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밤 방송되는 KBS [독립영화관] 시간에는 대한민국 독립영화계에서 맹활약 중인 배우 한혜지가 출연한 작품 두 편을 소개한다. 김현정 감독의 중편(50분) <입문반>(19)과 정지혜 감독의 <면도>(2017)이다.
‘입문반’은 지방에 살며 서울의 한 ‘영화관련 교습기관’에서 영화 창작을 배우고 있는 가영(한혜지)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매번 고속버스를 타고 와서는 자신의 이야기를 담을 수 있는 시나리오 작법을 배운다. 가영은 ‘사회적 약자인 성소수자’의 이야기를 꼭 하고 싶다고 말하지만 선생님은 이야기가 현실성이 떨어진다고 말한다. 같이 수업을 받는 민정(김해나)이 스터디에 초대하고, 읽어보라고 책도 선물해 준다. 지방에서 힘들게 올라오고, 매번 모임 자리에서는 일찍 자리를 떠야했던 가영은 민정에게 고마움을 느낀다. 그런데 민정의 생각은, 혹은 의도는 다를지 모른다. 수료식이 있는 날, 뒤풀이 장소에서 가영은 폭발하고 만다.
주눅 들린 듯한 사투리, 항상 자신감 없어 보이는 표정 등이 살아있는 한혜진 배우의 실감나는 연기 때문에 관객들은 가영이 쓰고 있는 시나리오를 보지 않아도 알 듯하다. 문제는 학교(학원)에서 배우는 것 이상으로, 관계와 사람들과의 어울림에서 얻는 것이 더 많다는 것이다. 아마도, 가영이에게는 그런 것들이 섬세한 영혼을 뒤흔드는 충격이었을 것이다. 가영이 휘청거릴 때마다 시나리오는 널을 뛰었는지 모른다.
김현정 감독은 가영이의 시나리오 완성되는 것과 함께 가영이의 (사회)관계 증진, 누군가와의 관계 회복을 조심스레 따라간다. 하지만 사람과의 관계란 것은 상대적이다. 사랑이 일방적이 않은 것처럼. 자신의 의지와는 달리, 대상은 항상 움직이는 것일 수도 있으니 말이다. 어쨌든 영화창작의 입문자이든, 새로운 세상에 발을 더디는 사람이 겪는 주저함과 혼란, 그리고 좌절감을 그린다.
김현정 감독은 이야기하고자 하는 바를 섬세하게, 한혜지는 그 인물을 완벽하게 형상화 시킨다. 특히, 마지막 장면은 <오발탄>의 택시 승객처럼, 갈피 잃은 마음을, 그 상실감을 극대화 시킨다.
<아무도 없는 집>으로 미쟝센 단편영화제 대상을 받았던 김현정 감독은 이 작품으로 작년 열린 제45회 서울독립영화제에서 대상을 받았다. 주연을 맡은 한혜지 배우에게는 독립스타상이 돌아갔다. (KBS미디어 박재환)
[인터뷰] 김현정 감독 "외로움, 집요함, 그리고 나의 영화"
다름은 KBS 독립영화관이 방송을 앞두고 김현정 감독과 진행한 지면 인터뷰이다.
- <입문반>을 연출하게 된 계기
“<입문반>의 초고는 5년 전, 시나리오 공부를 시작하고 한참 습작을 하던 시기에 완성하였다. 당시 장르를 가리지 않고 엉뚱한 시나리오를 써보려 애를 썼던 시기였는데, 썼던 시나리오 수에 비해 이야기의 완성도나 깊이 등이 좋지 않았다. 아마도 제가 잘 알지 못하는 세계와 캐릭터를 다루다보니 나타난 결과 같았다. 그래서 이후 자전적 경험을 바탕으로 시나리오 쓰기를 시작했고, <입문반>도 그렇게 시작하게 된 이야기 중 하나이다. 또한 개인적으로 외로움, 소외감, 관계 등에 얽매여 있었고 한번쯤은 그것을 집요하게 파고드는 작품을 만들고 싶었다.”
“저에게 익숙한 ‘지방과 서울을 오가며 시나리오 수업을 듣는 캐릭터’를 바탕으로, 그 안에서 묘하게 겉돌며 관계에 얽매인 채 이리저리 이끌리는 상황을 최대한 극대화시키려 했다. 아마도 저의 주된 화두가 집약된 시나리오다보니 더 애착이 갔고 그래서 더 영화로 완성해야겠다는 의지도 있었다.”
- 제목이 많은 걸 내포하고 있는 것 같다. 제목을 ‘입문반’이라고 지은 것은?
“제가 다녔던 시나리오 학원에서는 ‘기초반’이라는 이름으로 수업이 운영되고 있었다. 거기에서 파생해 ‘입문반’이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입문반’은 마치 극 중 가영이 듣는 수업의 이름 같기도 하고 이 작품의 줄거리를 내포하는 것 같기도 해서 그러한 중의적인 느낌이 좋아서 제목으로 결정하게 되었다.”
- 이 영화를 만들 때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신 건 무엇인지.
“관계에서 소외되고 겉도는 인물이 느낄 감정 선을 면밀히 따라가고자 했다. 극 중 가영이 겪는 사건은 작품의 테마를 강조하기 위해 설정된 것이지만 보편적인 상황이 아닌 만큼 공감대를 형성하기가 어려울 것이라고 예상했다. 그래서 가영의 세밀한 감정 묘사를 통해 조금이나마 이야기의 설득력을 만들고 싶었다.”
- 가영을 연기한 한혜지 배우와의 인연은?
“서울독립영화제 행사에서 갔다가 지인들과의 자리에서 한혜지 배우를 처음 만났다. 당시 좋은 이미지의 배우라고 생각은 했지만, 제가 생각한 가영과는 거리가 멀어서 같이 작업을 할 것이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었다. 이듬해, 영화 프리 프로덕션 중 오디션 공고를 냈고 한혜지 배우가 먼저 가영 역으로 지원을 하셨다. 그렇게 배우님을 다시 만났고 여러 이야기를 나누며 한혜지 배우와 함께 만들 가영은 어떤 모습일지 궁금한 마음이 점점 커졌다. 그리고 긴 고민 끝에 배우님께 가영 역을 부탁드리게 되었다.”
- 대구영화제에 대한 이야기도 나온다. 지역 영화인들의 모습이 조금 엿보이는 것 같은데, 지역을 기반으로 하는 활동에 장단점이 있다면.
“예전에 이런 질문을 종종 받아서 몇 번 답변을 드리곤 했는데, 사실 제가 서울에서 영화를 만든 경험이 없다보니 그 때 드린 대답이 제대로 된 것인지 잘 모르겠다. 요즘은 오히려 한 지역에서 온전히 다 완성되는 영화는 없다는 생각이 든다. 영화 공부를 하든, 영화를 찍기 위해 장비를 빌리고 스텝, 배우를 구하든 여러 지역에 걸쳐지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런 점에서 영화 활동이 가장 지역에 구애되지 않는 영역인 것 같다.”
- 2015년 <은하비디오>이후 꾸준히 작품을 연출한다.
“단편으로 완성된 작품들은 시나리오 공부를 시작한 초반인 습작 시기에 대부분 쓴 것이다. 당시 아이디어를 구상하기 위해 극 중 시간과 장소를 비틀어보기도 하고, 개인적인 경험을 떠올리기도 하는 등 많은 방법들을 배우고 활용했다. 하지만 대개는 평범하면서 결핍이 있는 인물들에 관심이 많이 가고, 그런 인물들을 위주로 작품을 구상하게 되는 것 같다. 작품을 구상하는 것 자체는 즐겁지만, 그것을 영화 한 편으로 완성한다는 것은 기적에 가까운 일이기에 제 안에 그 지난한 과정을 붙잡을 만한 동력을 찾고 유지하는 것이 가장 어렵다.”
- 준비하고 있는 작품은.
“<흐르다>라는 제목의 장편영화이다. 현재 촬영은 마쳤고 내년에 선보일 수 있게 후반작업을 하고 있다.”
- 마지막으로 <입문반>을 보는 시청자 분들에게 한 마디.
“<입문반>을 보신 분들이 어느 날 문득 곱씹게 되는 영화이길 바라며 열심히 만들었습니다. 하루가 내 마음 같지 않고 버거운 날, 이 영화가 작은 위로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귀한 시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입문반]
연출/각본: 김현정 출연: 한혜지, 김해나, 고유준, 박지원, 이송희
촬영:김용현 조명:김범준 편집:원창재(이음 편집실) 제작지원:협성문화재단
[사진 = 영화 '입문반' 캡쳐 - 김현정 감독 / 서울독립영화제 페이스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