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세 감독
‘충무로의 왕가위’ 소리를 들을 만큼 스타일리스트로 명성을 날리던 이명세 감독. 옴니버스 <더 킬러스>의 한 세그먼트(단편)를 연출했던 이명세 감독이 이번엔 다큐멘터리로 돌아온다. 2024년 12월 3일 밤, 대한민국 수도에서 벌어진 전무후무한 '내란의 순간'을 담은 <란 12.3>이다. 김어준이 기획과 제작을 맡은 이 작품은 2024년 12월 3일 밤과 그 다음날 새벽까지,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 국회의사당 앞과 건물 안에서 벌어지던 미증유의 사태를 박진감 있게 담는다. 개봉을 앞두고 이명세 감독을 청와대 후문 옆에 위치한 삼청동의 한 카페에서 만나 '국민의 승리'로 기억되는 그날의 기록에 대해 들어보았다.
“예전에 MBC다큐(MBC 창사 50주년 ‘타임’ 중 ‘M’,2011)를 연출한 적이 있다. 작품의 출발점은 그날 밤 (김어준)의 뉴스공장에 출동했던 계엄군이 무심코 CCTV 카메라를 올려다보는 장면에서 어떤 강한 이미지가 있었다. 1970년 유신시절부터 살다보니 가끔 소환되는 이미지이다. 인간으로서 부끄러운 마음이 있었다. 브레히트의 ‘살아남은 자의 슬픔’에서 느낄 수 있는 울컥함 말이다. 내가 이렇게 사는 게 맞나 싶었다. 내가 이걸 만들면 왜 안 되겠는가? 그래서 이걸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다.”고 이 작품을 연출하게 된 계기를 설명했다.
** 브레히트의 시는 나치의 박해를 피해 미국으로 망명했던 작가가 전쟁과 불의의 시대에 친구들은 죽고 자신만 살아남은 것에 대한 죄의식을 표현한 작품이다. 이명세 감독은 인터뷰 내내 부채의식의 발로임을 숨기지 않았다**
Q. 기획제작이 김어준이고, 뉴스공장 사무실이 나온다. 제작 과정에서 어떤 제안이나, 조율이 있었는지?
▶이명세 감독: “김어준은 이걸 만들어야한다는 말을 처음 꺼낸 사람일 뿐이다. 함께 하자고 해서 오케이 했을 뿐이다. 그 외 요구사항 같은 것은 없었다. 바라는 것이 있다면 그 이름이 많이 드러나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 유명세를 작품에 연결시키고 싶지 않다. 나도 충분히 유명하다.”
란 12.3
Q. 그동안 해온 작품들과는 결을 달리 하는 것 같다.
▶이명세 감독: “영화를 시작한 이래 인터뷰를 하면 늘 하는 이야기가 인간의 희로애락만 찍겠다고 했었다. 모든 사람이 겪게 되는 이야기. 그래서 <첫사랑>(1993) 같은 작품을 찍었지만, 마음 한 편으로는 이런 얘기를 만드는 게 두려워서 만들지 못했나하는 '부끄러움'이 있었던 것 같다. 그날 밤의 일은 <트와일라이트 존>(환상특급)을 보는 것 같았다. 마치 새로운 차원으로 들어가는, 꿈과 현실이 마주치는 공간이었다. 이게 정파적이었다면 제가 만들 필요는 없었을 것이다. 공포영화를 찍더라도 공포가 불러주는 이미지만으로 찍지는 않을 생각이었다. 그 연장선상에서 이 영화를 만든 것이다.”
Q. 이명세 감독 작품에는 항상 탐미주의 영상이라는 평가가 따랐다. 다큐멘터리는 사실 위주로 건조하게 대상을 바라본다고 생각한다. 이번 작품의 경우는 어떤가.
▶이명세 감독: “예술가는 평생 하나의 문장을 만들어간다고 생각한다. 영화를 찍을 때도 마찬가지이다. 나는 항상 도전한다는 마음이었다. <엠>에서는 피 한 방울 등장하지 않는 공포를 그리려고 했다. 일부러 (공포의) 형식을 위해 (공포영화를) 만드는 것은 아니다. 이 영화 오프닝도 그렇다. 마치 내 영화 <개그맨>처럼. 처음에는 비현실적이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국회에서 벌어지는 투표 결과를 손에 땀을 쥐며 지켜본다. 짜증이 나기도 했다. 나를 두고 스타일리스트니 탐미주의자니 하지만 그건 그들이 붙인 것이다. 내가 느낀 것을 하나로 합친 것이고, 그것이 문체라고 생각한다. 그런 게 다 내겐 스타일이다.”
Q. 다큐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내레이션이 없다.
▶이명세 감독: “이 영화는 <더 킬러스>의 연장선에 있다. 무성영화처럼 중의적으로 생각해 보고 싶었다. 영화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우선 답답했다. 영화가 본격화되면 글씨 크기가 작아진다. 프레임은 총 모양이다. 액자 모양의 틀이 사용된다. 액자에서 빠져나가고 싶은 이미지가 되도록. <더 킬러스>에서 사용된 무성영화의 방식을 차용한 것이다.”
Q. 애니메이션이 활용되었다.
▶이명세 감독: “두 번 나오는데 의도적으로 다르게 표현했다. 골목길 풍경은 클리세이다. 그날의 일상을 아침뉴스와 일기예보로 시작한다. 여느 날과 다름없는 하루이다. 12월이니 크리스마스 캐럴이 울려 퍼지는 모습이다. 그림 같은 골목길에서 일어나는 느낌을 만화같이 보여준다. 그 챕터에서 빛이 살아있으면 좋을 것 같았다. 많은 사람들이 다양한 컬러의 경광봉을 들고 있다. 컬러풀한 느낌이다.”
란 12.3
Q. 다큐멘터리로서의 기록정신.
▶이명세 감독: “다큐멘터리는 현실을 드라마틱하게 보여준다. 어떻게 편집하느냐에 따라 느낌이 다를 것이다. 지금 산에 올라가는 사람이 힘들다는 것을 보여주려면 움켜진 손 하나를 삽입해도 될 것이다. 히치콕 감독의 다큐멘터리 기법을 채용해서 원 신 원 테이크의 액션을 편집을 통해 힘을 준다. (다큐 정신과 관련한) 그런 논쟁 중에 오래 전 <라이프> 잡지에 실린 어느 병사의 모습이 있다. 그게 실재냐 재현이냐 논란이 있지만 역사성을 갖게 된다. 나도 다큐멘터리를 찍으면서 시네마틱하게, 이모션을 넣어, 드라마틱하게 만들고 싶었다. 그리고 유머를 잊지 말자고. 난 그것을 ‘C·E·D·H’라고 말한다. 시네마틱, 이모셔널, 드라마틱, 유머이다.”
** 감독이 언급한 라이프 사진은 세계적 종군기자 로버트 카파가 1936년 스페인내전 때 찍은 ‘쓰러지는 병사’(The Falling Soldier)이다.**
Q. 처음 언급한 CCTV에 비친 계엄군의 모습에 대해.
▶이명세 감독: “CCTV 화면이지만 두 가지 느낌이 동시에 뜬다. 공포스러움과 당황스러움. 이걸 어떻게 담을 수 있을까. 마치 무성영화의 한 토막 같았다. 그때 잡힌 영상을 롱테이크로 보면 <인정사정 볼 것 없다>의 옥상에서 왈츠 추는 모습 같다. 그런데 가까이 보면 다르다. 클로즈업으로 보면 비극이다. 롱샷은 희극이고. 그런 무장한 군인의 총의 모습을 살리고 싶었다.”
Q. 故 유영길 촬영감독을 언급했다.
▶이명세 감독: “이번 작품에 삽입된 광주 영상을 찍은 분이시다. 유영길 촬영감독은 힌츠페터보다 앞서 광주의 진실을 알린 분이다. 영화감독이 되고 그 분과 함께 일했는데 현장에서 눈을 문지르는 습관이 있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방독면 쓰고 다니면서 눈을 긁던 것이 트라우마처럼 습관이 된 것이다. 처음 그 이유를 물어봤을 때 화를 내셨다. 그분은 1980년대에는 한 번도 광주에 대한 이야기를 안 했었다. <꽃잎>(장선우 감독,1996) 찍을 때 이야기를 하셨다. 정말 개인적으로 존경하는 그분의 영상을 한강 작가의 말과 연결해서 꼭 활용하고 싶었다.”
**유영길 촬영감독(1935~1988)은 1975년, 미국 CBS 사진기자로 카메라를 잡았고 영화 촬영감독으로 ‘화분’(72), ‘장마’(79), ‘기쁜 우리 젊은 날’(86), ‘하얀 전쟁’(91), ‘초록 물고기’(97), ‘8월의 크리스마스’(98) 등 숱한 걸작을 남겼다.**
이명세 감독
Q. 정파적으로 비칠 수 있는데.
▶이명세 감독: “1시간 20분이라는 주어진 시간 안에 그날 일들을 지루하게 보여줄 일은 아니라고 본다. 결과론적인 이야기이니까. 다 담을 수는 없다. (국민의 힘) 추경호 대표의 이야기로 팩트 위주로 시간대별로 남겼다. 생생하게, 그 때의 디테일한 모습을 넣으려고 했다.”
Q. 해석은 당파적으로 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비난이나 후폭풍도 있을 수 있을 것 같다.
▶이명세 감독: “그건 익숙하다. <나의 사랑, 나의 신부>때도, <개그맨> 때도. 빵점과 5점 사이로 극과 극의 평가를 받았다. 이 영화는 분명 정치적인 영화이다. <서울의 봄>은 그렇지 않은가? 그래도 천만 관객이 봤었다. 그게 정파적인 느낌을 주는 영화가 아니다. 그 군인의 느낌이 있었기에 천만이 가능했을 것이다. 나는 이 영화가 '서울의 봄의 희망편'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평가가 마음에 든다. 그렇게 보여줬으면 좋겠다.”
“난 이 작품이 외국인의 눈으로 봤을 때도 쉽게 전달되었으면 했다. 1980년과 2024년 12월 3일에 일어났던 일들을 직관적으로 연결하고 싶었다. 이것이 K-민주주의라고 생각한다. 간디의 무저항, 비폭력의 모습이다.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성취한 것이다.” 노 감독의 마지막 말이었다.
이명세 감독의 대한민국 최현대사 다큐멘터리 <란 12.3>은 4월 22일 개봉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