염혜란
공자님 말씀을 담은 논어 위정(爲政)편에는 ‘군자불기’(君子不器)라는 문구가 있다. 군자는 모양이 정해진 그릇이 아니란 뜻이다. 네모, 동그라미, 찌그러진 모습 등 담는 그릇의 형태에 따라 프레임이 고정된 것이 아니란 말이다. 즉 ‘군자’는 한 가지 재능이나 좁은 식견에 얽매이지 않고, 변화에 자유롭게 적응한다는 의미이다. 염혜란의 배우론도 그러하다. 우리가 기억하는 염혜란의 캐릭터는 다양하다. 정지영 감독의 제주 4·3 드라마 <내 이름은>에서는 어떤 모습을 보여줄지 기대가 될 수밖에 없다. 개봉을 앞두고 염혜란 배우를 만나 ‘제주 여인’ 정순을 연기한 소감을 들어보았다.
“(제주4·3이라는) 너무 대의적인 면만 비춰지는 것 같아 조심스럽다. 이 작품에는 문학성, 서정성, 일상성이 있다. 지금까지는 영화가 전하는 이야기에 공감하여 뜻을 같이하신 분들이 시사를 통해 많이 봤다. 이젠 일반 관객이 이 이야기를 어떻게 보실지 기대된다.”고 말문을 열었다.
Q. 공식 개봉전에 제주에서도 <내 이름은> 시사회를 가졌다. 분위기는 어땠는지.
▶염혜란: “너무 정치적인 분이 오시면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다. 감동받은 것은 영화하시는 분과 글을 쓰시는 분이 영화를 보시고는 절 꽉 안아주시고 손을 잡아주시면서 ‘너무 고맙다’고 말한 것이었다. 이 이야기가 예민하고 어려운 이야기여서 그분들이 어떻게 받아드리실지 걱정이 되었다. 그런 반응을 보이시니 배우로서는 감동을 받을 수밖에 없다.”
영화 '내 이름은'
Q. 아직도 논란이 되는 역사적 사건을 다룬 작품에 참여한다는 것은 배우에게도 용기가 필요할 것 같다.
▶염혜란: “배우라는 직업 자체가 이야기를 직접 쓰지 않는 이상, PD가 아닌 이상 자신이 무언가를 할 수는 없는 존재이다. 그래서 저라는 도구를 통해 어떤 이야기를 하게 된다면 좋은 기회라고 생각한다. 정지영 감독이 이런 이야기를 하신다고 했을 때 궁금했다. 우려되는 부분이 있었다면 문학적이든, 영화적이든 재미가 없으면 선동하는 영화로 비칠 수밖에 없다. 나는 선동하는 영화에는 참여하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시나리오를 봤을 때 굉장히 문학적이었다. 끌렸다.”
Q. 제작과정은 순탄했는지?
▶염혜란: “정지영 감독이 하면 돈(제작/투자)이 많이 몰릴 줄 알았다. 그런데 그렇지 않더라. 투자받고 영화가 완성되기까지가 어려웠다. 제주도에 가면 한 집 걸려 한 집이 피해자이다. 생각한 것보다 더 힘들었다. 이게 왜 이리 어려울까. 교과서에도 나오는 이야기를 하는 것이 왜 어려운 이야기가 되었을까. 78주기이다. 꼭 필요한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Q. 정지영 감독은 염혜란 배우를 삼고초려 끝에 모셨다고 했는데.
▶염혜란: “그건 아니다. 정 감독님의 <소년들>에 너무 짧게 나온 게 아쉬웠다. 영화적으로 같이 하고 싶었다. 감독님이 이런 이야기 계획하고 있다고 하셔서 ‘하고 싶어요’한 것이다. 감독님은 선 굵은 작품을 하신다. 그런 감독님이 그리는 여자 이야기가 궁금했다. 제가 하고 싶었던 것이다.”
염혜란
Q. 그동안 제주4·3을 다룬 문학작품, 영화는 꽤 된다.
▶염혜란: “한강 작가의 <작별하지 않는다>와 <지슬>이 많이 알려져 있다. 정 감독님이 이 작품을 만들려고 했을 때 명확한 지점이 있었다. 시나리오 단계에서 수정에 수정을 거듭했다. 제주4·3 이야기는 독립영화로 많이 나왔지만 감독님은 명확하게 상업영화로 만들겠다고 하셨다. 어떤 특정한 작가주의로 흐르는 영화가 아니라 많은 사람이 볼 수 있는 대중영화를 만들고 싶다는 것이었다.”
Q. 그럼 이 영화는 어떤 이야기인가.
▶염혜란: “왜 이리 힘든 이야기가 되었을까 속상했다. 정치적인 이야기가 될 수밖에 없을 만큼 이용하는 것 같다. 정치인이 인정하지 않았고, 도구로 이용한 사람도 있다. 한강 작가는 자신의 작품이 사랑에 대한 이야기라고 했다. 저도 사랑에 관련된 이야기, 평화와 관련된 이야기가 되기를 원한다. 이념적으로 보거나, 그것을 떠나서 생각할 수 없는 문제이긴 하지만 78주기가 된 이 시점에서 어떤 이야기들을 해야 될까가 더 중요한 것 같다.”
Q. 개봉하는 날 대통령이 이 영화를 볼 것이라고 한다.
▶염혜란: “부담스럽다. 대통령의 자리는 한 정당을 대표하는 게 아니고 국민을 대표하는 자리이니까. 그런 자리에서 와주시는 것이 큰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영화가 대박 났으면 좋겠다.”
Q. 정치적으로 이용되는 것을 경계했는데, 오랫동안 제주4·3은 ‘빨갱이’라는 단어와 연결되었다. 그런 작품에 출연한다는 것은?
▶염혜란: “배우로서 부담이 되는 지점이 있다. 배우가 사회적 이슈에 관심이 많다는 이미지가 굳어질 수 있다. 배우는 극개인주의적인 이야기도 해야 하는 존재이다. 그래서 저는 시사프로그램에도 안 나간다. 제주4·3 이야기가 많이 알려지려면 정치적인 이야기보다는 우리 할머니, 우리 자신의 이야기가 더 많아져야한다고 생각한다. 그런 이유로 제주도분들이 그 이야기를 안 한다고 그러시더라.”
Q. <내 이름은>이 문학적, 서정적, 일상적이라는 의미는?
▶염혜란: “그게 재밌는 부분이었다. 제주4·3을 이야기하는데 일상의 이야기라고 하면 실망할지 모르겠다. 거대한 서사를 기대하면 그 이야기가 언제 나오는지 기다리는 분도 있을 것이다. 이 이야기가 인류애적인 이야기가 되려면 역사적인 영웅이나 역사적인 피해자로만 존재하는 누군가의 이야기가 아니어할 것이다. 그래야 이야기 재미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이 영화에는 엄마와 아들 사이의 서사가 있다. 사연이 있고 정다움이 있다. 그 둘의 관계가 만들어내는 이야기가 4·3의 지점이 아닐까. 나이는 중요하지 않다. 친구처럼 보이길 바랐다. 감독이랑, 배우랑 이야기 많이 나눴고, 애드리브도 만들어갔다. 시나리오보다 더 풍성하게 만들려고 했다.”
Q. 정지영 감독은 어떤 연출자인가.
▶염혜란: “진짜 거장이신 것 같다. 거리낌이 없고 두려워하거나 망설이지 않는다. 저는 늘 연기를 할 때 갈팡질팡 고민하는데 감독님은 오로지 ‘이 작품이 세상에 나와야한다’ 그 생각뿐이었다. 제작비 마련을 위해 백방으로 뛰는 것을 보았다. 그런 일념이 어디서 나오는지 존경스러웠다.”
영화 '내 이름은'
Q. <폭싹 속았수다>의 애순 엄마, 전광례로 국민엄마라 불린다.
▶염혜란: “나에겐 그런 자격이 없다고 생각한다. 국민엄마라면 나쁜 엄마 역할은 못할 것이다. 헌신적이며 인내의 상징이 되어야할 것인데 전 그런 상징적인 인물이 되고 싶지 않다. 지독히 이기적인 엄마도 되고 싶다. 다양한 엄마를 만나고 싶은 바람이 있다. ‘국민엄마’는 내려놓겠다.”
Q. <내 이름은>에서의 엄마의 모습은?
▶염혜란: “엄마에게는 공통점이 있을 것이다. 차별화를 주려고 노력했다. 정순은 역사 속 사실에 기반을 둔 게 아니라 재창조해야 하는 인물이다. 가상의 캐릭터에 창의력이 들어가는 것이다. 희생자로 머물지 않는다. 춤을 가르치는 사람이다. 아들 키우며 자기의 생활을 한다. 쿨 한 매력이 있다. 열심히 춤을 추는 선생님이니 그에 맞는 의상을 입는다. 궁상맞은 사람이 아니다.”
Q. 엔딩 송 (김민기 ‘친구’)을 직접 불렀다.
▶염혜란: “감독님이 노래 하나 했으면 좋겠는데 하셨다. 많은 이야기가 오고 갔다. 감독님이 ‘친구’를 선곡했는데 ‘싫습니다’ 했었다. 너무 명곡이니까. 김민기 가수의 이미지가 있고, 메시지가 있는 곡인데 저는 그 발끝에도 못 따라간다고. 간주만 들어도 환기시키는 정서가 있잖은가. 그런데 유족분이 감사하게 곡 사용을 허락해 주셨다. 최대한 제 식으로 불러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이 노래는 멋을 부리며 부르는 노래가 아니다. 울림이 있다. 가사가 매치가 잘 된 것 같다. 감독님 선택이 맞았다.”
Q. 정지영 같은 대감독님에게도 ‘싫습니다’라고 직언하는 타입인가?
▶염혜란: “그건 아니다. <소년들> 연기할 때 제가 준비했지만 못 펼친 게 있다. 그래서 감독님에게 ‘제가 이런 걸 준비했었어요.’라고 했다. 감독님이 ‘왜 그 때 그 이야기를 하지 않았느냐?’고 하셨다. 준비는 되어있었지만 너무 ‘쫄아’있었다. 대화의 기회를 놓친 것이다. 감독님이 시나리오 작업하면서 좀 더 감독님 스타일로 바꾸시는 작업을 계속 했다. 몇 년에 걸쳐 몇 차례를 고쳤다. 그런 과정에서 이야기할 수 있었다. 그렇다고 많이 제시하지는 못하고. 제가 연기를 연우무대에서 출발했다. 창작극이니 고전극보다 대본 수정의 가능성이 많았다. 극 마지막을 어떻게 할 것인가. 주제에 맞게 고치는 것이다. 극단에서는 그게 기본이었다. 연기를 할 때 자기 연기만 봐야하는데 작품에 실례가 되었다. 작가의 고유 역할이 있는데 말이다. 그래도 이번 작품은 열려있는 작품이었다. 조감독도, 배우도, 스태프도 다 의견을 펼쳤다. 물론 감독님이 결정하는 것이다.”
영화 '내 이름은'
Q. 최근 개봉한 <매드 댄스 오피스>에서는 플라멩코를, 이번 작품에서는 한국무용을 한다. 힘들지 않았는지.
▶염혜란: “배우가 힘들수록 관객이 좋아한다. 춤도 연기나 마찬가지이다. 단시간에 춤으로 표현하는 것은 어렵다. 그런데 제가 무언가 많이 표현할수록 손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국무용은 느린 호흡을 유지해야한다. 그게 이 작품이란 잘 맞을 것 같았다. 살풀이와는 조금 다른 느낌을 주고 싶었다. 춤보다는 사위, 몸짓 같은 게 필요했다. 마지막 춤사위가 어려웠다. 진혼과 위로는 기본베이스일 것이고 그것에 플러스알파가 있어야한다. 과거에 머물러있지 않고, 우리는 이 사건을 어떻게 받아들여야하는지. 어린 세대는 어떻게 봐야할지 전해줘야 한다. 그 장면을 보면 멀리 한라산이 보인다. 한라산으로 다가가기도 하고, 산을 떠받들기도 한다. 여러 장면을 찍었다. 그저 슬프다거나 진혼의 느낌이면 안 된다.”
Q. 연기의 스펙트럼이 넓은 배우이다. 언제가 전성기인가.
▶염혜란: “예전에 인터뷰 하면 전성기가 아니라고 그랬는데 생각해보니 맞는 것 같다. 이렇게 좋은 작품이 들어오면 제가 뭘 굳이 하지 않아도 된다. 큰 나무 옆에 있는 연약하고 작은 담쟁이 같다. 큰 나무를 만나면 그냥 붙어있자고 생각한다. 좋은 작품 만나는 게 큰 복이다. 그게 전성기다.” (대중에게 각인된 첫 작품은?) “작품 복이 많았는데, 처음 놀란 것은 <도깨비>이다. 얼굴 알아봐준 작품이다. 미용실에서 절 알아보고 ‘밥 그릇 던진 분이죠?’할 때 대중매체의 힘을 실감했다. 비중도 작았는데 말이다. <도깨비>는 객관적으로 가성비가 높은 작품인 셈이다.”
Q. 최근 AI로 이슈가 되었는데.
▶염혜란: “배우들도 모이면 AI의 놀라운 발전 속도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이야기한다. 우리 사후의 목소리까지도 쓸 수 있다고 하니 등록을 해야 하는 거 아니냐며. 우리나라 기술이 굉장하니 AI이슈도 진지하게 생각해보고, 법적인 문제 같은 것 대비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AI배우에 맞서는 인간배우의 준비는?) “독창적인 연기를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할까. 절대 따라할 수 없는 연기를 해야 할 것인가. 아니면 분기별로 성형을 해야 하나? 한편으로는 직접 대면하는 일이 더 귀해지겠다는 생각이 든다. 연극처럼 바로 앞에서 숨결을 느끼는, 가장 원형적이고 원시적인 것들이 더 중요해질 것이다. 기술이 할 수 없는 것들이 더 귀해지는 시대에 살고 있는 것 같다.”
염혜란 배우는 이날 빨간 배지를 하나 달고 있었다. “이건 동백꽃입니다. 제주4·3평화재단에서의 만든 그 배지에요.”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