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려원
여전히 마스크를 쓰고 영화를 맞이해야했던 2022년 여름, 제26회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에서는 특별한 영화가 한 편 공개되었다. 정려원과 이정은이 주연을 맡은 [하얀 차를 탄 여자]이다. 원래는 JTBC 드라마로 기획된 작품이었다. TV로만 공개되기에는 아쉬워서 영화제에 출품한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그 작품이 극장에서 정식으로 개봉된다. 정려원 배우를 만나 작품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하얀 차를 탄 여자>는 하얀 눈이 소복이 내리던 겨울날 병원으로 온 피투성이 두 여자의 모습으로 시작된다. 누가, 왜 칼에 찔렸는지 화자에 따라, 시간에 따라, 그리고 ‘화면비율’이 조금 달라진다. 산골마을 순경 이정은은 피투성이 피해자 도경(정려원)을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지켜본다.
Q. 영화의 출발은?
▶정려원: “원래는 2022년 추석특집 단막극 대본으로 받은 것이다. 촬영을 겨울에 했었는데, 관계자들이 보고 영화로 만들어도 되겠다고 했다. 원래 2부작 구조였는데 부천영화제 때 두 편을 붙여서 상영했다. ‘영화와 티브이의 경계가 사라진다’는 테마로 상영된 것이다. 우리 작품을 위한 자리 같았다. 영화제 주제와 잘 맞는 것 같다. 드라마로 촬영했고, 그렇게 찍은 것이다.”
Q. 마침내 개봉되는 소감은?
▶정려원: “정말이지 선물을 받은 느낌이다. 촬영 기법도 완전히 드라마 방식으로 찍었다. 그런데 영화로 바꾸니 감격스러운 게 있다. 자세히 보니 영화로 찍었으면 더 좋았을 장면이 있었다. 시사회 때 그런 마음이 들었다.” (어떤 부분이 그랬는지?) “드라마는 열린 결말을 좋아하지 않는다. 단막극에서 그런 전개면 시청자들이 속상할 것 같다. 티브이로 보면 집중을 못할 수도 있다. 이른바 TV 연출은 주위가 밝고, 스토리라인이 뚜렷하게 있다. 시청자를 집중하게 하는 클로즈업도 있고. 배우들은 연기를 크게 한다. 그래야 추석 때 전 붙이다가도 볼 수 있으니. 그렇게 드라마 방식으로 찍었다. 14회 차로 빠르게 찍었다.”
Q. 처음 대본을 받고 든 생각은?
▶정려원: “일단은 제가 성격이 ‘F’와 ‘N’이다. 제 코가 석 자라서 ‘이거, 너무 춥겠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시나리오는 재밌었다. 상황을 보여주는 방식도 재밌었다. 글로 보면서 사건 진행을 확인하기 위해 앞부분을 다시 보고 그랬다. 캐릭터에 대해 해석할 여지를 남겨두고, 시간이 흐르면서 그 캐릭터의 변화를 보여주면 재밌겠다고 생각했다.”
Q. 본인 역할에 집중한 것이 있다면.
▶정려원: “과연 도경이는 선인일까 악인일까. 시사회 끝나고 우리끼리 그 이야기를 많이 나눴다. 어떤 메시지를 주고자 하는 것일까. 피해자였던 사람이 가해자가 될 수 있다. 피해자는 끝까지 피해자로 살아야 하는 것에 대한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 대부분이 가해자이면서도 피해자로 산다. 전반적으로 사람들은 그 선을 지키려고 한다. 영화에서 보여주는 이야기가 공감이 갔다. 그런 이야기의 틀 안에 도경과 현주, 은서까지 세 개의 다양한 삶을 산 사람이 서로 융합되며 이어지는 이야기다.”
하얀 차를 탄 여자
Q. 극중 도경의 상태에 대해서, 어떤 식으로 연기를 했는지.
▶정려원: “세 갈래로 연기했다. 처음에는 관객을 속이는 과정일 것이다. 과연 그 캐릭터는 조현병인가. 어쨌든 달라지는 캐릭터지만 뿌리는 같다. 조현병인가, ‘인 척 하기’보다는 제가 연기하면서 신경 쓴 것은 ‘내가 환자라면 어떻게 반응했을까’에 집중했다. 극중 도경은 상상력이 풍부한 작가이니. 도경처럼 생각하려다 보니 액팅을 하면서 말의 속도를 생각하게 되더라. 어쩌면 한 템포 늦게, 느릿하게 ‘그게 저라고요? 제가 언니를 죽였다고요?’ 식으로.”
Q. 도경은 자신의 상태에 대해, 일어난 일에 대해 완벽하게 연기를 해야 한다. 감정 조절이 쉽지 않았을 것 같다. 동공이 흔들린다거나.
▶정려원: “조현증인 척, 속이려고 하는 것은 아니다. 나는 조현증 환자아라고 생각한 것이다. 헷갈리는 진술을 하는 도경이 있고, 그런 척 하는 도경이가 있다. 국수요리를 한다고 양말을 넣는. 그리고 멀쩡한 정신의 도경이가 있다.”
Q. 친언니와의 관계는.
▶정려원: “언니에게 가스라이팅을 받으면서도 꿋꿋하게 때를 노리는 것이다. 사람이 가스라이팅을 오래 당하면 기회가 와도 바로 반격을 못한다. 벼룩을 가둬놓으면 높이 못 뛰는 것과 같다. 생각은 오래 하지만 몸이 뜻대로 안 움직인다. 세워둔 차를 바라보면서 그랬을 것이다. 그런데 하필 살인자를 목격하는 것이다. 못을 던지는 행위는 아무래도 자신의 의지로는 한계가 있으니 어떤 외부적 요소를 기다린 것 같다. 아무나 걸려라 식으로. 그 기회를 마주할 때 어떻게 될까.”
하얀 차를 탄 여자
Q. 마지막 얼굴표정이 미묘하게 바뀌는 것은.
▶정려원: “중요하다고 생각한 게 악인과 선인의 차이이다. 가장 인간적인 모습을 보여주려고 했다. 누군가 죽은 것을 보고는 ‘와~’하기엔 너무 계획적인 일을 꾸미는, 나쁜 사람의 모습일 것이다. 처음에는 상황을 제대로 인식 못하고 벌벌 떨다가 안도의 한숨을 쉴 것이다. 로딩이 좀 늦었을 것 같다. 해방의 순간에 어떻게 반응할지.”
Q. 감독의 특별한 디렉팅이 있었다면?
▶정려원: “감독님은 ‘극J’성향이다. 14회 차 촬영은 아주 고효율의 현장이었다. 스토리보드를 탄탄히 준비해서 촬영을 했다. 스토리보드 그릴 때부터 옆에서 다 봤다. 그래서 현장에서 따로 설명이 필요 없을 정도였다. 첫 촬영이 갇혀있는 집에서 ‘문 열러 줘’하는 장면이다. 리허설하고 클로즈업했다. 그 장면이 첫 촬영인 게 충격적이었다. 캐릭터의 뼈대부터 잡고 간 것이다. 트라우마를 가진, 엄청난 굴곡의 캐릭터를 그려놓고 시작한 것이다. ‘이렇게 하세요’라는 식으로 연기를 주문하지는 않는다. 마치 양을 모는 개(보더 콜리) 느낌이 들었다.”
Q. 촬영은 어디서 했는지. 추운데 고생이 많았을 것 같다.
▶정려원: “2022년 2월, 강원도 인제에서 촬영했다. 신발을 최대한 늦게 벗으려고 애썼다. ‘나라면 신을 신고 뛸 것 같아’라며 합리화하면서. 그러다가 감독님 눈치 보고 벗었다. 영화에 나오는 장면, 눈에 덮인 시체는 더미가 아니다. 배우가 직접 누워있었다. 그것 보고 ‘내가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다’며 신발을 벗고 맨발로 눈밭을 뛰었다. 촬영은 14회 차로 짧았다. 그때 디즈니플러스의 <변론을 시작하겠습니다>와 같이 촬영을 했었다. 한쪽은 따뜻하고, 한쪽은 눈썹도 언다는 강원도 인제였다.”
Q. 이정은 배우와의 연기 합은 어땠는지.
▶정려원: “너무 잘 맞았다. 저나 정은 선배나 똑같은 마음이었다. 이 친구(감독)를 도와주자는 마음뿐이었다. 작품을 하면서 욕심이 없었던 것은 이게 처음이다. 정은 선배랑 ‘콧구멍 샷’이 많이 나온다. 고혜진 감독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은 다 해줬다. 14회 차로 짧으니 하고 싶은 것 가하고 오자고 그랬다. 전혀 미련이 남지 않을 만큼 연기했다. 그게 이런 결과물로 나온 것이다.”
Q. 이 작품으로 연기상을 받았다.
▶정려원: “원래 드라마로 준비한 것이 영화로 완성되고, 영화제에 참석까지 하게 된 것인데 상까지 받았다. 관객상도 받았다. 신기했다. 마음을 비우면 이렇게 되나? 부천 다음에 BFI 런던영화제 가고, 샌디애고 국제영화제 가고 그랬다. 고혜진 감독이 영어를 잘한다. 인터뷰도 하고, 영화소개도 하고, 통역 없이 다 해치우더라. 든든했다.”
*** <하얀 차을 탄 여자>는 제26회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BIFAN)에서 '코리안 판타스틱 배우상'과 '왓챠가 주목한 장편상'을 수상했다 ***
정려원
Q.현장에서 고혜진 감독을 지켜본 소감은.
▶정려원: “감독님 마음은 깨끗하다. 모든 것을 수용할 만큼 투명하다. 배우의 마음을 오롯이 다 담을 수 있다. 처음부터 캐스팅을 잘 한다. 물감을 신중하게 고르는 것이다. 현장에서 든 생각은 신인배우에게도 인격적으로 훌륭하게 대해준다는 것이다. 추운 현장에서 굳이 배우에게 가까이 다가가 귓속말로 디렉션을 한다. 신인배우가 주눅 들지 않게, 다른 사람 모르게 알려주는 모양이었다. 인성이 훌륭하다. 좋은 감독의 자질을 가진 것 같다. 그리고 아카데믹한 친구이다. 많이 배우게 된다. 그 감독이 추천하는 책이나 영화는 다 재밌다. 믿을 수 있다.”
Q. 극중 분장에 대해서는.
▶정려원: “그 작품 하면서는 분장과 메이크업에서 완전 해방감을 느꼈다. 그냥 원래 머리 그대로 부스스하게 나오면 된다. [변론을 시작하겠습니다]에서의 헤어스타일을 그대로, 부스스 하게 나오면 된다. 도경의 상황에서는 그런 머리일 수밖에 없다. ‘자연인’이다. 오래 갇혀 지냈고, 보일러도 없는 곳이니 그냥 있는 옷 아무거나 껴입었을 것이다.”
Q. 작품 선택의 기준은?
▶정려원: “시나리오가 제일 중요하다. 시나리오가 재밌지 않으면 캐릭터도 안 보인다. 캐릭터가 좋더라도 속상한 경우가 많다. 그리고 제일 먼저 발이 편해야한다. 모든 기준점은 발이다. 그래서 이 작품 보고 처음 든 생각이 ‘발이 춥겠다’였다. 발이 편해야 연기가 편하다. 그래서 힐도 잘 못 신는다.”
Q. 연기에 대한 생각.
▶정려원: “하면 할수록 어렵다. 그러면서도 하면 할수록 자신감이 생기는 게 연기다. 내게 숙제이다. 잘 할 수 있겠다 생각하고 한 것도 다시 보면 ‘왜 저러지?’생각할 때도 있다. 선배님이 ‘좋은 사람이 좋은 연기를 한다’는 말이 곱씹을수록 좋다. 좋은 사람이란 자기 자신에게 진솔한 사람일 것이다. 내 감정을 똑같은 언어로 던질 수 있는 사람이다. 좋은 연기가 저를 좋은 사람으로 만들어준다. 어느 순간부터는 그런 식으로 진솔한 사람이 되면서 마음이 편해진다. 나이 들면서 연기도 더 편해진다. 현장에서 ‘이 씬이 불편하네요’라고 말을 할 수 있게 도더라. 전에는 그러질 못했었다.”
Q. <하얀 차를 탄 여자>에서 전하고자 하는 이야기가 무엇인가.
▶정려원: “구원의 관점에서 보고 싶다. 절대적인 존재에게 지은 죄의 사면을 받는 것이라기보다는 트라우마를 겪은 사람끼리 서로 구원받는 것이다. 타이밍이 맞는다면 진심으로 구원받을 수 있다. 구원은 절대자의 선택을 받아 이뤄질 것 같은데 상호작용에서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샌디애고영화제에서 토요일 아침에 상영되었다. 이 시간에 누가 볼까 했는데 영화제 즐기는 사람이 정말 많았다. 추운 영화관 밖에 서 있는데 영화를 본 관객이 ‘한국영화 처음 보는데 너무 잘 봤다’며 안아주더라. 다들 위로해 주시는 특별한 느낌이 들었다.”
정려원, 이정은 주연의 영화 <하얀 차를 탄 여자>(감독:고혜진)는 오늘(29일) 극장에서 개봉된다.
[사진=바이포엠스튜디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