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민
부커상 수상작인 얀 마텔의 소설 <파이 이야기>는 이안 감독의 영화로도 유명하다. 인도의 한 소년이 화물선을 타고 태평양을 횡단할 때 태풍을 만나 배가 침몰하고 가까스로 구명보트에 오른다. 그런데 그 구명보트에는 화물선에 실렸던 ‘동물원의 맹수’도 함께 올라탄다. 오랑우탄, 얼룩말과 함께 벵골 호랑이까지. 이제 227일 동안 망망대해에서 이들은 생존의 사투를 펼쳐야한다. 아니면 기이한 동고동락의 게임을 하든지. 살아남은 소년은 과연 어떤 이야기를 들려줄까. 지난 2일 서울 서초구 GS아트센터에서 막을 올린 [라이프 오브 파이]에서 소년 파이를 연기한 박정민의 만나 무대 위의 사투에 대해 들어보았다. 이번 공연은 영국에서 만든 공연으로 배우와 동물 퍼펫이 함께 무대에 오른다. 프로덕션 이 공연을 ‘라이브 온 스테이지’라고 소개한다.
Q. 요즘 영화판에서 잘 나가는 배우이다. 무대극은 연극 <로미오와 줄리엣> 이후 8년만이다. 무대 복귀 소감은?
▶박정민: “사실 겁이 났다. 무대에 오르지 않았던 것은 내가 잘 하지 못할 것 같았다. 그래서 제안이 올 때마다 거절했던 것이다. 소속사(샘 컴퍼니)가 공연 제작사이기도 하니 내게 이런 이야기를 할 땐 항상 조심스럽게 이야기한다. 이번에도 제안을 받고 유튜브 영상을 찾아봤다. 기가 막히더라. 이 정도 연출이라면 출연 제의가 감사할 뿐이었다. (황)정민 형에게 출연할지 고민된다고 말을 했더니 ‘하지 마, 내가 할 테니!’라고 하더라. 작품이 좋은가 보다 생각했다. 그래서 오디션 봤다. 무대연기를 많이 하지 않은 저를 캐스팅해준 것에 대해 고맙게 생각한다. 그때나 지금이나 연기의 기술이 늘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대신 연기를 대하는 마음가짐이 조금 변한 것 같다. 연기를 하며 느끼고 좌절한 것, 다짐한 것들이 굳은살이 되어 이제는 무대에서 조금 견딜 만한 상황이 된 것 같다.”
'라이프 오브 파이'
Q. 퍼핏티어와 연기하는 것, 10대 소년을 연기하는 것에 대해.
▶박정민: “영상을 보며 반한 것은 동물의 움직임이었다. 사람 셋이 동물 하나를 움직이는데 관절을 세세히 나누고, 눈의 색깔도 바뀐다. 모든 것이 계산이 되어있다. 이번 공연에서 퍼펫마스터는 모두 9명이다. 나와 호랑이가 함께 호흡해야하는 것이 흥미로웠다. 신체훈련과 호흡 맞추기를 연습했다. 계속 훈련을 하다 보니 나도 그들과 하나가 된 것 같았다. 영화 <기적>을 하고서는 앞으론 절대 10대 역할은 하지 않겠다고 다짐했었는데. 이건 객석에서 멀리 보이니까 상관없겠지 싶었다. 무엇보다 이 작품을 꼭 해보고 싶었다. 대신 어린 연기를 하지는 않겠다고 다짐했다. 그럴수록 내가 더 나이 들어 보일 테니. 연습하며 점점 아저씨가 되어 가는 박정민의 추임새나 움직임이 나오더라. 연습할 때 모두가 나서서 자제시켜주었다. 연출자가 속도나 움직임, 방향성을 정해주면 소년다운 모습이 보이도록 노력했다. 연기하면 제일 조마조마했던 부분은 바다에 표류할 때 거북이가 지나가면 ‘뭣 좀 드셨나요. (제가) 좀 나이 들어 보이죠?’하는 대사가 있다. 그 대사할 때 사람들이 웃을까봐 일부러 소리를 작게 냈다. 괜히 찔려서.”
Q. 대사 중에 ‘바나나 반하나?’라는 대사가 있다. 애드립인지 아니면 원래 있는 대사인지?
▶박정민: “아, 원래 영국에서는 ‘바나나 스플릿’이다. 영국에는 그런 음식(디저트)이 있다. 원래 영국에서도 안 웃기는 아재개그이다. 바나나(더미)가 반으로 나뉘면서 떠나가는 광경이다. 우리에겐 그런 음식이 없으니 연습할 때 고민했다. 그때 ‘바나나 떠나나’가 나왔다. 작품에서 엄마가 성모 마리아처럼 등장하는 장면이 있다. 난 그때부터 식은땀이 났다. 그 다음에 그 대사를 해야하니. 관객들이 어이가 없어서 웃어주신다. 영국정서에서는 유머코드가 있는 대사인데 우리나라에선 그냥 흘러가는 대사이다. 그런 게 몇 개 있는데 나름 시도해 봤지만 실패하더라.”
Q. 다른 어떤 게 그런 요소인가.
▶박정민: “맛있는 음식 이야기하다가 노르웨이 음식 언급하면 영국 관객들은 웃는다고 하더라. 그런 시도가 있었다.” (정치이야기를 하는 부분도 있었다) ‘정치인들은 이거 배워야 해’라는 대사가 있는데 그런 것도 원래 있는 대사이다. 모든 것이 약속이다 보니 대사를 잘 따라야한다. 그에 따라 인물들의 등장이나 조명 변화가 이어지니. 대사가 입에 붙지 않아도 정확하게 해줘야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Q. 더블캐스팅은 처음인 것 같은데.
▶박정민: “그동안 무대에 오를 때는 팀이 딱 정해져 있었다. 하던 사람과 호흡을 맞췄다. 이번 공연은 매일 공연할 때마다 상대 배우가 바뀐다. 처음엔 걱정했다. 그런데 나름 재미가 있다. 또 다른 감정을 만들어낼 수 있으니. 매 공연이 긴장이 되면서 기대가 된다. 호흡 자체가 너무 좋다. 27명이 너무 친하게 지낸다. 서로 아껴주니까. 관객들은 안 보이겠지만 무대에서는 나를 안도시켜주는 눈빛을 느낄 수 있다. 많이 의지하게 된다.”
'라이프 오브 파이'
Q. 박강현 배우와의 더블 캐스팅에서 경쟁심 같은 것은 없는지.
▶박정민: “박강현 배우는 베테랑 뮤지컬배우이다. 걱정 아닌 걱정을 했었다. 서로 견제하지 않을까.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그런데 너무 해맑더라. 연기하다가 애를 먹는 지점이 있으면 솔루션을 알려주더라. 사람을 소개시켜주는 것이다. 목 쓰는 방법 같은 것. 먼저 다가와서 대답을 너무 잘해 주었다. 진짜 의지가 많이 된다. 멋있어 보였다.”
Q. 박정민과 박강현의 ‘파이’는 어떤 차이가 있나.
▶박정민: “작품을 준비하면서 동선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했다. 결국 성향이 다르니까 같이 가다가도 다른 파이가 나오게 되더라. 그게 신기했다. 강현이의 파이는 소년 같으면서도 멘털이 강하다. 자신에게 일어났던 일을 당당하게 이야기하는 것 같다. 제가 연기하는 파이는 약한 것 같다. 좀 더 감정이 치우친 것 같다. 무대에서, 그 때 그 때 감정을 표출할 때 ‘이게 맞는 것 같아요’ 하다 보니 내가 구현하는 것이, 내 성향이 파이의 모양으로 나타나는 것 같다.”
Q. 영화는 연기하다 NG가 나면 다시 찍으면 된다. 연극은 아무리 연습을 해도 실수가 날 수 있을 것 같다. 그런 경우가 있었는지.
▶박정민: “실수는 한다. 관객들은 모르는 보이지 않은 실수도 있고. 단 한 번도 틀리지 않은 적이 없는 것 같다. 틀리지 않는 게 더 어렵다. 달달 외우더라도 감정적인 실수를 하게 된다. 그럴 경우 빨리 잊어버리는 게 중요하다. 티 나는 실수는 대사를 한 번 씹은 것 같다. 그런 일도 있었다. 오카모토와 대사를 나눌 때 그가 대사를 안 하고 나를 보고만 있는 것이다. 바로 다음 대사로 넘어가는데 마치 제가 대사를 까먹은 사람 같잖은가. 대세에 지장이 없는 것이라 서로 믿고 가는 것이다. 마지막 드레스 리허설 할 때 부표 밧줄이 끊어져서 안 당겨지더라. 그런데 베테랑 연기자들은 자연스럽게 넘어가더라. 실수하면 저렇게 대처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의외로 자잘한 실수는 많았다.”
Q. 영화/드라마 연기와 무대 연기의 차이는?
▶박정민: “영화는 한 신을 찍으면 영원히 그 연기를 안 해도 되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거의 5~6개월을 같은 장면을 매일 만드는 작업이다. 그러니 연기공부도 된다. 상대 배우와 빠르게 돈독해지는 면도 있다. 서로 믿지 않으면 장면을 완성하기가 쉽지 않다. 한 장면 가지고 6개월 동안 서로 머리 싸매고 좋은 장면 만들려고 노력해야한다. 배우로서는 해볼 만한 작업이다.”
박정민
Q. 이 작품에서는 신(神)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한다. 배우의 생각은?
▶박정민: “신이 없으면 설명할 수 없는 게 이 우주에는 너무 많으니까. 신과 같은 존재가 있겠지 하고 살았다. 물론 종교는 제 삶에서 아예 관심이 없던 영역이었다. 이 공연을 하면서 든 생각은 신의 존재에 대한 믿음이 아니라, 왜 종교가 있는지를 알겠더라. 사랑과 종교는 떼어놓을 수 없을 것이다. 사람은 살고 싶은 존재이니까. 믿음이 있어야한다. 그 대상에 따라 종교가 되었든 다른 것이 되었든 그럴 것이다.”
Q. <라이프 오브 파이>에서 가장 극적인 순간은 어느 지점이라고 생각한다.
▶박정민: “배우로서는 어려웠던 것은 파이의 상태가 너무 급격하게 변하는 것이다. 슬펐다가, 좌절하고, 궁금해 하다가 한숨 돌리고. 그런 식으로 툭툭 간다. 그러다가 파이라는 인물에 본격적으로 확 들어가는 지점은 거북이 등장하는 장면이다. 신념과 생존 사이에서 생존을 선택하는 것이다. 대혼란을 겪으면서 감정적으로 몰아치기 시작한다. 혼란을 극단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었다고 생각한다.”
'라이프 오브 파이'
Q. 파이의 삶에서 배운 게 있다면.
▶박정민: “이 작품을 하며 삶에 대해 생각을 많이 하게 되었다. 희망이나 믿음 같은 키워드. 결국엔 더 나은 삶을 위해 내가 취해야 하는 태도이다. 그것은 늘 변할 것이다. 감정적으로, 충동적으로 유혹을 당할 수 있다. 삶은 그 위에 있는 것이다. 파이는 자기의 삶을 위해서 첫 번째 이야기를 믿는다고 생각한다. 그래야 더 나은 삶을 살아갈 수 있을 테니. 그래서 ‘이 이야기가 낫지 않은가’라고 자꾸 되묻는 것 같다. 이 공연은 삶에 대한 이야기이다. 그래도 살아야한다는 이야기이다.”
Q. 출판인으로, 영화인으로서, 무대연기자로서 원작소설과 영화, 연극의 차이점을 말하자면.
▶박정민: “주인공의 회고 시점이 다르니까 감정의 크기가 다른 것 같다. 영화나 소설은 어른이 된 파이가 세상에 대해 조곤조곤 이야기하는 것이고, 무대극은 이제 막 살아서 돌아온 소년이 불과 얼마 전에 일어난 일을 이야기를 하는 것이라 혼란의 정도가 다르다고 생각한다. 정서적으로, 감정적으로만 보면 공연의 텍스트가 제일 감정적이다. 소설은 정제되어 묘사가 섬세하다. 공연 버전은 마치 외상후스트레스장애 같은 상태에서 자신의 믿음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신에 대해 이야기하고, 용기와 좌절을 이야기하는 것이니 더 아프게 다가오는 것 같다. 그래서 더 생생한 감정을 얻지 않을까.”
Q. 향후 계획은?
▶박정민: “제 삶은 전혀 변한 게 없다. 여전히 쉬는 날에도 출근하고, 공연 날에 공연하고, 또 준비하고. 그렇게 살고 있다. 매체를 통해 보이는 제 모습에 대한 대중의 관심을 감사하게 생각한다. 일 열심히 하며 살 것이다.”
박정민과 박강현이 ‘파이’ 역으로 더블캐스팅된 라이브온스테이지 공연 [라이프 오브 파이]는 내년 3월 2일까지 서울 서초구 GS아트센터에서 공연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