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종빈 감독
‘용서받지 못한 자’(2005)들로 데뷔한 이래, ‘범죄와의 전쟁:나쁜놈들 전성시대’(2012), ‘군도:민란의 시대’(2014), ‘공작’(2018)과 넷플릭스 ‘수리남’(2022) 등 선굵은 남자들의 영화를 만들어온 윤종빈 감독이 김다미-손석구를 앞세워 섬세한 추리물에 도전했다. 디즈니플러스에서 공개된 11부작 <나인 퍼즐>이다. ‘여자’ 프로파일러와 ‘남자’ 형사라는 인물배치에서 시작된 <나인 퍼즐>은 10년 전 미제사건에서 출발하여 연쇄살인을 거쳐, 도심 재개발의 충격적 복수까지 이야기가 뻗어간다. 그래서 범인은 누구? 윤종빈 감독을 만나 디즈니플러스와 함께한 미스터리 추리극의 묘미에 대해 물어봤다.
Q. 여태 해온 작품과는 결이 조금 다른 것 같다.
▶윤종빈 감독: “그동안 찍은 영화는 리얼리티가 베이스에 깔렸고, 남자가 많이 나오는 작품들이었다. 이 영화 연출을 제안 받았을 때는 내가 해오던 것과는 거리가 있는 대본이었다. 메인 서사가 여자였다. 대본 자체가 흡입력이 있었다. 처음 든 생각은 이게 과연 현실에서 일어날 수 있는 일인가, 존재할 수 있는 인물인가 의문을 가졌다. 현실에서 보기 힘든 이야기이니 가능하게하려면 새로운 세계관을 만들 필요가 있었다. 현실과 만화 사이에 있는, 내가 여태 안 해본 새로운 작업이 될 것 같았다. 실제로 작업하며 재밌었다. 캐릭터나 의상 같은 것을 만화적으로 보여주고, 새로운 공간을 창조했다. 등장하는 경찰차나 제복이 우리 현실과 다르다. ‘이건 가상의 세계야’라며 보여줄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Q. 대본 작업에는 참여하지 않았는지.
▶윤종빈 감독: “처음 대본을 봤을 때는 관객의 입장과 같았다. 저의 추리 실력을 보자면 ‘중하’정도이다. 그래서 작가님이 설계한 것을 그대로 두었다. 전체 이야기의 틀은 유지했다. 수정한 것은 캐릭터의 디테일이다. 윤이나나 김한샘에 대해서는 배우들과 이야기하며 바꿨다. 작가님의 대본이 유연하게 열려있어 가능했다.”
'나인 퍼즐'
Q. 어떤 식으로 조정했는지.
▶윤종빈 감독: “작가의 의도보다는 내가 어떻게 받아들였나이다. 윤이나는 거침없고 직설적이지만, 프로페셔널한 인물로 그리기보다는 삼촌의 죽음을 목격한 트라우마를 갖고 있다. 내면적으로는 유아적으로 퇴행한 면이 있다. 번지점프를 할 때를 보면 고등학생인데 이상하긴 하다. 감정적으로 고립된 인물로 설정했다. 정신과 상담도 다니고. 전반적인 톤은 만화적인 캐릭터이다. 이나는 어느 한 대상에 집중하면 나머지는 인지하지 못하는 인물이다.”
Q. 윤이나는 ‘명탐정 코난’ 같기도 하다.
▶윤종빈 감독: “옷이나 소품, 외형적으로는 탐정물의 상징이 있다. 그런데 우리는 작품을 찍으면서 윤이나를 ‘보스 베이비’ 같다고 했다. 어른 같지만 유아적인 감정의 결을 갖고 있다. 기존의 프로파일러와는 다르게 익살스럽게, 만화적으로 자연스러운 느낌이 난다.”
Q. 뭔가 덜 풀린 의문 같은 게 많이 남아있는 것 같다. 삼촌이 죽던 날 기숙사를 빠져나가며 룸메이트에게 남긴 대사라든지, 이희준을 두고 ‘사람이 많이 달라졌어요’라고 말하는 대목 같은 것.
▶윤종빈 감독: “제가 느끼기엔 떡밥이 아니다. 보는 사람들은 그렇게 받아들이는 것 같다. 요즘 관객들이 능동적으로 추리하며 작품을 본다. 한샘의 ‘카레 친구’ 같은 것도 생각 이상으로 많은 추리를 하더라.”
Q. 초반에 여성서사라고 말한 부분은 어떤 의미인지. 윤이나의 성장 관점에서 보자면.
▶윤종빈 감독: “특별히 여성서사라고 접근한 것은 없다. 윤이나는 유아적인 모습을 보이다가 시간이 지날수록 톤이 바뀐다. 성장한다는 느낌이 든다. 시청자들도 보면서 어른이 되어 간다는 느낌이 들었으면 했다. 김다미 배우와 그런 이야기를 많이 나눴다. 기존의 프로파일러와 다르게 섬뜩하기도 하다. 이나는 하나에 꽂히면 사로잡히는 인물이다. 그렇게 집요하게 수사하는 모습을 보인다.”
Q. 노안 대표배우 현봉식이 막내형사 역이다.
▶윤종빈 감독: “캐스팅 과정에서 현실적으로 와 닿는 그 역할의 배우가 없었다. 그러다가 ‘봉식아, 너가 (손)석구보다 어리지?’ 했더니 ‘예, 어립니다’ 하더라. ‘말이 되겠네’ 싶었다. 차우진이 맡았던 역할도 원래는 여자였다. 형사물을 보면 구성이 똑같다. 고참, 여자, 막내 등등. 비슷한 것 같아서 조합을 바꿔보았다.“
Q. 이건, 공개방식의 문제인지는 모르겠지만 지진희, 이성민, 이희준, 황정민 같은 배우들이 그냥 죽어나가는 것이 아쉬울 정도이다. 매주 한 회씩 보게 된다면 특별출연의 묘미가 있겠지만 한꺼번에 공개되면서 대배우들이 이야기에 묻혀버린다. 배우들의 재능낭비 같은 느낌도 들기도 한다.
▶윤종빈 감독: “다른 선택지가 별로 없었다. 초반에 다들 시체로 나온다. 만약 잘 모르는 조단역을 캐스팅했으면 이야기의 흐름에서 각인이 잘 안되었을 것이다. 어떤 배우를 캐스팅해야할까. 얼굴이 익숙해야 나중에 플래시백 장면에서도 관객이 이야기의 흐름을 따라갈 수 있을 것이라고 봤다. 그런 배우들 캐스팅 섭외는 친분과시가 아니다. 부탁하는 게 더 어렵다. 이게 다 언젠가는 갚아야하는 것이니.”
'나인 퍼즐'
Q. 과연 범인은 누굴까 추리하며 보게 된다. 그런데, 결과적으로 보면 살인의 구체적인 과정이나 방법이 나오지 않는다. 혼자의 힘은 어려울 것 같은데 뚜렷한 조력자도 안 보인다.
▶윤종빈 감독: “관객과 같은 입장에서 보면 ‘왜’에 포커스를 맞춘 설계라고 봤다. 왜 승주(박규영)가 이런 일을 꾸몄을까. 그 당위성을 설명하면서 ‘어떻게’가 생략된 것이다. 살인의 방식을 보면 특별한 것은 아니다. 의학적 지식을 이용한 것이지 대단한 완력이나 굉장한 창의력이 필요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해도 납득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마지막에 결말에 대해 이야기하자면, 대부분의 추리소설이나 스릴러의 문제는 반전에 대한 강박이다. 센 결과를 하려다보니 설득력이 떨어지는 경우가 많았다. 작가가 짜놓은 ‘더 원 시티 재개발’에 대한 이야기가 수긍이 되었다. 끝에 가서 어느 정도 팁을 주었다. 퍼즐이 또 온다. 모방범죄일 수도 있겠지만, 뒤에 누군가 더 있을 것이라는 느낌을 준다. 설정상 오랜 시간 기획하고, 준비한 것이니 함께 한 누군가가 있다고 본다. 백 프로 해소는 안 되겠지만 어느 정도 여지는 있다고 봤다. 그런데 한샘 엄마는 왜 더원시티에 살까. 설명할 필요가 있을 것 같아서 ‘청약 넣었다’는 대사를 집어넣은 것이다.”
Q. 그 과정에서 ‘김한샘’(손석구)이 범인이라고 추리한 사람도 있다.
▶윤종빈: “우리 스탭 중에서는 한샘이 범인이라고 생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양정호, 황인차(노재원)가 아닐까, 돌고돌아 윤이나가 오더한 것이라는 이야기가 많았다. 손석구가 범인이라니? 대단한 상상력이다. 그런데 그렇게 추리하는 사람이 많더라. 좀 더 특별한 추리는 사이비종교와 연계되었을 것이란 의견도 있었다. 시청자가 이렇게 추리하는 것도 공개방식 때문일 수도 있다. 한꺼번에 다 공개되었으면 이런 추리도 덜 했을 것 같다.”
Q. <나인 퍼즐>은 전체 11부작이다. 이 애매한 분량의 이유는?
▶윤종빈 감독: “원래 대본은 12부작이었다. 메인 사건과 연관이 있어야한다. 5부의 경우는 윤이나가 발상의 전환을 하게 되는 이야기가 있다. 이들이 피해자가 아니라 가해자라면? 프레임의 변화를 보여준다. 그것처럼 또 다른 터닝 포인트가 7부에 있었는데, 5부 하나로 충분하다고 보았다. 현실적으로 촬영 분량도 많아 빼기로 했다.”
윤종빈 감독
Q. 결국 처음 이야기를 만든 작가의 세계관이란 게 있을 텐데, 감독으로서 보았을 때 <나인 퍼즐>의 확장성은?
▶윤종빈 감독: “<수리남> 끝내고 영화를 준비하다가 드라마 연출 제안을 받았다. 카카오(엔터테인먼트)에서 <나인 퍼즐> 대본을 검토해달라는 것이었다. 현실적으로 시리즈 연출을 할 상황이 아니었다. 그래서 앞 에피소드만 찍으려고 했다. 공개될 플랫폼으로 디즈니플러스가 결정되었고, 내가 작품 전체를 연출하기로 했다. 배우들도 그렇게 원했고, 상황이 그렇게 되었다. 원래 처음 본 것은 3부까지의 대본이었다. 나머지는 트리트먼트였다. 연출을 하면서 제 해석이 들어간 것이다. ‘시즌2’를 염두에 두고 연출을 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제가 감독으로서 ‘시즌2’를 닫아놓아서는 안 된다는 생각은 했다. 시즌제로 갈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 작품이니 열어놓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시즌2> 여부는 저보다는 디즈니플러스와 카카오엔터, 작가의 의지가 가장 중요하지 않을까. 저는 내년에 바로 다른 영화 작업들어가야 한다.”
Q. 더원시티 이야기와 관련해서는 연상되는 사건사고가 있다. 이런 현실적인 문제를 다루는 것에 대한 부담감을 없었는지.
▶윤종빈 감독: “저도 대본을 보고는 작가에게 물어봤다. 용산참사 아니냐고. 그런데 아니라고 하더라. 공권력이 무리하게 진압한 것이다. 이건 우리나라의 악명 높았던 한 철거 용역업체의 이야기이다. 워낙 피해사례가 많아서 관련 논문도 있다.”
Q. 프로덕션 디자인에 대해.
▶윤종빈 감독: “만화적인 느낌을 주고 싶었다. 리얼한 공간보다는 톤을 좀 올렸다. 실제로 컨셉을 잡은 것은 마지막에 주요테마가 재개발 이슈가 될 터이니, 옛것과 새것의 대비가 공간에서 느껴지기를 바랐다. 경찰청은 신사옥 느낌이 들게, 한강서는 오래된 느낌의 인테리어를 생각했다. 한샘의 엄마는 새 집이고, 한샘의 아파트로 오래된 느낌을 주도록 했다.”
Q. 추리 장르의 매력은
▶윤종빈 감독: “그 동안 안 해 본 작업이어서 재밌었다. 이번에 안하면 평생 안할 것 같았다. 우리나라에서는 추리전통이 별로 없다. 기회가 되어 연출을 맡았다.” (이런 작품 연출 제안이 또 온다면?) “장르가 어떤지는 중요하지 않다. 이야기의 매력이 중요하다. 흡입력 있는 대본이었고, 내가 할 만한 이야기라서 선택한 것이다. 이제는 추리가 아닌 다른 작품을 하고 싶다. 로코만 아니면 된다. 저의 DNA에는 로코가 없다. 오글거리는 것 잘 못 본다.”
Q. 후반부에 "왜 사람을 죽여서 사람 살 곳을 만들지?"라는 대사에 대해서.
▶윤종빈 감독: “대본을 읽었을 때 그 대사가 작품을 설명하는 가장 큰 키워드라고 생각했다. 원래 다른 사람의 대사였는데 승주의 대사로 바꿨다. 도시 재개발이라는 게 한국처럼 서울 중심으로 과밀화된 나라에선 안 할 수 없는 문제일 것이다. 그런데 거기서 많은 비극이 일어난다. 그 말 한마디가 이 작품 전체를 설명해 준다고 생각했다.”
Q. 현장은 어땠든지.
▶윤종빈 감독: “배우들이 순하고 성실했다. 현장은 화기애애하고 호흡이 잘 맞았다. 힘든 촬영 스케줄이었는데 불평불만이 없었다. 손석구 배우랑은 편하게 잘 지냈다. 배우가 먼저 잘 다가와 주었다. 김다미와는 촬영이 끝나고 나서 말을 놓은 것 같다. 다미 배우는 ‘극I’이고, 저도 ‘I’이다보니 친해지는데 시간이 걸렸다.”
Q. 이승주의 마지막에 대해.
▶윤종빈 감독: “대본에서는 약물로 자살하는 것인데 엔딩으로는 약하다고 생각했다. 고민하다가 자신의 엄마가 죽었던 방식을 생각했다. 범인에게 줄 수 있는 마지막 방식일 것이다. 용서를 비는 것일 수도 있고. 엄마를 미워하다가 그런 선택을 한 것이다. 사실 화형은 최악의 고통이다.”
윤종빈 감독의 차기작은? “2015년,16년에 처음 쓴 대본이다. 오랫동안 간직해온 시나리오인데 올해 구체화를 해서 내년 봄에 촬영에 들어갈 예정이다. 제가 원래 해왔던 남자들만 나오는 이야기이다. '용서받지 못한 자' 이후의 두 번째로 내놓는 군인이 주인공이 영화이다.”
손석구와 함께 김다미, 김성균, 현봉식, 안소요, 이주영, 옥자연, 박규영, 노재원, 정태식, 김예원 등이 출연하는 윤종빈 감독의 디즈니플러스 11부작 <나인 퍼즐>은 지난 5월 21일, 1~6화 공개를 시작으로 6월 4일 최종회가 공개됐다. 이 작품에는 지진희, 이희준, 이성민, 백현진, 황정민, 박성웅도 잠깐 등장한다.
[사진=월트디즈니컴퍼니코리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