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형주 감독
과잉수사로 파면당해 고향인 (부산) 기장으로 낙향한 전직 형사가 평화로운 동네의 물을 흐리는 마약사범을 잡기 위해 분연히 나서는 코믹액션 드라마 <보안관>(2017)으로 260만 관객을 불러 모았던 김형주 감독이 이번엔 바둑판을 들고 사활을 건 승부에 나선다. 우리나라 최고의 바둑기사 스승 조훈현과 제자 이창호의 대결을 드라마틱하게 다룬다. 누가 승자이고, 누가 패자이며, 승부의 진정한 의미를 관객에게 전해준다. 개봉을 앞두고 김형주 감독을 만나 작품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이 영화는 알파고가 나오기 전에 기획되었고, 훨씬 전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바둑의 본질에 가까운 시대였다. 그 시절의 낭만을 작품에 잘 담아내고 싶었다. 바둑뿐만 아니라 다른 가치들이 희미해지고, 옅어지는 것이 있는데 이 영화를 통해 보여주고 싶었다.”고 말문을 연다.
Q. 바둑 영화인데, 진입장벽에 대한 걱정은 없었는지.
▶김형주 감독: “바둑은 모르는 사람도 무리 없이 이 영화를 볼 수 있도록 하자는 원칙이 있었다. 대본 쓰고, 콘티 작업하면서 이 정도면 괜찮겠지 싶다가도 계속 의구심이 들었다. 관객이 따라올 수 없을 것 같았다. 크랭크인 얼마 남겨두지 않고 <퀸스 갬빗>이 공개되었다. 체스에 대해선 모르지만 따라갈 수 있었다. 우리 영화도 가능할 것으로 생각되었다. 편집하면서, 블라인드 시사 거치면서 영화를 좀 더 친절하게 만들었다. 자막도 넣고. 의미를 알면 재미있을 것이다. 영화에 반복해서 등장하는 바둑 용어가 있다. 일상에 많이 쓰이지만 짚고 넘어가는 식이었다.”
영화 '승부' 스틸
Q. 영화를 만드는데 조훈현, 이창호 기사의 도움은 있었는지, 바둑계의 반응은 어땠는지.
▶김형주 감독: “조훈현 선생님을 만났을 때 우려하시더라. 바둑이란 것이 격투기처럼 직관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아니니. 정신적인 경기인데 이걸 영상으로 담을 수 있을지 걱정된다고 하셨다. 영화를 만들기로 결정되면서 선생님은 바둑알을 정석대로 잡는 모습을 보여주기를 원했다. 이전에 바둑을 소재로 한 작품에 대한 우려가 있었다. 우리 영화는 폭력적이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하셨다. 이창호 기사도 만났지만 특별한 당부는 없었다. 바둑계는 전폭적으로 지원해 주었다. 촬영장에 상주하면서 기보나 디자인에 의견을 주었다. VIP시사회에 바둑인이 많이 참석했다.”
Q. 바둑영화이니까, 바둑의 수가 가장 중요할 것이다. 대국 장면이 많이 나오는데, 얼핏 잡히는 장면에서도 ‘옥의 티’가 발견될 수 있을 텐데.
▶김형주 감독: “바둑영화이니까 모든 장면을 허투루 다룰 수는 없었다. 이창호 혼자서 여러 사람과 동시에 바둑을 두는 다면기(多面棋)에서도 모든 대국을 도움을 받았다. 앵글에 안 보이는 장면에까지 기보를 작성해 주었다. 메인이 되는 두 대국의 경우는 그 당시 기보를 그대로 재현했다. 걱정 안하셔도 된다.”
Q. 조훈현과 이창호 말고도 바둑관계자라면 그 사람이 누군지 연상이 되는 사람이 많이 등장한다. 그 사람들은 왜 실명을 사용하지 않았는지.
▶김형주 감독: “조훈현과 이창수의 경우는 꼭 실명을 쓰고 싶었다. 나머지 분들도 아마 연상되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그 당시 프로기사들은 개성이 강하고 괴짜가 많다. 여러 캐릭터를 조합해서 재창조한 인물들이다. 혹시나 불편해하실 것 같아서 실명 사용은 배제했다. 조훈현 기사의 아내분 정도만 실명을 사용했다.”
영화 '승부' 스틸
Q. 조훈현이 이창호에게 패하는 대국이 인상적이다.
▶김형주 감독: “이창호에 초점을 맞춘다면 한 명의 천재 스토리로 이야기를 풀 수 있을 것이다. 두 사람을 50대 50으로 밸런스를 맞추지 않았다. 조훈현 캐릭터에 무게추가 실릴 수밖에 없다. 정상을 지키다가 제자에 의해 바닥을 떨어질 때, 뒤안길로 사라지는 경우가 많은데, 여기서는 그 난관을 극복하고 다시 정상에 오른다. 그 스토리에 매료되어 영화의 방향을 잡은 것이다. 성장이라는 맥락도 있지만, 조훈현의 판단착오와 성장의 레이어도 있다. 사제지간의 대결이 벌어지고, 스승이 패하면서 둘 다 힘든 감정에 휘말린다. 하지만 마지막엔 극복하고 정상에 도전한다.”
Q. 조훈현과 이창호 사제지간의 이야기를 다루며 어느 정도 사실에 기반을 두었는지.
▶김형주 감독: “조훈현 기사는 이 영화를 보고 자신은 이병헌 같은 좋은 스승은 아니었다고 언급했다. 이창호 혼자 공부한 것이라고. 영화에서처럼 몰아붙이며 훈육한 것은 없었단다. 제자와 마주앉아 복기하는 게 다였단다. 영화의 극적 효과를 위해 시간을 붙인 부분도 있다. 영화에서 보이는 대국에 앞서 두 번 패한 적이 있다. 극적인 연출을 위해서 그렇게 했다.”
영화 '승부' 시사회
Q. 시나리오 작업을 윤종빈 감독과 함께 했는데.
▶김형주 감독: “윤종빈 감독은 제작자이기도 하고, 개인적인 인연도 있다. 감독으로서의 방향성을 존중해준다. 각본 작업을 하며 티키타카도 많았다. 바둑과 관련된 정보를 내가 많이 알다보니 대국 장면에서 설명을 많이 했다. 내가 그리는 대로 화면에 담기기를 바라는 욕심이 있었다. 윤 감독은 철저히 바둑을 1도 모르는 문외한 입장에선 바라보았다 상호보완적 시점으로 작업했다.”
Q. 조훈현과 이창호로 분한 이병헌, 유아인의 연기는 어땠나.
▶김형주 감독: “이병헌 배우를 먼저 캐스팅한 뒤 이창호 역에 누구를 캐스팅할지 고민이 많았다. 이병헌의 아우라에 밀리지 않고, 외모뿐만 연기방식도 서로 다르게 느껴지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두 배우와 함께 한 매 순간이 좋았다.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테스트 촬영할 때, 테이블, 소파, 바둑판이 준비되었고, 두 배우가 헤어 분장하고, 의상 입고 앉아 있을 때. 카메라를 들이대는데 숨이 막힐 정도로 근사했다. 그 순간이 잊히지 않는다. 밥을 안 먹어도 배가 부른 그런 느낌이었다.”
Q. 바둑을 전혀 모르는 상태에서 바둑기사의 이야기를 다룬다는 것이 어렵지 않았는지.
▶김형주 감독: “그들이 어떤 바둑을 두는지, 기보를 작성할 때, 촬영을 할 때 자문을 맡은 프로기사와 이야기를 많이 나눴다. 새로운 기보를 만들어낼 때에도 의견을 충분히 구했다. 그 수가 어떤 느낌인지, 대사가 맥락에 맞는 것인지 꼼꼼히 따졌다. 처음에는 이견이 많았다. 영화적 허용에 대해 쉽게 납득을 못하는 경우가 있었다. 하다 보니 서로 손발도 맞았고, 타협을 하게 되더라. 메인이 되는 대국이 두 번 있다. 원래 이뤄진 기보 안에서 영화적 맥락에 맞춰, 대사에 어울리게 선별해서 진행했다. 그것이 ‘적확’한지 토론을 많이 한 것 같다. 감독이 프로기사에서 배우는 것이랑 그걸 배우에게 디렉션 하는 것은 또 다른 문제이다. 두 배우가 세트장에서 3~4회 촬영하면서 ‘이 수는 어떻게 하고..’ 식으로 디렉팅하는 것이 어려웠다. 바둑영화를 찍기 위해 책을 보면서 공부하다가 이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서 포기했다. 그럴 문제가 아니더라.”
김형주 감독
Q. 전작이 <보안관>이다. 두 번째 작품이 이런 작품이란 것은 연결시키기가 어렵다.
▶김형주 감독: “생각도 못할 긴 세월에 걸쳐 두 사람이 대결을 펼친다면 그 안에 얼마나 많은 감정이 있을까. 그걸 생각했었다. 이 영화 준비할 때까지만 해도 두 사람은 실제 바둑대결을 300여 차례 붙었단다. 얄궂은 운명, 관계성에 흥미를 느꼈다. 그래서 이 작품을 꼭 해보고 싶었다. 두 사람의 승부는 알 만한 사람은 다 아는 대국이다. 그 과정을 거치면서 조훈현은 또 한 번 성장했다. 물론 이창호도 스승의 뒤를 이어 성장했다. 마지막 잔치 같은 느낌을 주려고 했다. 그들이 경기를 즐기는 마음으로 임했으면 했다. 그래서 에필로그에 더 방점을 찍었다. 이 지난한 승부, 10년 넘게 벌인 사제의 대결이 끝을 향해 간다는 느낌. 그러면서 동행 같은 느낌을 주고 싶었다. 담백하게.“
Q. 처음 영화로 만든다고 했을 때 당사자 반응은 어땠는지.
▶김형주 감독: “이전에도 충무로에서 영화 제안이 있었는데 거절했다고 한다. 이번에 바둑영화를 만들면 침체된 바둑계에 조금의 도움이 될지도 몰라 흔쾌히 승낙한 것 같다. 바둑이란 것이 멘탈을 담는 것이어서 힘들 것이라고는 했다. 이창호는 영화에서 표현된 것 이상으로 돌부처 같다. 말씀이 없었다. 이왕 하기로 했으니 얼굴은 비쳐야겠다고 생각하신 것 같다. 스승이 하신다니 ‘그럼 저도 할게요’ 이런 마음 아니었을까. 그렇게 짐작만 한다.”
Q. 바둑 대결을 드라마틱하게 카메라에 담는 방식에 대해.
▶김형주 감독: “두 번의 대국이 분기점이라고 볼 수 있다. 처절한 감정 시퀀스로 접근했다. 미술감독에게는 격투기를 펼칠 것 같은 링의 색감과 디자인을 부탁했다. 조훈현이 갈피를 잡지 못하다가 각성하는 포인트는 어디일까. 그 장면에서 커다란 괘종시계를 가져왔다. CG가 아니다. 조훈현의 고뇌와 절망을 그리기 위해 조명을 최대한 활용했다. 바둑돌 그림자까지 신경 썼다. 그렇게 인물의 감정에 중점을 두었다.”
Q. 어린 창호는 당돌하다. 그런데 성인이 된 창호는 아주 조심스럽다.
▶김형주 감독: “여러 요인이 있을 수 있다. 어린나이에 객지 생활을 했다. 찍어놓고도 편집에서 고민한 장면 중에는 어린 창호가 잠자리가 불편해서 조훈현 아버지 방에 가서 장면도 있었다. 힘들어하는 장면. 사우나에서 나누는 대사에도 그런 장면이 있다. 자기보다 나이 많은 어른과 대국하는 아이의 불안감, 자기 바둑을 찾기 위한 몸부림을 안으로 하는 캐릭터이기도 하다. 그런 모습이 담겼다. 실제 이창호는 바둑을 접하기 전에는 좀 쾌활한 아이였다고 하더라. 바둑하고 나서는 조심하고 모든 것을 안으로 삭히는 성격을 지니게 된 것 같다.”
Q. 이병헌의 외모는 싱크로 율이 잘 맞는 것 같다.
▶김형주 감독: “이병헌 배우는 워낙 알아서 잘 해 오는 배우니까. 시대 고증에 집중하다보니 캐릭터가 닮았다는 생각은 전혀 하지 못했다. 처음 촬영하는 날, 조훈현 기사가 왜 저기 앉아있지 하는 생각이 들더라. 바둑판 앞에서의 특유의 입매가 있는데 그걸 해내더라. 자료를 많이 보았고, 또 한 번 인생 캐릭터를 갱신하구나 싶었다.”
Q. 마지막 장면에 대한 설명.
▶김형주 감독: “엔딩 시퀀스에서 ‘창호 또 너냐?’는 지난한 사제 간의 대결을 압축하는 장면이다. 승부사로서 앞날을 헤쳐 나가는 이야기라서 좋았다. 실제 <월간바둑> 잡지에는 1박2일로 펼쳐진 그 대국의 관전기가 실려 있다. 운당여관 사진 위에 ‘'창호 또 너냐'라는 문구가 있는데 그걸 보며 이건 무조건 엔딩으로 해야지 생각했었다.”
Q. 일상에서 바둑용어가 많이 쓰인다. 바둑영화를 해보면 가장 기억되는 바둑용어가 있다면?
▶김형주 감독: ‘복기’라는 것은 바둑을 상징하는 단어 같다. 어떤 스포츠에서도 그런 것을 없다. 서로 마주앉아 논의하는 것 말이다. 바둑이 품격 있는 경기이다. 사실 바둑과는 상관없지만 우리 모두 바둑판 앞에서 마주가면 살아가는 것 아닐까 정답이 있는 게 아니니까. 자신만의 바둑을 두면서 살아가면 되지 않을까.“
영화 '승부' VIP시사회
Q. 바둑계가 예전같이 활기찬 것 같지는 않다. 영화계, 극장가 상황도 그렇고.
▶김형주 감독: “제가 바둑계에 몸을 담은 사람도 아니고. 희미해져가는 것이 분명 있다. 그것도 어쩔 수 없는 흐름이니까. 영화도 마찬가지이다. 절치부심, 몸부림, 어떻게 살아남을까 이야기한다. 영화에서처럼 이렇게 바닥에 떨어지고, 몸부림치는 조훈현을 보면서 용기를 많이 얻었다. 역시 견디는 것밖에 없구나. 그런 마음으로 개봉을 기다린다.”
Q. 유아인 배우와는 연락을 했는지.
▶김형주 감독: “기사로 부친상 당한 것을 알았다. 부고 문자 받은 피디가 가시겠냐고 물어 보기에 처음엔 생각할 시간을 좀 달라고 했다. 복잡한 심정이었다. 그래도 함께 작업한 동료이니 그것까지는 부정할 수는 없는 일 아닌가. 찾아갔더니 배우가 죄송하다며 드릴 말씀이 없다고 짧게 말하더라. 장소가 장소인 만큼. 그래서 서울로 올라와야했다. 짧게 인사하고 왔다.”
Q. 넷플릭스를 통해 공개될 계획이었다.
▶김형주 감독: “처음엔 극장용 영화로 기획되었다. 코로나 시국을 지나면서 극장 상황이 안 좋아 고민 끝에 플랫폼이 결정되었다. 그러다가, 또 사건(유아인)이 터지고 표류하다가 결국 극장에서 개봉하게된 것이다. 상업적이지 않고, 자극적인 소재가 아닌데도 이 이야기에 동의를 하고, 투자가 이뤄지고, 훌륭한 배우들과 스태프들과 함께 작업을 하게 되어 기뻤다. 이것은 휘발되어 사라지는 이야기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유행을 타는 이야기도 아니다. 넷플릭스로 가기로 결정되고 나서 몇 사람이 극장에서 이 영화를 본 적이 있다. 넷플릭스로 가면 영원히 극장에서 못 볼 것 같아서. 함께 해 준 사람들이 좋아하고, 응원해 주어 기뻤다. 다시 극장에서 상영이 결정되고 나서 서로 축하해주고 기뻐했다. 따듯한 과정을 함께 했다는 것이 기쁘다. 돌고 돌아 원래 생각한 대로 관객을 만나게 되었으니.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결국 된 것 아닌가. 인생이 다 좋을 순 없지만. 기쁜 일도 생긴다. 그러면서 멘탈이 좋아진 것 같다.”
이병헌이 조훈현을, 유아인과 김강훈이 이창호를 연기하는 영화 <승부>는 26일 개봉한다.
[사진=바이포엠스튜디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