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 있는 게 더 끔찍하대. 저기 빠지면 말이야. 온몸이 으스러져서 살아남아도 올라갈 수가 없대.”
억겁의 시간이 만든 함정인 ‘크레바스’. KBS ‘드라마 스페셜 2020-크레바스’(연출 유관모)는 두 남녀의 위험한 사랑을 다룬 작품으로 지난 14일 방영되며 화제를 모았다.
연출을 맡은 유관모 PD는 방송이 끝난 후 인터뷰를 통해 당시의 감회를 밝혔다. 그는 “생각보다 순식간에 지나갔다. 나온 결과물이 마음에 들었고 내 모자란 역량으로 최대치를 뽑아냈다는 생각이 들었다. 만족스러웠고, 즐기는 마음으로 봤던 것 같다. 시청자의 입장으로 돌아갔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 작품을 선택한 계기에 대해 “인생에 대한 깊이 있는 이야기나 무거운 주제에 관심이 많다. 현실 속에 있을 법한 소재면서도 깊이 있는 이야기를 찾고 있었다. 대본을 읽었을 때 여운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중에서도 상현이 수민에게 “수민아”라고 말하는 장면에서 크게 끌렸다. '이 신만 잘 찍으면 이 드라마는 잘 되겠다'는 생각을 했었다”고 밝혔다.
‘크레바스’에서 배우 윤세아는 남편과 자식의 관심을 받지 못하는 아내 수민 역을 맡았으며, 배우 김형묵은 수민의 무뚝뚝한 남편인 진우 역을, 그리고 배우 지승현은 아내를 사고로 잃은 후 딸과 함께 세상에 남아 괴로움 속에 갇힌 상현 역을 맡았다.
유 PD는 캐스팅에 대해 “운이 좋았던 것 같다. 이전에 세 배우들과 인연이 없었다. 캐릭터에 맞는 이미지를 찾아서 캐스팅을 하자고 생각했고 윤세아 배우가 떠올랐다. 1위 후보였다. 캐스팅이 될지 안 될지 모르고 대본을 전달했는데 캐스팅이 됐다. 수민이라는 인물이 가진 감정에 대해 많은 설명을 하지 않아도 이해해줬다. 배우 김형묵도 평소 항상 악역이거나 센 역할을 하다가 보편적인 남성 캐릭터를 연기해보고 싶어했고 운명처럼 만나게 됐다. 배우 지승현 또한 ‘이런 역할을 해보고 싶었다’고 해줘서 고마웠다”며 당시를 회상했다.
‘크레바스’는 두 남녀의 위험한 사랑을 다룬 만큼 베드신과 같은 수위가 높은 장면이 등장하기도 한다. 앞서 유 PD는 제작발표회에서 ‘크레바스’에 대해 “공영방송판 ‘부부의 세계’다”라고 언급한 바 있다. 그는 이에 대해 “방송을 본 후 더 19금으로 나갔어도 괜찮았겠다고 생각했다.(웃음) 수위가 높은 장면들은 단순한 욕정을 표현한다고 볼 수 없다. 상현이 “수민아”라고 부를 때 그것을 듣고 수민이 멈칫하는 장면은 수민이 그 순간 욕정을 느낀 것이 아니라 세상에 찌들지 않고 온전히 자기 자신이었을 때를 떠올린 것이라 생각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관계들 속에 자기 자신이 사라지던 차에 이름을 불러준 것이다. 마치 봉인을 해제시키는 마법의 열쇠처럼 원래의 수민으로 돌아가게 만들어준 장면이라고 생각한다”고 언급했다.
그러기에 ‘크레바스’는 인간이 지닌 소속감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극중 수민은 빈 껍데기처럼 살아간다. 수민이 상현의 죽은 아내의 옷을 입고, 상현의 딸을 자신의 딸처럼 보살피는 모습은 그가 속하고 싶은 어떠한 세계의 울타리를 보여준다. 유 PD는 “죽은 부인의 옷을 받는다는 것이 수민의 입장에서는 사랑을 받는 느낌이었을 것이다. 마치 세례를 받는 것처럼, 연인, 이 가정의 구성원, 그리고 아내라는 환상이었을 수도 있다. 여러 가지 중첩적인 의미들이 있겠지만, 엔딩 신에서 그 옷을 다시 입고 있는 수민의 모습은 상현한테 돌아가고 싶다는 의미보다는 다시 사랑 받고 사랑하는 존재가 되고 싶다는 상징적인 의미였던 것 같다”고 해석했다.
단막극의 특성상 유 PD는 여러 신들을 잘라내야 했다. 그중에서도 아쉬운 신에 대해 그는 “수민이가 검도를 했다는 설정이 있다. 검도 신이 더 있었는데 분량 상 덜어냈다. 검도는 감정을 차분히 가라앉히고 수련하는 것이지 않나. 수민은 견디기 힘든 지쳐버린 결혼 생활도 그렇고 자식도 그렇고, 사실은 살아가고 있는 것 자체가 남극 탐험가들이 눈발을 뚫고 걸어가듯이 수련하면서 버티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것을 잘 표현해준 장면이었다. 많은 ‘수민’들이 가정에 있을 수 있다. 이 드라마가 실제 삶을 투영하는 매개체라면 많은 시청자들이 공감할 수 있었을 것이라 생각한다”고 언급했다.
이어 “시간이 조금 더 있었다면 위험한 사랑 앞에서 고민하는 수민의 신을 넣고 싶었다. 두 남녀가 어쩔 수 없이 사랑에 빠져버리는 과정이 세게 담겼으면 좋았겠다고 생각했다. 일부 시청자들은 급했다고 생각할 수 있을 것 같다. 상현의 딸과 공원에 가서 행복해하거나 연애를 시작하고 전화를 받고 설렘을 느끼는 신이 있었다. 감정을 좀 더 강조해줄 수 있었던 신들이었다”며 아쉬움을 표했다.
‘크레바스’에는 남극 탐험가들이 빙하 사이를 뚫고 지나가는 다큐멘터리 장면이 등장한다. 여기서 ‘크레바스’의 의미가 등장한다. 빙하의 표면에 생긴 깊은 균열, 억겁의 시간이 만든 함정이라는 이야기가 나온다. 이 장면에 대해 유 PD는 “‘크레바스’가 무언지 시청자들에게 설명해주는 장면이다. ‘크레바스’는 어쩌면 금기다. 수민은 선택을 했다. 상현에게 뛰어드는 것은 탐험가처럼 위험을 무릎쓰고 목숨까지 걸면서 가는 것이다. 어쩌면 그 순간 수민은 미리 안 것일 수도 있다. 사랑에 눈이 멀어서 이성을 잃은 것이 아니라, 상현조차도 ‘크레바스’이자 인생의 함정인 점을 알면서 마지막 발악을 한 것일 수도 있다”고 설명했다.
이어 세 남녀의 이야기에 대해서는 “결국엔 모두가 함정에 빠진 것이다. 인간은 다양한 이중성을 지닌 복잡한 동물이다. 세 남녀가 어떤 결과를 마주했든 저마다의 잘못을 가지고 있다. 진우, 상현, 수민의 입장이 다 이해가지만 결과물은 자업자득이다. 연인이 헤어지게 되면 그것이 무조건 한 사람만의 잘못이라고 말할 수 없는 것처럼 말이다”라고 덧붙였다.
마지막으로 그는 '크레바스' 이후 연출자로서 앞으로 만들어나갈 작품들에 대한 단단한 포부를 밝혔다.
“나는 인생에는 신비한 미스터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크레바스’ 또한 눈에 보이는 것이 다가 아니라는 마음으로 제작했다. 세상에는 마치 기적처럼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일들이 많이 일어나지 않나. 엄마가 괴력을 발휘해 차에 깔린 아이를 단숨에 구한다거나, 사랑에 빠진 상대방에게 입냄새가 나지 않는 것과 같은 것들 말이다.(웃음) 앞으로 드라마를 만들 때 눈에 보이지 않는 인생의 신비함과 미스터리가 담겨진 드라마를 하고 싶다. 오히려 그런 것들이 더 사실이고 진짜니까.” (KBS미디어 정지은)
[사진= KBS '드라마 스페셜 2020' 제작발표회 제공, '크레바스' 캡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