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독한 인물들이 만들어낸 아슬아슬한 관계가 담긴 드라마 '크레바스'가 베일을 벗었다.
'크레바스'란 빙하의 표면에 생긴 깊은 균열을 가르키는 용어다. KBS '드라마 스페셜 2020'의 '크레바스'는 저마다의 사연으로 인해 고독에 갇힌 두 인물, 수민(윤세아 분)과 승현(지승현 분)의 아슬아슬한 사랑을 그렸다.
둘은 이전에 아는 사이었지만 상현이 수민을 진우(김형묵 분)에게 소개시켜주며 운명이 뒤바뀌었다. 수민은 진우와 결혼했고 그 뒤로 상현과 수민은 서로에게 예의를 차리며 존댓말을 하는 어색한 사이로 변했다.
하지만 상현의 아내가 의문의 교통사고로 목숨을 잃게 되고 나쁜 선택을 내리려는 상현을 수민이 목격하며 서로에게 알 수 없는 동질감을 느끼게 됐다.
이후 수민과 상현은 상현의 딸을 같이 챙기며 시간을 보냈다. 그러던 중 그 둘은 맥주를 마시다 서로의 아픔을 털어놓게 됐다. 상현이 산후우울증을 겪었던 아내에 대해 느꼈던 죄책감부터, 남편에게 사랑 받지 못하는 수민의 고독까지, 서로의 아픔을 알아본 두 남녀는 서로를 끌어안았고 그 실수로 인해 어색한 사이가 됐다.
그 사건 이후 술자리에서 인사불성이 된 진우를 데리러 간 자리에서 수민과 상현은 마주쳤고, 그날 두 남녀는 솔직한 마음을 겨우내 드러냈다. 그때부터 그들이 억제하고 있던 감정은 둘 사이를 가로지르는 견고한 벽에 균열을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항상 남편과 자녀의 사랑을 갈구하던 수민, 그리고 아내의 빈자리에 공허함을 느끼던 상현은 마치 고통의 퍼즐 조각을 맞추듯 서로에게 빠져들었다.
하지만 끓는점에 빠르게 도달한 관계는 오래가지 못하는 법. 진우는 자신의 아내가 바람을 피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고, 그 사실을 상현에게 털어놓았다. "마누라 말은 안 믿어도 네 말은 믿는다"라는 말에 죄책감을 느낀 상현은 수민에게 당분간 만나지 말자는 파격 선언을 내렸다.
수민은 "그래. 당신 이해해"라며 돌아섰으나 진우에게 가 자신이 바람을 피고 있다는 사실을 솔직하게 드러냈다. 더불어 자신을 포기하려는 상현의 비겁한 모습에 복수라도 하려는 듯 상현의 딸을 납치해 어디론가 데려갔다.
인물들의 집착과 광기, 고독이 가득 어린 ‘크레바스’는 단순히 남녀 사이의 치정극을 다룬 자극적인 작품만은 아니다. 사람은 살아가며 누구나 자신이라는 존재의 필요성에 대해 의문을 가진다.
이는 수민이 자신에게 관심 없는 진우에게 외도 사실을 오히려 드러내는 장면에서도 보여진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야. 내 마음, 내 손길, 내가 없으면, 나마저 없으면 아무것도 없는 사람이라고"라며 절규하는 수민은 분노보다는 슬픔에 가득 찬 표정이다.
'크레바스'는 남녀의 서사를 떠나 인간을 조명하는 작품이기도 하다. 그 이유는 드라마 후반부에서 나타난다. 이혼을 한 후 외도 상대에 대한 구체적인 진실을 모른 채 찾아온 진우가 승현에게 자신의 이혼 사실을 털어놓으며 기대는 장면. 결국은 진우에게도 승현은 자신의 아픔을 이해해줄 수 있는 결핍된 인간, 또 다른 퍼즐 조각이었기에 가능한 서사였다.
절박함이 만들어낸 인간의 감정들이 인물들을 집어삼키는 이야기는 우리에게 한 가지 질문을 던진다. 마치 작품의 마지막에 나오는 다큐멘터리 방송의 멘트처럼, 인생의 다양한 지점에서 마주하는 "억겁의 시간이 만든 함정"에 우리가 어떤 태도로 대처해야 할 것이냐는 질문이다.
그에 대한 답은 아마 끝내 이혼하고 자유로워진 수민의 표정과 모습에 담겨 있을지도 모른다. 멈추지 않고 흐르는 시간 속에 휩쓸리지 않으려면, 나 자신만이 나를 이해해줄 수 있고 안아줄 수 있는 유일한 존재라는 메시지. 그것이야말로 '크레바스'가 건네는 한마디의 위로일 것이다.
한편, '드라마 스페셜 2020' 다음 타자인 '나의 가해자에게'는 오는 19일 목요일 오후 10시 40분에 방영될 예정이다. (KBS미디어 정지은)
[사진= KBS '드라마 스페셜 2020', '크레바스' 캡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