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달 26일 개봉된 영화 <삼진그룹 영어토익반>(감독:이종필 제공/배급:롯데엔터테인먼트)이 12일 연속 박스오피스 정상을 차지하며 100만 관객을 눈앞에 두었다. 영화는 1990년대를 배경으로 한다. 을지로에 위치한 높은 빌딩의 대기업 본사에는 ‘여상 나온 경리직’ 사원이 ‘경리업무’도 열심이고, 커피 심부름도 열심이며, 사무실 청소, 담배심부름까지 척척 해내는 그런 시절의 이야기이다. 믿거나말거나 사무실에서는 담배도 핀다. ‘경리직 사원’은 부장님 재떨이도 비워줘야 한다.
영화는 삼진그룹을 배경으로 한다. 입사 8년차의 이자영(고아성), 정유나(이솜), 심보람(박혜수)은 자기들 부서에서의 실무능력은 완벽하지만 현실은 ‘고졸 스펙’의 정해진 코스를 밟고 있다. 그런데 1990년은 문민정부의 도래와 함께 세계화를 기치로 내세워 또 한 번의 부흥시대로 매진하던 때였다.(아니면 IMF로 직행하던 때였는지 모른다) 세 명의 동기들은 ‘토익 600 = 대리 승진’에 희망을 걸지만 어느 날 ‘옥주’의 공장에 내려갔다가 검은 폐수가 하천으로 흘러들어가는 것을 목격하면서 대리승진의 꿈도, 세계화의 위대함도, 자아성취의 기쁨도 흔들리게 된다.
‘삼진그룹영어토익반’은 실제 발생했던 사건을 기본 모티브로 삼았다. 1991년 구미공업단지에서는 이른바 페놀방류사건이 터졌다. 당시 한국 사람의 입맛은 동양맥주가 만드는 OB맥주가 확고한 시장점유율 1위였다. 조선맥주의 크라운맥주는 만년 2등이었다. 대학 마케팅수업에서는 코카콜라와 펩시콜라의 마케팅과 함께 이 사례를 자주 언급한다. 2등은 웬만해선 결코 1등이 될 수 없다고. 신의 도움이라도 있지 않으면 말이다. 그런데, 바로 그 페놀 사태로 상황이 역전된 것이다. 물론 맥주에 페놀이 들어갈 리는 없다. 같은 계열사인 전자 쪽 공장에서 페놀이 하천으로 콸콸콸 유출된 것이다.
감독은, 아니 영화사는 영리하게 1990년대의 한국기업(재벌), 페놀사태, 그리고 그 뒤에 등장하는 외국 기업사냥꾼의 농간을 결합시킨다. 그리고 더욱 놀라운 것은 그 해결사로 정의감 넘치는 변호사나 신문기자의 열정, 현장 해고노동자의 투쟁이 아니라 ‘여상 나온 경리직’ 사원들을 내세웠다는 것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실무 노하우’와 ‘말단’이라는 정서적 네트워크, 그리고 아직은 남아있는 아날로그적 정의감으로 거대한 벽에 맞서 싸운다.
삼진그룹의 경리사원들은 지금 무엇을 하고 있을까. 탕비실에 커피믹스가 들어오고, 빌딩 1층에 스타벅스가 자리를 차지하며, 책상 위 PC에는 각종 회계프로그램이 돌아가면서 회사는 기능중심의 인력을 교체한다.
페놀이 무단 방류되던 저 시절의 ‘한국식 재벌그룹’은 점차 멸종해 갈 것이다. 세상은 세계화의 물결 다음에 코로나의 급습처럼 예상 못한 변수가 좌우하고 있다. 토익만점이 필요 없는 세상이 되어 가지만 입사 때는 여전히 점수를 요구하고, 각 기업들 인사부서에서는 애사심을 측정하는 수치를 표준화 시키면서, 두 번 다시 이런 ‘기업비밀유출’이 없도록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을 것이다.
비정규직의 반란도, 페미니즘의 외침도, 주주총회의 살벌한 투표대결도 아닌, 그 시절 대한민국 노동의 모습이 박제된 영화가 <삼진그룹토익영어반>이다. (KBS미디어 박재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