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병헌
이병헌이 바둑돌을 집어 든다. 장고 끝에 ‘신의 한수’를 놓는다. 26일 개봉하는 영화 <승부>(감독: 김형주)이다. 이병헌은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바둑기사 조훈현을 연기한다. 한국 바둑계를 장악하던 그에게 불의의 일격을 가한 사람은 그의 제자, 열다섯 살 이창호였다. 그 때 조훈현의 심정은 어땠을까. 연기장인 이병헌이 그 섬세하고, 미묘하고, 당황스러운 순간을 절묘하게 연기한다. 개봉을 앞두고 이병헌 배우를 만나 인생의 수와 연기의 묘수에 대해 들어보았다. 영화는 당초 넷플릭스에서 공개될 예정이었으나 유아인 사태로 공개가 불투명해졌다가 가까스로 극장에서 개봉된다.
Q. 결국 극장에서 개봉된다. 소감이 어떤가.
▶이병헌: “오랜만에 봤는데 소리 같은 것이 정교하게 잘 다듬어져서 확실히 좋더라. 우여곡절이 있어서인지 극장에서 보여준다는 것 자체가 너무 좋았다. 그동안 힘들었을 사람, 함께 한 배우로서 얼마나 기쁜지 모르겠다. 극장이란 공간을 너무나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극장에서 개봉하니 신났다.”
Q. 지금 바둑이라는 소재가 젊은 영화팬에게 소구력이 있을까.
▶이병헌: “감독뿐만 아니라 메인 캐릭터들이 다 바둑을 모른다. 그런데 이 영화에 출연한 이유가 있다. 이 영화에서 바둑은 소재일 뿐이다. 바둑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인생에 대한 이야기이다. 인생을 어떻게 살아가는지 보여준다. 분명 실화가 전해주는 힘이 있을 것이다. 예전에 드라마 <올인>할 때 (모티브가 된) 차민수 선배가 조훈현 9단과 어렸을 때부터 바둑을 두는 친구이다. <올인>을 재밌게 본 사람이라면 이 영화에서도 일맥상통하는 느낌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결국 승부사들의 이야기이다. 체스에 대 몰라도 <퀸스 갬빗> 재밌게 보듯이 이 영화도 재밌게 볼 수 있다.”
영화 '승부'
Q. 영화를 두고 조훈현 기사가 훈수를 둔 게 있는지.
▶이병헌: “우선 바둑돌을 놓을 때 아무렇게나 두지 말라고 하셨다. 착 달라붙는 것 같다. 뒤뚱거리는 바둑돌이 마치 본드처럼 딱 붙는다. 그런 동작을 말씀하시는 것 같았다. 돌들이 빽빽이 놓여있을 때에도, 복기하려고 돌을 뺄 때에도 옆 돌이 안 흔들리게 해야 한다. 그런 동작이 프로페셔널하게 보이도록 연습을 많이 했다. 시사회 때 조훈현 선생님과 이세돌도 왔었다. 인사드렸다. 영화 사진을 보고 자기인 줄 알았다고 하시더라. 칭찬의 말인 것 같았다. 영화 보신 뒤 ‘내가 저랬지’하며 향수에 젖으신 것 같았다.”
Q. 실존인물을 연기하는 것이 어렵지 않은지.
▶이병헌: “실존하는 인물을 연기할 때는 많이 기댈 수가 있다. 실체가 안 보이는 먼 과거의 인물을 연기하려면 불안한 상상만 하게 되는데, 이분은 실존해 있고, 여전히 바둑계에서 활동하시니 자료가 방대하다. 연기할 때 기댈 수 공간이 많은 것이다.”
Q. 집에서 데리고 키우고, 오래 가르치던 제자에게 패배한 뒤 울컥하는 장면이 인상적이다.
▶이병헌: “그 장면이 이 영화의 하이라이트라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창호를 한 집에서 데리고 살면서 가르쳐준다. 대국 진행판을 보면서도 마냥 웃을 수도 없는 것이 이 드라마에 대한 시작이라고 생각했다. 실제 조훈현 선생도 저에게 말씀하실 때 그 때 질 것이라고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고 하더라. 상상조차 못한 일이 벌어질 때 느끼는 당혹감이다. 그런 당혹스러움은 컨트롤 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대국장을 도망치듯이 빠져나온다. 그 때 영화적인 설정이 있다. 복도에서 창호 아버지와 마주쳤을 때 인사도 제대로 못하고 계단을 내려와서는 허공을 바라본다. 그 장면을 어떻게 표현해야할지 고민을 많이 했다. 감독님께 한 번만 더 하자고 계속 테이크를 부탁했었다. 심지어 며칠 후 재촬영할 마음이 없는지 물어보기도 했다. 당혹스러움과 함께 만감이 교차했을 것이다.“
영화 '승부'
Q. 분장을 어떻게 했기에, 정말 조훈현과 닮아 보인다.
▶이병헌: “의상팀이 자료를 열심히 찾았다. 조끼까지 챙겼다. 조훈현 선생님은 옷을 잘 입었다. 사모님이 옷을 다 챙겨주셨다고 한다. 헤어스타일도 8:2 가르마에, 삐져나온 눈썹도 잘 살리기 위해 분장에 공을 들였다. 눈썹 끝이 위로 올라가면 인상이 날카로워 보인다. 나는 그분의 자세를 제일 많이 봤다. 극중 대사에도 나오지만 특이한 자세이다. 많은 바둑기사들이 그분에 대해 ‘매너 없는 자세’라고 하는 것이 있다. 잡지 표지에도 나온 그 특별한 포즈 말이다. 그걸 많이 연습했다.”
Q. 개봉이 많이 늦어지면서 편집에서 달라진 부분이 있는지.
▶이병헌: “예전에 가편집했을 때 감독님이랑 봤었다.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아니 더 완성도 있게 만들어졌다.” (첫 장면 싱가포르 응창기배 장면은?) “싱가포르 장면은 세트에서 찍고 합성한 것이다. 중국 팬들과 중국기자들이 절 야유하는 장면이 있는데 그 장면 찍을 때가 재밌었다. 그 대회는 세계 최고를 가리는 대회이다. 일본과 중국의 바둑기사가 최고로 생각될 때 였다. 한국은 형식적으로 참여한 것이라 생각했는데 굉장한 일이 벌어진 셈이다. 그런 말도 안 되는 상황이 연출된 것이니 야유 비슷한 반응이 나오는 것이다. 세계대회를 재패한 뒤 공항에서부터 카퍼레이드 한다. 제 기억으로는 조훈현 국수와 권투선수 홍수환이 그런 카퍼레이드를 펼칠 것으로 기억한다.”
Q. 이창호를 연기한 유아인에 대해서.
▶이병헌: “영화를 찍을 때는 과묵하고 말수가 적은 친구라 생각했다. 돌이켜보면 캐릭터를 만들어가는 과정이었던 것 같다. 이창호 느낌을 주려고, 그 캐릭터를 잃지 않으려고 그랬던 것이다. 아이 때 모습은 조금 다르다. 당돌하다. ‘따박따박’ 말대꾸한다. 우리가 아는 돌부처의 이창호로 바뀐 것이다. 드라마틱하게 변한 성격을 보여준다. 같이 연기하면서 좋았다. 조훈현 국수는 할 말 다하는 공격적인 사람이다. 이창호는 단단하게 수비를 하는 사람이다. 묵묵하게. 그런 대비가 재밌게 비칠 수가 있겠구나 생각했다. 유아인은 자기 역할을 훌륭하게 해냈다. 오랜 시간 공들인 영화가 혹시 일반에게 보여줄 수 없다면 실망감이 클 것이다. 아마 감독님이 제일 힘들었을 것이다. 이번이 두 번째 감독 작품인데 말이다. 7~8년의 시간을 쏟아 부은 작품이다. 그 와중에 결혼도 했고 말이다. 얼마나 힘들었을까. 무엇보다 감독님의 미소를 너무 보고 싶었다.”
이병헌
Q. 어린 이창호를 연기한 김강훈의 연기도 놀랍다. 따박따박 연기하는 것이.
▶이병헌: “시사회 때 강훈이를 보고 깜짝 놀랐다. 나보다 크다. 아이는 키가 팍팍 큰다. 이 영화에서 모자란 부분이 있으면 강훈이 더빙해도 되겠다는 생각이 들더라. 영화가 개봉되는 시간이, 나만 모르는 시간이 흘렸구나 생각을 하게 되었다.”
Q. 마지막 대국 장면은?
▶이병헌: “에필로그는 영화 전체의 여운을 주기 위한 장치로 쓰인다. 여전히 현역으로 뛰고 있고, 앞으로도 승부는 계속된다는 느낌을 주는 것 아닐까.”
Q. 조훈현의 이창호처럼, 이병헌에게 위협과 자극이 되는 후배가 있다면?
▶이병헌: “너무 많다. 연기란 것은 확연하게 보이는 것이 아니다. 점수를 매길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자기가 제일 잘 하는 연기가 있을 것이다. 어떤 후배의 연기에 대해서 나라면 저렇게 못할 것 같은 연기도 있다. 요즘 영화를 보면 누가 제일 잘한다, 누가 두 번째다 식으로 이야기하는 게 의미가 없다고 생각한다. 각자 최고인 게 있는 것 같다.”
Q. 그럼, 본인에게 조훈현 같은 거대한 존재가 있었다면.
▶이병헌: “연기를 처음 할 때는 무서웠다. 저 분처럼 해야지 하는 생각보다는 야단 덜 맞아야겠다는 생각이 많았다. 실제 작품 하면서 야단 많이 받았다. 피해 다니기도 했었다. 20대 초반에 만났던 박근형 선배님같이.”
Q. 조훈현 국수는 정상에서 제자에게 일격을 당한다. 그리고 다시 일어선다. 이병헌에게도 그런 롤러코스트 같은 순간이 있었는지.
▶이병헌: “저는 TV드라마로 처음 연기를 시작했고, 운 좋게 데뷔하자마자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았다. 3~4년 지나 처음으로 영화 출연 제의를 받았다. 그 때 [TV가이드]같은 잡지에서 ‘주목받는 신인’으로 기사가 나기도 했다. 당시 영화 두 편 망하면 영화 쪽에서 다시는 캐스팅 안한다는 이야기가 있었다. 난 네 편을 내리 망했다. 그래서 선배들이 ‘두 편 말아 먹으면 제의 안 갈 텐데 하면서 신기해했다. 충무로의 미스터리이다. 내가 처음 영화에 출연하고 제작발표회에서 인사할 때 ‘영화배우 이병헌입니다’라고 했다. 그 말을 꼭 하고 싶었다. 너무 신났다. 세 편 말아먹을 때까지도 그랬다. 순수했는지 철이 없었는지. 그러다가 다섯 번째 <내 마음의 풍금>과 여섯 번째 <공동경비구역 JSA>로 영화배우로 입지를 다졌다. 시상식에 올라가서 ‘흥행배우 이병헌입니다’라고 말하였다. 그 무렵부터 (관객) 몇 만 배우라는 이야기를 하기 시작한 것 같다. 흥행배우라는 표현은 비꼬는 말투였다. 어린 마음에 반감 같은 게 있었던 것이다. 세상은 점점 자본주의 사회로 가는 것 같다. 그게 중요해지는 것 같고, 시스템이 된 것 같다.”
Q. ‘내 마음의 풍금’은 어떻게 선택한 것인가.
▶이병헌: “그 때 즈음하여 (작품을) 보는 시각을 약간 바꾼 것 같다. 그전에는 캐릭터를 보았다면, 그 때부터는 이야기를 본 것 같다. 전체적인 정서, 이런 것 말이다. 스물 초반이었으니까. ‘이건 액션도 없고...’ 그런 걸 보여줘야 멋있는 것 아닐까 생각했었던 것이다. <내 마음의 풍금> 하면서 달라진 것 같다.”
Q. 그럼 실패한 네 작품 중 아쉬운 작품이 있다면.
▶이병헌: “데뷔작이 김성수 감독의 <런어웨이>였다. 지금 정서로 각색하면 재밌을 것이다. 작품에 총기가 나올 때부터 관객들이 확 깨는 것이었다. 지금 만들었으면 좋지 않았을까. 세 번째 작품은 정선경 배우와 함께한 <그들만의 세상>이다. 좋은 작품이었다. 어려서 캐릭터를 제대로 이해 못하고 연기를 한 것 같다. 지금 그 연기를 한다면 그때보다는 잘 할 것 같다. 캐릭터가 독특했다.”
Q. 그 시절과 비교했을 때 지금 달라진 게 있다면.
▶이병헌: “어릴 때 제 사진을 보면서 와이프(이민정)에게 ‘너 어렸을 때 내 팬이었어?’하고 물어본 적이 있다. 자기가 좋아하던 배우와는 제일 반대되던 사람이었다고 하더라. 거짓말하지 말라고 하니 ‘건강해 보이는 웃음 자체가 싫어.’라고 대답했다. 그 이야기 듣고 어렸을 때 내 사진을 보니 아내가 말하는 거부감이 뭔지 알겠더라. 딴 사람들은 얼마나 더 그렇게 생각했을까. 그 당시에는 연기를 대할 때 여유가 없었다. 열정만 있는 그런 느낌이다.”
Q. <승부>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장면이 있다면.
▶이병헌: “이 영화는 바둑영화가 아니다. 감독도, 메인 캐스트 배우들 전부 바둑을 모른다. 바둑은 소재이지 영화는 인간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삶에 대한 이야기이다. 여기에 등장하는 사람들이 겪는 미묘한 감정들이 핵심이다. 조훈현 국수의 아내 분 이야기가 인상적이다. 한집에 함께 사는 창호가 한밤중에 바둑을 복기하며 ‘딱딱’ 바둑돌 놓는다. 그 소리를 들을 때 어떤 심정일까. 제자에게 패배한 뒤 망연자실하면 담배를 피우는 남편을 바라볼 때의 심정도 복잡다단할 것이다. 문정희 배우가 한 그 연기가 이 영화의 정서에 가장 맞는 것 같다.”
“제자와의 승패가 결정되고 나서 조훈현이 당황해 하는 모습. 허겁지겁 밖으로 나와 바깥공기를 마시는 장면. 박찬욱 감독님이 연락 주셨는데 그 장면 이야기를 하더라. 이미 진 바둑판을 바라보며 ‘이거 (어떻게) 안 되나?’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영화 '승부' VIP시사회
Q. 바둑을 소재로 영화에 출연하면서 배운 게 있다면.
▶이병헌: “바둑은 인생 같은 것이라고 많이 들어왔다. 때로는 지기도 하고, 때로는 이기기도 한다. 다 망한 것 같은데 한 지역 때문에 끝내 승자가 되기도 하고, 다 이긴 것 같은데 어디 하나 소홀히 해서 패배로 가기도 한다. 그런 가르침을 준다.”
Q. 이창호는 바둑을 배우면서 자기의 것을 찾아간다고 하는데, 배우 이병헌은 연기를 하면서 무엇을 찾아가는 것 같은가. 그런 방법이 있다면.
▶이병헌: “연기가 다른 대중예술과 차이가 있다면 이런 것 가다. 연기를 잘 하기 위한 어떤 특별한 솔루션이 없다. 막연하게 깨달은 것은 평소에 유추하고, 관찰하는 것이다. 책을 많이 읽고, 좋은 영화 많이 보는 것. 그런 이야기를 선생님이 후배에게 일러주는 것도 그런 이유이다. 좀 더 넓은 시각이 보인다.”
Q. 요즘 극장 상황이 어렵다.
▶이병헌: “정말 극장이 힘든 상황이다. 하지만 이 영화를 극장에서 볼 수 있다는 것이 뿌듯하다. 좋은 영화는 관객에게 배신당하지 않을 것이다. 이 영화는 살아가는 방법을 알려준다. 인생에 힘이 되어줄 것이다. 전설적인 두 바둑기사의 실제 이야기가 전하는 힘이 분명 있다.”
조훈현과 이창호의 인생대결, 이병헌의 연기돌파, 바둑영화이자 인생영화인 <승부>는 26일 개봉한다.
[사진=㈜영화사월광, ㈜바이포엠스튜디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