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현 감독
<저글러스>,<옥란면옥> 등을 연출했던 KBS 드라마PD 출신의 김정현 감독이 tvN드라마 <낮과 밤> 연출을 거쳐 디즈니플러스 작품의 연출을 맡았다. 박은빈과 설경구가 주연을 맡은 디즈니플러스 <하이퍼나이프>는 메디컬드라마로 막을 올리고, 미스터로 이어지더니 멜로드라마로 막을 내리는 궁극의 매니아 드라마이다. 이 작품에서 설경구와 박은빈은 ‘뇌’ 수술에 대해서는 화타의 실력을 가진 인물이지만 두 사람에겐 무언가 지독한 결핍과 숨길 수 없는 공통점이 있다. 김정현 감독은 그 결핍을 어떻게 봉합했을까. 김 감독을 만나 그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7,8회를 보고 엉엉 울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대놓고 슬픈 드라마는 아니지만 곱씹어봤을 때, 이들은 지 잘난 맛에 살지만 반대로 보면 한없이 아무 것도 없는 존재이다. 진정 슬펐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Q. 초반에는 메디컬 드라마로 승부하는 줄 알았는데 마지막에 가서는 뜻밖의 장르로 진화했다. 드라마를 마친 소감은.
▶김정현 감독: “그런 반응은 예상했었다. 의도한 것이기도 하고. 매주 두 회씩 공개되는데 조금씩 장르가 달라진다. 제작진이 의도한 바를 제대로 봐주셨다면 감사드린다.”
Q. 마지막 장면에서는 마치 샹송이 흘러나와 더욱 낭만적으로 느껴진다. (가수이자 작곡가인 ‘유발이’가 부른 ‘Dis moi je t'aime란 곡이다)
▶김정현 감독: “그 노래는 첫 수술 장면에서도 나오는데 ‘세옥의 테마’이다. 음악감독에게 요청한 것은 익숙하지는 않은데 호감이 가는, 궁금해지는 곡이면 좋겠다고 했다. 이 작품은 내용이 단순하다. 사랑에 대한 이야기이다. 세옥(박은빈)이 정말 사랑한 것은 수술이다. 자기가 사랑한 것이 증오로 변하는 것이다. 덕희 교수를 대하는 마음이 가장 잘 표현된 것 같다. 세옥은 자기가 좋아하는 것에 대해 ‘기쁘다, 춤추고 싶다’는 느낌이 들도록 한 것이다. 이 작품은 스릴러가 아니다. 두 사람의 관계, 집착하는 스승과 제자의 사랑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자 했다.”
하이퍼 나이프
Q. 정세옥(박은빈)과 최덕희(설경구)는 어떤 사람인가. 사회병리학적으로 접근해야하는 캐릭터인가.
▶김정현 감독: ’반사회적이거나 사이코패스라고 말한 적은 없다. 그런 말을 하면 이 드라마와 인물을 어떤 이미지에 가둬버릴 것이다. 그래서 어떤 캐릭터라고 말하는 것이 조심스러웠다. 어찌 보면 대게 유치한 사랑이다. 어딘가에 미쳐있고, 그것을 빼앗길 것 같아 발버둥친다. ‘하이퍼 나이프’라는 거대한 막 안에서 사랑이든, 수술이든 넓은 의미에서 사랑의 광기를 나타내는 메타포로 생각했다. 어떤 뚜렷한 서사가 있어 누굴 잡거나 죽이는 것이 아니라, 무언가, 사랑에 미쳐 있는 이상한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이다. 처음에는 그게 저 혼자라고 생각하다가 나중에 자신과 똑같은 사람을 발견했을 때의 희열을 이야기한다. 그래서 사이코패스나 반사회적 인물이라고 단정하지 않았다. 현실적으로 있을까 싶을 정도의 이상한 사람이다.”
Q. <하이퍼 나이프>에 대한 시청자의 호불호가 갈리는 지점이 두 사람의 감정선, 관계성이다. 대중적인 패턴이 아니다. 드라마로 만들며 고민했을 지점 같다.
▶김정현 감독: “그렇다. 초반에 굉장히 고민을 많이 했다. 초반에 세옥이 살인을 하는데 그건 어떤 형태든 용서할 수 없다. 사회적으로 말이다. 그런데 이건 허구의 이야기이다. 보통 이런 피카레스크 장르에서는 사람을 죽일 때 응당 이유가 있다. 굳이 죽이는 합당한 이유가 있을까. 유치하지만 ‘내 것을 뺏는다면 다 제거한다’라면? 굳이 설명하지 않고 그냥 보여주는 것이 우리 드라마의 톤 앤 매너에 더 맞지 않을까. 배우들과 공감한 부분이다. 이들은 정당성을 부여할 수 없는 인물이다. 이런 이야기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재밌게 받아들일 것이다. ‘이게 뭐야?’하는 시청자까지 모두 끌어안고 갈 수는 없는 이야기라서. 만약 그랬다면 드라마의 전체 색깔이 희석될 것이다.”
Q. 세옥이 우산으로 덕희 교수를 때리는 장면도 있다. 유독 비가 많이 내린다.
▶김정현 감독: “장르물의 특성상 분위기 조성을 위해 밤 신이 많았고, 비도 많이 내린다. 제가 한 드라마 중 가장 비가 많이 내린 것 같다. 준비하느라 시간을 많이 썼다. 비를 많이 쓴 것은 세옥과 덕희가 기본적으로 가진 내면의 슬픔, 그런 정서가 있지 않나 싶다. 세옥이 쫓겨날 때 비가 억수같이 내린다. 그 장면과 대비해서, 되새김질하게 하는 설정이기도 하다.”
Q. 세옥의 목덜미에 있는 타투는 ‘뇌’의 이미지이지만 나비 같이 보이기도 한다.
▶김정현 감독: “박은빈 배우가 문신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해서 좋은 아이디어라고 했다. 문신 디자인 때문에 한 달 정도 고민했다. 기본적으로 단순한 멋으로 들어가는 것은 좋아하지 않았다. 의미 없이 멋 부리는 것이라면 시선만 뺏는 것이니. 의미를 담고 싶었다. 문신은 둘의 관계가 끝에 가서 달라지는 그 변화를 보여주고 싶었다. 세옥이 쫓겨난 뒤 그 문신을 했다. 여전히 뇌에 미쳐 있고, 완성체가 아닌 결핍적 존재일 때이다. 그걸 채우지 못한 상태이다. 뒤에 가서 덕희 교수의 본래 의도, 본심을 알고 나서는 그런 디자인을 한 것이다. 끝에 가서 큰 설명 없이 보여주면 덕희가 세옥에게 어떻게 자리 잡았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저렇게 해놓으니 나비 같다는 이야기도 한다.”
Q. 시나리오 개발 과정은 어땠는지. 연출자로 처음부터 관여했는가.
▶김정현 감독: “작가가 4부까지 써놓은 것을 제안 받고 합류했다. 수정하면서 5부부터 작가와 논의하며 이야기를 만들어갔다. 의견이 많았다. 저도 처음 하는 장르이다 보니. 그래서 장르적으로 방향성을 정해놓고 간 적도 있다. 양 경감(유승목)의 경우 불법에 익숙한 경찰이다. 그런 이야기에 초점을 맞추니 너무 익숙한 대결구도가 되어버렸다. 그런 긴장감은 우리가 하고자하는 이야기의 방향성과는 다른, 뻔한 이야기가 되는 것 같았다. 작가님이 그런 점에서 끝까지 특유의 색깔을 놓치지 않고 잘 써주신 것 같다. 이야기는 처음부터 사제지간의 관계성이라는 지향점이 있었고 그걸 어떻게 보여줄 것인가 고민했다. 재미도 있어야했다. 이야기는 결국 미치도록 비슷한 점을 가진, 뇌수술을 사랑한 미친 의사들의 이야기이다.”
하이퍼 나이프
Q. 결국은 고집이 센 스승과 제자가 대립하는 구조로 이야기가 이어진다. 마지막에 해소되지만 8부까지 끌고 가기 위한 장치가 있어야했을 것 같은데.
▶김정현 감독: “매주 2회 씩 공개되는 것이니 변주에 초점을 두었다. 1,2부는 기본적으로 메디컬드라마로, 살인마 이야기이기에 그것에 맞춰 충실하게, 세게 보여주려고 했다. 3,4부는 덕희의 정체가 드러나면서 음악에도 조금 변주를 준다. 비슷하게 나가는데 어느 순간 확 바뀌면 이질감 줄테니 천천히 변화해 가는 과정이 중요했다. 음악들이 그 전주인 셈이다. 사건의 정서적인 측면보다는 캐릭터의 정서를 중요시하고, 음악으로 표현하려고 했다.”
Q. 정세옥의 특징 중 하나는 상대가 누구든 반말을 한다. 스승에게도, 무서운 조폭 두목에게도 서슴없이. 세옥의 캐릭터를 설명하는 방식인가.
▶김정현 감독: “세옥은 이해할 수 없는 캐릭터라는 것을 보여준다. ‘그냥 그런 애’라고 정해놓았다. 이야기도 그렇고, 캐릭터도 그렇다. 공감이나 응원을 할 수 없는, 이해할 수 없는 인물이다. 그냥 ‘저런 사람도 있나보다’하고 지켜보는 느낌이다. 세옥이의 특출한 캐릭터를 설명하기 위한 장치였다.”
Q. 그렇게 보자면 박은빈이 제일 강하고, 그 밑에 최덕희 교수가 있다. 깡패들은 너무 순한 양이 된다.
▶김정현 감독: “살인의 정당성과 비슷한 맥락이다. 이 세상의 구조는 오직 이 두 사람을 위해 존재한다. 나머지는 둘을 둘러싸고 있는 장식물 같은 존재이다. 두 사람은 사회적으로 나쁜 존재들을 제거하려는 그런 사람이 아니다. 마치 연극무대 같다. 후반부에 보면 사람들이 붐비는 장례식장 복도나 한강에서 누구를 죽였다는 이야기를 아무렇지도 않게 이야기한다. 오직 둘만의 세계가 존재하고, 그 안에서 이야기가 이루어진다고 믿는 것이다. 그러다보니 조폭이든 브로커든, 일반적인 캐릭터로 작동하는 것이 아니라 둘의 관계에서 설명되는 장치 같은 것이다. 일종의 메타포 같은 것이다.”
Q. 리얼리티 측면에서 보자면 명망 있는 의대교수가 공개수배까지 된 상황인데, 어떻게 빠져나갈 수가 있을까.
▶김정현 감독: “장르물이라면 그 문제가 고민되는 지점일 것이다. 경찰의 역할이 커져버리는 순간에 작품의 방향성은 범죄자와 경찰의 쫓고 쫓기는 이야기가 되어 버린다. 그건 우리가 추구하는 방향성이 아니다. 따지고 보면 그들이 안 잡힐 수는 없다. 그 자체는 덕희가 세옥을 궁지에 몰아놓기 위해 과정의 장치라고 생각한다. 우리가 깔아놓은 세계관은 개연성을 따질 수 없는 이야기이다. 만화 같은 이야기이다. 디테일을 파고든다면 관계의 이야기가 힘을 잃을 것이다. 그런데 반대로 생각해보면, 한국에선 충분히 가능할지도 모른다. 기본적으로 천재이기도 하고, 사람의 몸을 다루는 의사이니까. 뒤를 봐주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장치적으로 설명하지 않아도 빠져나갈 수 있지 않을까.”
Q. 정세옥의 캐릭터가 세 보일수록 나머지 남성들이 유약해 보인다. 특히 한현호(박병은)와 서영주(윤찬영)가.
▶김정현 감독: “세옥에 비해 두 사람은 너무나 정상적이고, 모범적인 사람이다. 한현호 같은 의사만 있다면 걱정 없는 좋은 세상일 것 같다. 나머지 사람들이 다들 비정상이다. 그래서 오히려 이들 두 사람의 세계를 돋보이게 만든다고 생각한다. ‘하이퍼 나이프’의 세계에서는 덕희와 세옥이 정상이지, 한현호가 비정상으로 보인다. 서 실장은 뒤치다꺼리를 해주느라 그 경계를 왔다 갔다 하지만 결국 정상은 아닐 것이다.”
김정현 감독
Q. 양 경감(유승목)을 죽이는 장면은.
▶김정현 감독: “양 경감이 칼에 찔리는 장면은 안 보여준다. 그때 대사가 ‘비참한 청춘… ‘이다. 잔인한 장면이라기보다는 슬픈 장면이었으면 했다. 둘이 똑같은 사람이니. 세옥이 비참한 삶을 살지 않았으면 하는 덕희의 배려가 담겨 있다. 그 장면이 슬프게 다가왔으면 해서 음악도 다 빼버렸다. 감정의 도움 없이 컷 자체로 둘의 슬픈 인생을 보여주고 싶었다.”
Q. 글로벌 OTT와 작업한 소감은? 이런 이야기가 만들어질 수 있었던 배경이 되었는지.
▶김정현 감독: “이런 이야기는 플랫폼이든 제작자든 연출가나 작가의 이야기에 대해 포용적으로 받아주어야 가능하다. <하이퍼 나이프>는 제작사도, 디즈니플러스도 많이 공감해 주었다. 제가 다른 측면에서 고집을 부린 부분도 있는데 설명을 하니 이해해 주었다. 기존의 드라마와는 다른 방향성에 대해 열어주고 받아주었기에 가능했다.”
Q. 연출자로 가장 공을 들인 장면은? 마음에 드는 신은?
▶김정현 감독: “제일 공을 들여 찍은 장면은 4부 엔딩이다. 덕희의 존재가 처음 드러나는 신이다. 그 장면은 덕희가 살인마라는 사실이 밝혀졌을 때 충격도 있겠지만 그 뒤에 일어날 이야기의 서막이다. 4부가 끝나면 마치 1막이 끝난 것 같은 여운이 많이 느껴졌으면 했다. 그래서 블랙으로 처리 되고 뱀파이어 위캔드(Vampire Weekend) 음악(‘Capricorn’)이 나온다. 그 음악을 사용하기 위해 꽤 노력했다. 결국 포기하고 다른 음악을 고려하기도 했다. 인스타그램 디엠도 보냈었다. 그런다가 마지막에 연락이 닿았다. 집에 가는 길에 강변북로에서 제작자로부터 허락을 받았다는 연락을 받은 것이다.”
“8부에서 배우들이 오열하는 신이 가장 기억된다. 촬영 막바지에 시간이 없었는데. 박은빈이 오열하는 장면이 순수한 어린이 같은 느낌이 들었다. 저도 모니터 보면 눈물이 조금 나더라. 그리고 그걸 받아주는 설경구 배우의 연기는 든든한 나무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너무 좋은 배우들과 작품을 했다는 생각이 들더라.”
Q. <하이퍼 나이프> 추천한다면.
▶김정현 감독: “처음부터 이 드라마는 사랑에 대한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미친 사랑의 이야기이다. 대상이 이성적이지 않다. 사랑의 대상이 ‘뇌 수술’일 수도 있고. 누군가, 무언가를 이렇게까지 사랑해본 적이 있는지 생각해 볼 수 있었다면 좋겠다. 이야기 자체가 무서운 것도 아니고, 범죄물만도 아니다. 누군가, 무언가를 사랑하는 이야기라서 공감할 수 있을 것이다. 이야기 방식이 새로운 것이지 <하이퍼 나이프>는 보편적인 이야기이다.”
박은빈, 설경구의 필사의 연기가 돋보이는 김정현 감독의 <하이퍼 나이프>는 디즈니플러스에서 감상할 수 있다.
[사진=디즈니플러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