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들은 지금까지 잘 견뎌왔고 잘하고 있어. 당신은 가치가 있는 연기를 하고 있어’라는 말을 해주고 싶었다.”
권해효는 ‘닮고 싶은’이라는 수식어가 어울리는 배우이자, 어른이다. 배우를 넘어 한국 여성단체 연합의 평등가족 홍보대사, 조선학교 학생들을 지원하는 ‘몽당연필’의 대표를 맡고 있기도 한 그는 젊은 세대에게 그만의 방식으로 삶을 대하는 태도에 대한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평소 사각지대에 배치된 이들을 위해 자신의 목소리를 아끼지 않는 그는 최근 전태일 열사의 삶을 담은 애니메이션 영화 ‘태일이’(감독 홍준표)에서 한미사 사장 역의 목소리 연기를 맡았다. 그는 작품에 임하는 의지와 작품에 대한 설명을 덧붙였다.
“전태일 이름 석 자를 모르는 사람들이 오히려 많이 볼 수 있는 영화가 되었으면 한다. 한미사 사장의 역할을 맡았을 때 악역을 맡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대한민국에서 노동을 착취하고 임금을 체불하는 대부분의 나쁜 사람들이 자신이 나쁜 인간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지금과 같은 경쟁 시대에 자신들은 성공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가진 사람이 더 하는 것이 뭐가 문제야’라고 생각할 것이다. 한미사 사장 역시 ‘당연히 그래도 돼’라고 믿고 있는 사람이기에 그 인물이 지닌 정당성을 연기자로서 오롯이 표현하려고 했다.”
더불어 그는 올해로 20년 째 ‘서울독립영화제’의 사회자를 맡고 있다. 그는 잘 알려지지 않은 신인 감독과 배우들의 땀과 열정을 전하기 위해 때로는 배우로서, 때로는 선배로서 응원을 아끼지 않았다. 그는 “개인적으로 사회자보다는 심사위원장, 집행위원장, 프로그래머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사회자는 대단한 일을 하는 것도 아니다. 순서를 읊어주는 일 정도다”라며 사회자를 맡은 계기에 대한 겸손한 태도를 보였다.
권해효는 지난 20년간 '서울독립영화제'에서 사회자임과 동시에 목격자였다. 한 해의 독립영화를 아우르는 축제 속에서 20년 동안 변화해왔던 영화 산업의 현실을 오롯이 지켜봤다.
“지난 20년 비약적으로 성장했던 한국 독립영화의 발전을 눈앞에서 볼 수 있었던 것은 기쁨이다. 하지만 때로는 정권 교체 시기마다 부당한 대우를 받았던 작품들을 보며 함께 분노하고 속상해 했던 기억들도 있다. 물론 대단한 영화를 발견하는 순간도 있었다. 능력 있는 신인 감독과 배우들을 출발 시기에 함께 볼 수 있었다는 점이 흥미로웠다. 무엇보다도 이 일이 나를 자극했다는 사실 만큼은 확실하다. 앞으로도 '서울독립영화제' 개막식에 온 모든 사람들에게 세대차나 연령에 상관 없이 ‘어서와요. 우리 함께 놀아봅시다’라고 이야기해줄 수 있는 어른이자 선배가 되었으면 하는 마음이다."
그는 60초 분량의 자유 연기가 담긴 영상을 공모한 배우들 중 24명을 발탁하는 '배우 프로젝트'의 심사위원을 맡았다. 주관 배우인 조윤희를 비롯해 ‘기생충’(감독 봉준호)에 출연한 배우 이정은, 감독 김도영, 김의석과 함께 심사를 진행했다.
“대한민국에 배우를 꿈꾸고 살아가고 있지만 대중에게 알려지지 않은 사람들이 많다. 배우 입장에서 할 수 있는 일이 없을까 생각하다가 지금까지 3년 째 하고 있다. 매년 더 좋은 배우들을 만나고 있다. 배우들은 ‘내가 잘하고 있는 것인가’에 대해 매일 스스로 의심하고 궁금해한다. 뽑힌 사람들에게 ‘당신들은 지금까지 잘 견뎌왔고 잘하고 있어. 당신은 가치가 있는 연기를 하고 있어’라는 말을 해주고 싶었다.”
이어 “나이가 들수록 나랑 안 놀아주니 놀 사람을 찾아다니는 것이다.(웃음) 이렇게 뽑힌 배우들을 현장에서 만나는 경우가 있다. 그때 기분이 좋다. 요즘 TV에 나오는 배우 오경화 또한 우리가 선정했던 배우 중 한 명이었다. 우리가 뽑지 않았다고 해도 언젠가 잘 나갈 사람들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냥 그 사람들이 '배우 프로젝트'를 통해 자신감이 생기는 계기가 됐으면 좋겠다는 바람이다”라며 훈훈한 응원을 덧붙였다.
이처럼 영화인들을 응원하는 다채로운 프로그램에도 불구하고 코로나 사태로 인해 ‘서울독립영화제 2020’은 축소된 규모에서 개막했다. 그는 “올해 마지막 영화제니 축제처럼 열리길 바랐는데 요즘 코로나의 상황이 나빠지면서 위축됐다. 코로나 시대 이후에 관객들이 극장으로 오게 될지 이제 앞으로의 영화산업 어떤 식으로 변화해야 할지, 다들 불확실성을 가지고 있는 요즘이다. 영화를 만들고자 했던 감독은 유보된 투자금에 대한 걱정할 것이고, 투자자는 투자금을 회수하기 위한 안정성에 대해 고민할 것이다”라고 우려를 표했다.
하지만 동시에 그는 반대로 묘한 기대를 내비치기도 했다. 그는 “이르면 내년이나 내후년, 한국의 독립영화는 2020년을 어떻게 담아내고 있을지 궁금하다. 2014년 세월호의 그림자가 컸다. 그 당시 제작됐던 독립영화에는 창작자들이 가졌던 충격, 부채 같은 것들이 다 담겨 있었다. 2021년에는 코로나에게 지배 당한 2020년을 어떻게 담아낼지 기대된다”고 언급했다.
그와의 대화를 이어나가다 보면 전작인 드라마 ‘검색어를 입력하세요 WWW'에서 맡았던 브라이언이라는 인물을 떠올리게 된다. 직급이나 체계를 벗어난, 일명 ‘꼰대’가 아닌 어른이다. 권해효는 자신이 생각하는 어른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그는 “50세가 될 때 내가 지키려고 한 몇 가지가 있다. 나이 묻지 않기, 결혼 여부 묻지 않기, 아이에 대해 묻지 않기, 학번 묻지 않기다. 그 외에도 콧털 잘 깎고 다니기 등이 있다(웃음)”라고 언급했다.
이어 그는 "‘젊은이들이 되고 싶은 사람’이라는 타이틀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냐"라는 질문에 소탈하게 답했다.
“나를 그렇게 봐준다면 좋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예전에 주현 선배님한테 아이들이 ‘주현이다’라고 부르는 것을 보고 놀랐는데 선배님이 ‘아이들이 저렇게 하는 게 얼마나 대단한 건지 아니?’라고 말하더라. 생각해보니 초등학생 정도면 두 세대를 뛰어넘는 나이 차인데 정말 대단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우리는 그런 방식과 마음으로 살아가야 하는 것이 아닐까라고 생각한다.” (KBS미디어 정지은)
[사진= KBS미디어 박재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