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병헌
이병헌이 <공동경비구역 JSA>이후 25년 만에 박찬욱 감독의 영화 <어쩔수가없다>에 출연했다. 25년 전, 이병헌은 TV드라마에선 인기를 얻고 있었지만 영화는 몇 편 ‘말아먹은’ 상태였다. 박찬욱 감독 또한 마찬가지 신세였다. 두 편의 영화가 처참한 실패로 끝났고 영화계에서 손절할 타임에 두 사람이 만나 <공동경비구역JSA>를 찍은 것이다. 그 벼랑에서 만나 영광의 순간을 같이한 배우 이병헌에게 감독 박찬욱과 신작 <어쩔수가없다>에 대해 물어보았다.
“물론 그 동안 박 감독님과는 인간관계를 유지를 해왔기에 서로 친숙하고 익숙한 사이였다. 오랜만에 하는 작업이었지만 크게 달라진 점은 없다. 여전히 사람들과 대화하는 것 좋아하고, 열려있는 자세이다. 감독님은 스태프와 배우들과 대화하는 것 좋아하고, 그 사이에서 새로운 아이디어 찾는다. 좋은 아이디어면 수용한다. 한결같이 온화하다. 물론 고집스럽게 요구할 것을 다 요구한다. 될 때까지 하는 고집을 여전하시더라.”
Q. ‘어쩔수가없다’에서의 코미디적 요소.
▶이병헌: “블랙코미디나 유머가 있는 부분은 역효과가 나는 경우가 많다. 웃기려고 애쓰는 것, 그런 걸 더 보여주려고 하는 것은 연기하는 사람이 경계해야 하는 것이다. 상황이 재밌으면 언제나 환영이지만 그런 것은 피해야한다. 작업을 하며 내가 이런저런 아이디어를 내면 감독님이 다 받아주신다. ‘아니, 이런 분이 아닌데’ 겁이 나기도 했다. 장난스럽게 했다가 나중에 책임져야하니.” (어떤 장면이 이병헌 배우의 아이디어인가?) “아, 정원에서 삽질하다가 소파에 드러눕고 잠이 든다. 아내가 깨워 일어나서는 형사를 보고는 ‘서에 가서 말씀 드리겠다’고 말하는 것. 만수가 착각하는 그 장면인데 감독님이 재밌다고 하셨다. 또, 이성민, 염혜란과 뒤엉켜 싸우다 권총이 장롱 밑으로 들어가는 장면. 사람들이 애벌레처럼 모이는 아이디어를 내놓았다.”
어쩔수가없다
Q. 가장으로서 해고의 충격은 크다. 배우로서 그런 불안감은 어떻게 연기로 구현되는지.
▶이병헌: “배우가 이런저런 충격적인 일을 겪으면 연기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실제 그런 경우는 얼마 없다. 그런 일이 아니어도 살아가면서 대단한 감정을 느끼며 살아간다. 하루에도 수백 번. 큰일이 있어 감정적으로 업다운 되기도 하고. 자기가 겪은 비슷한 경험을 극대화하거나, 축소시키며 연기하는 것이라 보면 된다. 누군가 나에게 총구를 겨누고 쏘기 직전의 경우라면? 그런 경험은 없지만 비슷한 정도의 공포감을 느낀 적은 있을 것이다. 학교 다닐 때 깡패를 만났다거나 하는 식으로. 비슷한 감정의 경험을 극대화시키는 것이 저의 연기 방법인 것 같다.”
Q. 이번 작품에서 구르고, 달리고, 몸부림친다. 찍으면서 다친 곳은 없는지.
▶이병헌: “다행히 다친 적은 없다. 촬영 들어가기 전에 동선을 철저히 체크한다. 리허설 할 때도 긴장이 된다. 다칠 것 같으면 패드를 좀 더 붙여달라고 그런다. 가슴 부위든 엉덩이든. 연기할 때 주저하는 게 느껴질 때가 있다. 갑작스런 사고처럼 보이게 하려면 연기하는 사람이 아무 생각 없이 그런 상황에 임해야한다. 내가 불안한 마음이 없이 연기하도록 그런 장치가 있어야한다.”
Q. 유만수의 분장이 특이하다. 왜 콧수염일까.
▶이병헌: “영화 찍기 전에 의상이랑 분장 테스트를 했다. 화면 테스트를 할 때 두 가지 레퍼런스가 있었다. 스티븐 맥퀸과 매즈 미켈슨 스타일이었다. 두 사람의 헤어는 완전히 다르다. 메즈는 생머리이고, 스티븐 맥퀸은 짧고 곱슬이다. 그런데 스티븐 맥퀸 버전으로 결정이 났다. 콧수염 붙이고 하와이언 셔츠 입고 카메라 테스트를 하는데 내가 보기엔 마치 남미 마약왕 같았다. 혼란스러웠다. 이 모습이 너무 강렬해서 이야기에 집중되지 않을 것 같았다. 베니스에서 재밌는 리뷰를 보았는데 ‘어쩔수가없다’의 만수에서 ‘모던 타임스’의 찰리 채플린이 연상된다는 것이다. 획일화된 공장에서, 슬랩스틱 동작, 그리고 마지막 자동화된 공장에서 AI로봇 앞에서 이쪽저쪽 어디로 갈지 몰라 하는 표정에서 그런 걸 느낀 모양이다. 감독님께 여쭤보니 그런 생각은 아니었다고 하더라.”
이병헌
Q. 영화 시작은 유만수가 ‘와라, 가을아’, ‘다 이루었다’ 같이 문어체 스타일의 대사였다.
▶이병헌: “영화 후반작업을 거치면서 그 장면이 인위적인 색채가 더해졌다. 현실적이지 않은 색감과 구도, 환경처럼 보인다. 동화적인 이야기인가 생각이 들 정도로. 첫 신이 많은 것을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자기만족과 마초적인 느낌이 드는 점에서는 선출(박희순)처럼 느끼함이 있다. 가장으로서 ‘나는 행복하다’는 자기과시적인 대사이지만 영화 전체가 굉장한 비극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지도 모른다. 이야기의 결말을 보고는 그 가족에겐 해피엔딩이라고 생각하는 분도 있겠지만 저는 비극이라고 생각한다. 가족 모두의 영혼이 망가질 대로 망가진다. 미리가 언제 ‘난 떠날 거야’하지 모르는 상황이다. 첫 대사는 ‘다 이루었다’지만 마지막 대사는 ‘모두 잃었다’가 되지 않을까. 그런 느낌도 충분히 주지 않았을까. 그렇게도 생각해보았다.”
Q. 찍으면서 본인이 생각하기에 웃겼던 장면은?
▶이병헌: “몇몇 장면이 생각난다. 촬영장에서 너무 많이 웃었던 것은 처음 면접 보는 장면. 시나리오 지문에서 요구한 것이 너무 많았다. 건너편 빌딩 유리에 반사된 햇빛이 불편해서 조금씩 의자에 앉을 채 그림자 속으로 들어가려는 모습, 충치 때문에 고통스럽고, 다리는 떨리고, 그 다리를 붙잡아야하고. 그런 상황이 한꺼번에 있고, 대사는 계속 해야 하고. ‘이걸 어떻게 하라는 거지?’ 숙제였는데 막상 할 때는 두 테이크만에 끝냈다. 만수는 자신이 유머감각도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잘난 체하고, 잘나 보이려고 애쓰는 만수의 모습이 우스꽝스러운데 그 연기가 마음에 든다.”
“그리고 산에서 아라(염혜란)에게 쫓겨 차안으로 들어가는 장면. 차 안에서 혼자 소리를 지르는데 난 그게 왠지 며칠 동안 우스웠다. 아마 저런 상황에 맞닥뜨리면 저런 소리가 나올 수밖에 없을 것 같다.”
Q. 코미디 연기 좋아하는지.
▶이병헌: “‘콘크리트 유토피아’ 때 말했지만 난 블랙코미디 선호한다. 그래서 이 영화가 마음에 들었다. 실소가 터지든, 큰 웃음이 나오든. 그 가운데 무거운 질문이 있는 게 좋았다. <싱글라이더>나 <달콤한 인생>처럼 한사람의 심리를 쫓아가는 것도 좋아한다.”
Q. ‘네가 죽어야 내가 산다’는 설정의 개연성에 대해.
▶이병헌: “촬영 내내 감독과 제일 많이 한 이야기이다. 해고를 당했다고 그런 결정을 내릴 수가 있을까. 누가 그런 선택을 할 수 있다는 말인가. 평범한 사람이 말이다. 그렇게 한다면 이 세상에 한 사람도 살아남지 못할 것이다. 이야기에 설득력이 있어야한다고 생각했다. 감독님도 동의했다. 첫 번째 살인까지 디테일하게 만수의 상황을 보여준다면, 감정적으로 처절하게 보여야할 것이다. 더 설득력 있게 보이려고, 비참한 상황을 보여주려고 했다. 그렇게 해야 어느 정도 설득이 될 것이라고 보았다.”
Q. 베니스와 토론로 영화제에서 느낀 K-콘텐츠의 인기는?
▶이병헌: “넷플릭스 작품과 우리 콘텐츠를 들고 해외에서 프로모션을 많이 해보았다. 그런데 이번 영화로 처음 경험해 본 것이 많다. ‘우릴 이렇게 많이 알아봐?’ 강도가 훨씬 컸다. 물론 베니스나 토론토는 영화제였고, 영화에 관심 있는 사람이 많아서일 수도 있겠지만. ‘오징어게임’뿐만 아니라 <사랑의 불시착>의 손예진, <폭싹 속았수다>의 염혜란까지. 각자의 팬들이 있어서 더 시너지가 있었던 것 같다. 한국의 콘텐츠가 이렇게까지 어마어마하구나 싶었다. 그리고 물론 박찬욱 감독의 덕이 크다. 영화제 가보면 박찬욱 감독이 이런 대우를 받고 있다는 사실에 놀라게 된다. 너무 자랑스러웠다. 다들 동경의 눈길이다.”
어쩔수가없다
Q. 그럼, 앞으로의 한류콘텐츠의 방향은 어떤 식으로 이어가야할지.
▶이병헌: “앞으로의 방향에 대해선 모르겠지만 늘 생각해오던 게 있다. 예전에, 한류 초기의 일을 기억할 것이다. 일본, 중국, 태국, 싱가포르, 홍콩에서 인기가 많아질 때. 그 당시 업계는 어리둥절했다. 그 때 시행착오가 있었다. 그 사람들이 뭘 좋아하는지 살펴보고, 상대방의 취향에 맞춰 뭔가를 하려고 한 것이다. ‘사랑이야기를 너무 좋아하더라’ 하면서 아류작을 만든다. 예전의 홍콩 느와르처럼. 쏟아져 나왔고, 그런 게 한류를 금방 식게 만든 이유 중 하나가 아니었을까. 이런저런 경험이 있었으니, 이제 높아진 지금의 위상을 오래 유지하려며 어떻게 해야 할지 생각해 볼 것이다. 그들이 뭘 좋아하는지 신경 쓰지 말고, 우리가 뭘 좋아하는지, 우리의 다양성을 보여주면 더 오랫동안 좋아하지 않을까.”
Q. 이병헌-이성민-염혜란이 소리 지르는 ‘고추잠자리’ 장면에 대해서.
▶이병헌: “그 장면에 대해 감독님이 오랫동안 고민했다. 조용필 곡을 쓴다는 것은 정해졌고, 어떤 노래를 쓸지는 촬영 한 달 쯤 전에 결정되었다. 그 장면은 동시녹음을 해야 하니 음악을 틀지 않고 촬영한 것이다. 찍으면서 이렇게까지 소리를 질러도 되나 싶었다. 이성민 배우가 마스크 쓰고 너무 큰 소리를 지르니 나도 그 목소리에 맞춰 큰 소리를 지르게 되더라. 끝나고 감독님에게 이런 목소리 해도 되는지 물어봤더니 ‘어차피 목소리는 거의 안 들릴 거야’ 하더라. 그럼 소리 지른 건 뭐냐고 물어보니 ‘미세하게 들리는 것 살릴 거야’랬다. 내가 오버한 것 같아 걱정했는데 ‘괜찮을 것 같다. 음악소리를 더 크게 할 것이니까’ 그 장면 힘들었다. 상상하면서 연기해야하니.”
Q. 손예진과의 부부싸움 장면은 어땠는지. ‘너 예쁘잖아, 넌 잘 생겼잖아’하는 장면.
▶이병헌: “기자시사회 때 사람들 많이 웃더라. 그 대사는 이경미 감독이 맨 마지막에 고친 대사이다. 원래는 없었던 대사이다. 너무 재밌었다. 대본 리딩 연습할 때 많이 웃었다. 다들 부부 싸움할 때 유치하게 싸우는 면이 있다. 그게 공감의 힘 아닐까. 아, 대사 관련해서 한 장면이 생각난다. ‘원래 대사 말고 개 짖는 소리를 한 번 내 보라’고 했다. 난 처음에 장난인 줄 알았다. 감독님이 모니터 보며 깔깔 댔지만 편집에선 안 쓸 것 같다는 뉘앙스로 이야기했다. 그런데 영화에 나오더라. 저 상황을 어떻게 봐야하나. 사람이 화가 나면 이성을 끊을 놓아버릴 수도 있을 것 같다. 아마 그런 장면인 것 같다.”
Q. 박희순 배우가 제일 불쌍하다.
▶이병헌: “”박희순 배우는 예전에 티브이 보면서 나랑 좀 닮은 것 같다고 막연하게 생각했는데 이번 캐스팅 이유 중에 마초적인 연기와 함께 나와의 공통점을 주고 싶었다고 한다. 내게 제거 당하는 사람의 공통점을 보면 범모와 시조는 환경이 비슷한 캐릭터로, 박희순의 역할은 외모로 닮은 점을 주고 싶었단다. 비슷하다는 것을 이번에 느꼈다.“
Q. 노동자에겐 해고의 아픔, 배우에겐?
▶이병헌: “감독이나 배우나 한 작품을 끝내고나면 다음 작품까지는 어떻게 될지 모른다. 저는 그 폭(텀)이 작아 행복한 편이지만 기약 없이 기다리는 게 많다. 감독은 더 많다. 감독의 일은 텀이 길다. 3년, 5년. 어떤 경우는 10년에 한 작품을 하는 경우도 있다. 많이 하는 배우도 있지만 언제까지 기다리는 배우들도 많다. 수입도 줄고, 시간이 지나며 점점 잊힌다. 점점 작아진다고 느끼게 된다. 게다가 영화에서의 기술의 발전, 에이아이는 벌써부터 크게 문제가 되고 있다. 저랑 이정재 배우랑 BL찍었다기에 ‘어, 언제 이런 거 찍었지’하고 보다가 놀라기도 했다. 일자리를 잃어가는 것은 모든 사람들이 직간접적으로 경험하는 것이다. 만수가 몸담고 있는 제지업만 해도 컴퓨터와 핸드폰 문자로 종이의 쓰임이 줄어들고 있다. 극장산업이 어렵다. 스트리밍을 통한 콘텐츠 자체는 만들어지겠지만 극장산업은 시급하게 고민해야할 때이다. 다시 관객이 찾는 것을 모색해야할 것이다. 해결책은? 글쎄 극장에서 봐야만 100퍼센트 느낄 수 있는 좋은 작품. 근본적인 것에 힘을 쓰면 나아지지 않을까.”
이병헌
Q. 작품을 고르는 기준은?
▶이병헌: “내가 재미있게 읽었느냐가 제일 중요하다. 할리우드 작품 <지.아이. 조> 할 때 고민을 많이 했었다. 계속 거절 했는데 에이전트에서 계속 들이밀며 국민만화라고 했다. 다들 모르잖은가. 결정을 못 내리며 고민하다가 박찬욱 감독과 김지운 감독에게 여쭤봤다. 어떻게 하면 좋겠냐고. 그 때 박 감독님은 ‘하는게 어떻게나’고 했고, 김 감독님은 ‘그걸 왜 해?’라고 대답했다. 나를 더 고민의 늪에 빠뜨린 것이다.”
Q. <케이팝 데먼 헌터스>의 목소리 연기는?
▶이병헌: “솔직히 모험하는 기분이 더 컸다. 20대에 한국 애니메이션(아마게돈/마리이야기) 목소리 연기를 한 적은 있는데 영어는 처음이다. 제목도 약간 유치하다고 생각해서 고민하다가 ‘한 번 해보자’ 후회하기 보다는 도전해 보고 싶었다. 이 작품 때문에 5년 전 소니픽처스랑 처음 만났을 때는 스토리만 있고 아무 것도 없었다. 잘 모르겠더라. 안 할 것 같은 생각이 있었는데 계속 만나고, 줌 미팅하며 마음이 기울었다. 아이들이 기대하고 좋아했다. 처음엔 내 편을 들어주었는데 지금은 ‘왜 그랬어’하는 거다. 어느 순간, 아이들이 아빠 영화를 보기 시작하면서 빌런 연기가 더 많다. 말은 안 해도 아빠가 빌런 전문배우로 생각하지 않을까.”
“이 영화는‘다 이루었다’고 시작하지만, 다 잃은 것으로 끝나는 것으로 볼 수도 있다. 배우 이병헌이 여전히 보고 싶은 배우로 남을 수 있을까 하는 불안감도 있다. 오랜 시간 사랑 받고, 관심 받았지만 앞으로는 얼마나 보고 싶은 배우로 남을 수 있을까.” 제지공장 노동자의 위기감, 영화업계의 두려움, 게다가 아들의 의심까지. ‘직장과 가족’의 안녕과 행복을 위해 발버둥 치는 이병헌의 <어쩔수가없다>는 24일 개봉했다.
[사진=BH엔터테인먼터/ CJ EN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