저튼의 광기만이 격돌한다.
이 작품이 공개되기 전에 샤를리즈 테론이 뉴욕타임즈와 인터뷰를 한 것이 화제이다. 남아프리카공화국 출신의 이 배우는 <몬스터>를 거쳐 <매드맥스: 분노의 도로>, <아토믹 블론드>, <프로메테우스>, 넷플릭스 <올드 가드> 등을 통해 강인한 여성캐릭터의 전범을 보여주었다. 그녀는 알코올 중독자 아버지 밑에서 가정폭력에 시달리는 불행한 성장기를 보냈다. 그가 다시 한 번 뉴욕타임즈 기자에게 밝힌 ‘그 날, 공포와 분노의 순간’이 그녀에게 어떤 삶을, 어떻게 살아야하는지를 보여준 셈이다.
노르웨이의 트롤 월이든, 호주의 대자연이든, 미국의 그랜드 캐년이든 그 자연의 바운드리에서 인간은 무섭고, 인간은 위태롭고, 인간은 발버둥 친다는 것을 보여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