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해영 감독
이해영 감독은 꾸준히 시나리오를 쓰고 신작을 내놓고 있다. 감독 데뷔작 [천하장사 마돈나]를 필두로 <페스티발>, <경성학교:사라진 소녀들>, <독전>, <유령>에 이르기까지. 뭔가 애매하면서 특별한 이야기를 전해주고 있다. 그가 넷플릭스와 손잡고 ‘6부작’ 드라마를 찍었다. 제목이 <애마>이다. 그렇다. 1980년대 한국 충무로를 장악한 성애(性愛/에로) 영화 <애마부인>을 둘러싼 흥미로운 시대극이자, 여성 연대의 드라마이다. 그게 가능할까? 이해영 감독은 이번에도 애매하게 특별한 이야기를 펼친다. 넷플릭스 공개 뒤 감독을 만나 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나눠보았다.
“단순한 비하인드만으로는 저의 구미에 당기지 않았다. 당시의 비화에서 출발하여 무언가에 저항하고, 성취하려는 목표물까지 가야한다고 생각했다.”고 작품의 지향점을 밝혔다.
Q. 넷플릭스에 공개되었다.소감은?
▶이해영 감독: “영화를 개봉할 때와는 달리 긴장이 많이 되더라. 확실히 영화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구체적이고 직접적인 피드백을 받았다. 시리즈는 확실히 다른 매체라는 생각이 든다. 공개되고 나서 1화부터 정주행하면서 ‘내가 아주 멀리 왔구나’ 싶었다. 인생경험인 것 같다.”
Q. 영화가 아닌 시리즈로 만들 계획이었다면 특별히 신경 쓴 지점이 있는지.
▶이해영 감독: “대본을 쓰는 것부터 다르다. 2시간 남짓의 영화와는 분량 자체가 달랐다. 영화는 머릿속에 다 들어온 것처럼 퍼즐이 맞춰졌는데, 이번 <애마>의 경우는 6개의 이야기가 있으니 밀도를 조절하는 게 어려웠다. 시나리오를 처음 쓰는 사람처럼 힘들었다. 배우들과 신들에 대한 이야기를 나눌 때 순서대로 찍는 게 아니니 헷갈리는 것이다. 신인감독처럼 부담되었다. 밀도를 유지하려고 노력했다.”
넷플릭스 '애마'
Q. 1980년대 충무로 영화판을 다룬다. 논픽션은 어느 정도인가.
▶이해영 감독: “영화 ‘애마부인’만 놓고 나머지 인물은 픽션으로 구성하겠다는 것이 초심이었다. 100퍼센트 지어낸 것이다. 그렇다고 마냥 꾸며낼 순 없으니까 시대상황이나 사건들, 충무로 분위기, 제작환경 등을 취재와 인터뷰를 통해 많이 찾아봤다. 논문도 보고 스터디를 했다.”
Q. 제목에서 어떤 편견이나 선입견이 생길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작품을 만들게 된 계기 같은 게 있는지.
▶이해영 감독: “‘애마’를 처음 떠올린 것은 아주 오래 전이다. <천하장사 마돈나>(2006) 다음에 생각한 것이니 20년 가까이 된다. 난 ‘애마부인’ 세대는 아니다. 하지만 당시 어렸을 때부터 막연하게 ‘애마부인’이라는 것이 아이코닉한 단어였다. 막연한 호기심이 있었다. 1980년대가 특출한 셈이다. 영화가 소비되는 방식이 흥미로웠다. 모두가 욕망하는 것이었고, 동시에 죄의식을 갖고 있는 것이다. 그런 것이 재밌었다고 생각하고, 괜찮은 이야기가 나올 것 같았다. 시놉시스를 정리하다보니 2시간 영화로는 다 담을 수가 없을 것 같았다. 그렇게 생각만 하고 있다고 20년이 지났다. 세상이 많이 바뀌고, 생각이 유연해진 것 같다. 이제는 꺼낼 수 있겠다 싶었다. 그렇게 시리즈로 만들게 된 것이다.”
Q. 1980년대란 어떤 시대였다고 생각하는지.
▶이해영 감독: 사회전반이 통제받던 엄혹한 군부독재 시대였다. 제약이 많았고, 동시에 성애영화를 필두로 한 상업영화가 많이 만들어지던 시기였다. 문화적으로 음악도 그랬다. 프로야구가 시작되는 등 문화적인 격변기였던 것 같다. 소위 ‘3S정책’이란 것도 장려되는 시기였다. 동시에 검열 등 심의와 규제가 강력했다. 표현의 자유가 없는 아이러니한 시기였다. 그 때를 취재해보니 생각보다 훨씬 야만적인 시기였다. 여성혐오적인 분위기가 일상적으로 벌어졌다. 언어폭력도 심했다. 이건 정말 놀라울 정도의 극한의 시대였다고 생각한다.“
Q. 영화로 옮기며 조심스러운 부분이 있었다면.
▶이해영 감독: ”그런 야만적인 시대의 일상적 야만성을 어떻게 보여줘야 할까. 지금의 관객들이 보기에 너무 불편하면 어쩌지. 견딜 수 있을 정도의 불편함을 찾았다. 그 수위를 조절하는 것이 어려운 일이었다.“
넷플릭스 '애마'
Q. 노출 연기에 대해서는 어떤 생각을 가지고 접근했는지.
▶이해영 감독: ”그에 대한 고민은 꽤 오래 했다. 제가 내린 결론은 1982년 영화의 경우, 당시는 심의가 강력해서 성애 장면의 표현이 불가능한 시대였다. 지금 <애마부인>을 보면 우리가 상상하는 그런 노출 장면이 없다. 그래서 극중 구 대표의 대사처럼 ‘직접 노출은 없지만, 그에 진배없는’ 효과를 주기 위해 힘을 기울였다.“
Q. 이하늬와 방효린이 연기한 여배우들의 연대에 대해.
▶이해영 감독: ”공개를 앞두고 이 작품을 소개하면서 ‘여성연대’에 포커싱한 적은 없다. 주인공 정희란과 신주애가 손을 잡으니 그렇게 해석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게만 이야기한다면 이 영화를 좁게 만드는 것이 될 수도 있다. 시대를 거스르는 인물, 버티고 견디려는 사람의 이야기도 있다.“
Q. ‘애마부인’의 안소영 배우가 나오는 장면에서 깜짝 놀랐다.
▶이해영 감독: ”안소영 배우의 다큐를 본 적이 있다. 이 작품을 만드는데 큰 영감을 주었다. 자연인으로 배우의 삶을 반추하는 장면을 보았는데 우리 작품에 꼭 모시고 싶었다. 의미도 있고, 임팩트도 있는 그런 장면을 생각했다. 이야기 속에서 희란과 주애의 긴 여정을 마무리해 주는 느낌도 있지만 과거와 현재를 이어주는 역할을 해주신 것 같다. 제가 작가, 감독으로서 실제 그 당시를 견디고 버텨 오셨던 선배님의 제 존경과 응원의 마음을 담을 수 있었다”
Q. 대종상이 열리는 세종문화회관 앞에서 말을 타고 질주하는 장면이 있다.
▶이해영 감독: ”그 신은 ‘애마’ 아이템을 떠올렸을 때부터 생각한 것이다. 이야기의 처음부터 목적지였던 셈이다. <애마>의 이야기는 그 신을 위해 달려가는 것이다. 그 당시에는 세종문화회관 앞 광화문 자리에 조선총독부 옛 건물이 서있었다. 권위적이고 남성적인 거대한 광화문 대로를 두 여성이 말을 타고 달려가는 것이다. 1982년 영화에서는 그 장면이 ‘뽀사시’하게 바닷가 모습이 담겼다. 남성들의 시선, 욕망을 담은 이미지를 전복하는 것이다. 그렇게 광화문을 질주하는 것은 무협영화, 서부영화의 한 장면 같이 후련할 것이다. <애마>가 전하고자 하는 모든 테마를 대표하는 신이라고 생각했다.“
넷플릭스 '애마'
”그런데 말 타는 장면이 놀라울 정도로 어렵더라. 나도 말 타는 장면은 처음 찍어보는 것이었다. 다른 작품을 보면 너무 쉽게 말을 타고, 카메라도 쉽게 쫓아가던데. 말이 그렇게 예민하고, 카메라에 담기가 어려운지 몰랐다. 조명이라도 켜면 난리였다. 말 하나에 두 사람이 타는 것은 더 어렵다. 아스팔트에선 못 달리더라. 그 장면을 겨울에 찍었는데 바닥에 천을 깔고 흙을 뿌려 달리게 했다. CG로 지우고. 정말 그 장면 촬영은 미친 짓이었다. 하지만 너무 중요한 장면이라고 생각한다.“
”시나리오에는 그 장면이 더 길었다. 시나리오는 장난이 아니었다. 대로를 달리면 안기부가 차를 타고 쫓아오고 도심에서 추격전이 벌어진다. 서대문 쪽으로 꺾어져서 고가도로 밑, 기차 가 지나가는 지점에서 차 한 대는 기둥에 부딪치고, 차단기가 내려오고 말이 점프한다. 저쪽에서는 기차가 달려오고, 조명이 화면을 덮치고, 이들이 도망치는 것이다. 그렇게 찍자면 4500억 원은 들 것 같았다. 정신을 차리고 조촐하게 찍었다. 그래도 완성된 장면에 만족한다.“
Q. 이하늬가 연기한 당대 톱스타 정희란은 어떤 인물을 레퍼런스로 했는지.
▶이해영 감독: “시나리오를 쓸 때부터 정희란 캐릭터에 당대 최고의 여배우를 다 녹여 넣었다. 장미희, 유지인 배우도 있을 것 같다. 그래서 보시는 분들이 제각기 다른 배우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이하늬 배우와 이야기 나누면서 정희란이란 인물은 스크린 안이든 밖이든, 같이 있든 혼자이든 언제나 영화배우이기를 원했다. ‘아름다운 밤이에요’라는 대사를 할 때에도 영화배우 같아야 한다. 설정연기인데 배우가 그런 연기를 하면 현타가 올 수도 있다. 테이크 할 때마다 배우와 이야기를 많이 나눴다. 두 사람에겐 모두 큰 도전이었다. 이하늬 배우의 압도적인 연기로 모두가 공감할 수 있는 캐릭터를 만들어낸 것 같다.”
Q. 시즌2가 만들어진다면
“만약 만들어진다면 훨씬 경쾌하게 이야기를 풀어나갈 수 있을 것 같다. <애마>를 만들 때 일단 기본적으로 제목이 던져주는 오해와 편견, 혹은 선입견이 있다. 그런게 충돌한다. 여성연대와 에로영화. 초반에 저속한 말이 많이 나온다. 80년대가 실제 그런 시대였기에 그런 묘사가 있어야 후반부에 이야기가 수월하게 펼쳐진다. 후반에는 확실히 결이 달라진다. 조금 넓은 마음으로 봐 주시면 이하늬가 훌륭하게 결론을 이끈다. 화끈하게.”
이해영 감독
●●● 인터뷰 시간이 짧아, 서면으로 몇 가지 보충질문을 했다. 이해영 감독은 꼼꼼하게 답변을 주었다. 이런 내용이다. ●●●
Q. <애마부인> 시리즈 이후 ‘빨간앵두’나 ‘산딸기’ 등 충무로 에로물이 쏟아졌다. 이런 작품을 언제 보았는지. 감상평은
▶이해영 감독: “사춘기 때 동시상영관에서 당시의 성애영화들을 처음으로 접했었다. 기억에 남는 건 <파리애마>이다. 이게 처음 접한 ‘애마’시리즈이다. 사춘기 때 본 영화였으니 임팩트가 엄청났던 기억이 있다.”
Q. 주애의 숙소에 <영자의 전성시대> 영화포스터가 붙어있다. 그 외 당시 충무로영화들이 많이 나온다.
▶이해영 감독: “<영자의 전성시대> 포스터에 정희란 이미지를 사용해서 1970년대와의 연결성을 만들고 싶었다. 가상의 영화보다는 당시의 아이코닉한 실제 작품명을 썼다. 이 포스터는 오디션의 대사, 미나의 집까지 이어지면서 당시 정희란이라는 대스타의 영향력, 더불어 같은 꿈, 공통의 희망을 품었던 캐릭터들의 모습을 담고 싶었다. 오디션 대사도 그 영화에서 발췌한 것이다”
Q. 희란과 주애의 관계 말고, 나머지 인물들 간의 이야기는 부족하다는 느낌이 든다.
▶이해영 감독: “주애와 근하, 근하와 기석의 관계성을 설정하는 장면들이 좀 더 있었는데 편집과정에서 편집되었다. 좀 더 희란과 주애에게 집중하자는 판단이었다.”
넷플릭스 '애마'
Q. 극중 곽인우 감독의 처치가 애처롭다. 혹시 감독님의 경우는 어땠는지.
▶이해영 감독: “직접적인 경험이 반영됐다고 말하긴 좀 애매하다. 하지만 영화 일을 하면서 유사한 경험이 아주 없지는 않았다. ’돈 맛을 보면 이렇겐 안 쓴다‘는 식의 시나리오 리뷰를 받은 적도 있고, ’초시계로 재면서 몇 분마다 웃긴지 체크하고 그 간격을 삼십초씩 당겨라‘는 식의 말도 들은 적이 있다.”
Q. 아파트 사다리 장면은 <애마부인>에 나온 이야기를 폭발적으로 확장시킨 신이다. 그 장면에서 이하늬와 방효린이 “영차, 영차"하는 대사가 이 영화의 최고의 대사인 것 같다.
▶이해영 감독: ”그 사다리 장면은 꼭 패러디를 해보고 싶었다. 뒤집어보고 싶은 생각이 가장 컸던 장면이라 가장 괴팍한 방식으로 재해석하고 싶었다. 특히 곽 감독의 ’에로-그로-넌센스‘에 부합하도록 비틀어보고 싶어서 좀 기이한 상상력을 동원해서 완성했다. 눈물을 흘리며 포박을 당한 윤호부터, 역시 진실한 감정으로 ’영차 영차‘를 연기해준 희란 주애까지, 그로테스크한 씬을 진지하게 연기해준 배우 분들에게 너무 감사한 마음이다.“
Q. 그나저나 당대 최고의 무소불위의 권력자가 등장하는데.
▶이해영 감독: ”특정인물이 떠올랐다면 아마 그건 그 시대의 아이콘이기 때문일 것이다. 저도 그 인물로부터 자유롭지는 못 했겠지만, 픽션이라는 전제하에 묘사한 인물이라 특정인물과의 직접적인 연관성을 의도한 아니다.“
Q. 덤으로 연예부 기자에 대한 묘사는? 안 좋은 기억이 있는지?
▶이해영 감독: ”개인적으로 안 좋은 기억은 없다. 80년대 당시의 연예부 기자는 엄청난 권력을 가진 집단이 아니었을까. 시청자들이 빠르게 파악하고 이입할 수 있는 직업군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Q. 이해영 감독은 어떤 작품을 잘 만드는 감독으로 기억되었으면 하는지.
▶이해영 감독: ”캐릭터이건, 배우이건 사람을 잘 다루려고 노력했던 감독으로 기억되었으면 좋겠다.“
[사진=넷플릭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