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민호 감독
‘내부자들’에서 한국 사회의 악의 카르텔인 ‘언론-검찰-조폭’을 통쾌하게 씹고, ‘남산의 부장들’에서 10.26을 드라마틱하게 재구성했던 우민호 감독이 이번엔 안중근 의사를 부활시켜 일제의 심장에 총탄을 퍼붓는다. 24일 개봉하는 영화 <하얼빈>이다. 언론시사회를 통해 공개된 <하얼빈>은 감독의 전작의 통쾌함이나 대중성은 없어보인다. 대신, 그 시대의 어두운 그림자와 독립군의 고뇌가 가득하다. 왜 그렇게 만들었는지 감독에게 직접 물어봤다.
Q. <남산의 부장들> 다음에 안중근 의사를 택한 이유가 있는지.
▶우민호 감독: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안중근에게 관심이 있을 것이다. 우연히 자서전을 읽고 는 관련된 책을 찾아보았다. 그가 거사를 일으켰을 때 나이는 고작 서른이었다. 생각보다 젊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그리고 그는 처음부터 영웅적인 인물은 아니었다. 패장이었다. 자신의 선택으로 비난도 많이 받았다. 그런 그가 어떻게 하얼빈까지 갈 수 있었을까. 역경과 고난의 과정을 영화에 담아보려고 했다.”
Q. 첫 장면은 혹독한 겨울, 동토의 강물을 건너는 장면이다.
▶우민호 감독: “혼자서 얼음판 위로 걷는 장면이다. 고뇌하는 안중근이다. 자신이 가는 길이 맞는 길인가 번민하는 시간이 분명 있었을 것이다. 그가 하려는 일을 성공시킬 수 있을지, 성공한다고 해서 우리나라가 바로 독립이 되는 것이 아니란 것을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걸 얼음판을 걷는 장면에서 보여주고 싶었다. 나라를 되찾겠다는 마음이, 저한테는 절대 포기할지 말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Q. 안중근 의사를 다룬 영화, 드라마는 이미 많이 나왔다. 뮤지컬도 있고. 어떤 이야기를 더 전해주고 싶었는지.
▶우민호 감독: “신파적인 요소를 피하려고 했다. 그런 이야기는 내가 하려고 하는 이야기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그냥 안중근과 독립군의 마음을 묵직하게 담아야겠다는 생각이었다. 마치 들리지 않는 통곡처럼 여운이 길게 남았으면 했다. 시간이 흐른 뒤 다시 볼 때에도, 내 삶에 위기가 있거나 역경이 있을 때, 안중근 의사의 마지막 대사를 되새겨 보면 다시 힘을 얻지 않을까. 포기하지 말고 끝까지 가야한다고 안중근 의사가 말했다.”
하얼빈
Q. 현빈 배우는 안중근 캐스팅 제의를 몇 차례 고사했다고 한다. 그때마다 대사를 고쳐서 다시 보냈다는데.
▶우민호 감독: “여러 번 제안했다. 그런데 사실 바꾼 것은 별로 없다. ‘자세히 보면 대사가 조금 바뀌었다’고 했다. (하하) 안중근 말씀대로 포기하지 않는 게 중요하다.”
Q. 스포일러일 수도 있는데, 한 등장인물의 변화가 관람의 주요 포인트가 되기도 한다.
▶우민호 감독: “<밀정>에서 이정재가 한 것과는 다르다. 자신의 욕망을 향해 달려가는 것은 아니다. 자기의 욕망 때문이 아니라 거대한 폭력에 굴복하는 것이다. 그 나약함을 본인도 잘 알고 있다. 자신의 존엄성이 바닥까지 무너진다. 그런데 안중근은 그런 사실을 간파한다. 철저한 자기반성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Q. 이동욱 배우가 이창섭이라는 독립군을 연기한다.
▶우민호 감독: “매력적인 캐릭터로 생각했고, 그 배역에 ‘이동욱이 있었다’고 말하고 싶다. 이창섭이라는 인물은 안중근과 대비되는 인물이다. 누가 맞는지는 관객이 판단할 몫이다. <타인은 지옥이다>에서 보여준 이동욱의 연기가 너무 좋았다. 현빈의 안중근도 같은 느낌이다. 잘 생겼다는 것과는 상관없다. 정신, 멋, 아우라가 있다. 독립군의 아우라. 내일 당장 죽더라도, 그런 운명을 짊어지고 가는 사람들의 아우라가 있다.”
Q. 독립군을 고문하는 장면에 대해, 그리고 이어서 고기를 던져준다. 먹으라면서.
▶우민호 감독: “인간의 존엄성이 바닥으로 무너지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 자신이 더 이상 인간이 아니라는 처절한 생각을 갖게 될 것이다. 힘 있는 자가 던져주는 고기나 먹는 개라는 느낌이 들 것이다.” (전체적으로 묘사가 전작에 비해 순한 느낌이 든다) “인간이 무너지는 모습을 숭고하게 담고 싶었다. 직접적이고 자극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말이다.”
Q. 하얼빈이라면 당연히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하는 장면이 하이라이트가 될 것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런데, 그 장면은 의외의 연출방식으로 구현된다.
▶우민호 감독: “그 장면은 이미 다른 작품에서 많이 보여주었다. 다르게 찍고 싶은 욕망이 컸다. 첫 발을 발사한 뒤 부감 씬으로 그 장면을 담는다. 하늘나라로 먼저 간 동지들의 시점으로 찍고 싶었다. 그 분이 방아쇠를 당기기까지 수많은 동지의 희생이 필요했다. 갑자기 이뤄진 일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들의 시점에서 그 장면을 보여주고 싶었다. 그리고 저 하늘의 동지들도 들을 수 있도록 ‘코레아 우라’를 목청껏 외친다.”
하얼빈
Q. 안중근이 지휘하는 일본군과의 전투장면도 기존 전투 장면과는 다른 느낌을 준다.
▶우민호 감독: “그 장면을 광주에서 찍었는데 50년 만의 폭설이 내린 날이었다. 그 눈을 꼭 담아야겠다고 생각했다. 그 때 우리 국토가 이렇게 아름답구나 생각했었다. 나라를 빼앗긴 사람들. 액션을 마냥 통쾌하게만 찍을 수는 없었다. 액션감독이 생각해둔 것이 있었지만 그런 걸 원하지 않았다. 처절함을 담고 싶었다.”
하얼빈
Q. 50년만의 폭설이 도움이 되었는지.
▶우민호 감독: “눈이 오면 눈을 치워가며 찍었다. 눈밭에 뒹구니 정말이지 속옷까지 눈뭉치가 들어갈 정도였다. 눈이 꽤 많이 쌓였다. 눈이 좋았는데, 금세 녹는 거였다. 앞뒤 연결이 안 된다. 그래서, 스태프랑 배우들이 막걸리 올리고 고사를 지냈다. 간절하게 눈이 오기를 빌었다. 그랬더니 정말 눈이 펑펑 더 내렸다. 너무 내려서 촬영을 못할 정도였다. 제설하고 찍어야했다. ‘장군님 눈 걱정 좀 안하게 펑펑 내려주세요’가 아니라 ‘적당히 내려달라’고 할 걸. 어쨌든 안중근과 독립군의 마음으로 버티며 찍은 장면이다.”
Q. 정말 멋진 장면이 몇 차례 연출된다. 사막의 황혼 신 같은 장면은 어떻게 찍은 것인가.
▶우민호 감독: “별수 없다. 그냥 기다린 것이다. 이 영화에서 그 만주 장면에서 유일하게 CG가 사용된 게 있다. 영화 찍다가 두 마리가 도망을 가버렸다. 그래서 영화에서 보는 말 두 마리는 CG로 만든 것이다. 몽골 사람들은 정말 말을 잘 타고, 말을 좋아하더라. 말이 달아났다고 해도 걱정을 안 하더라. 기다리면 돌아온다고. 자주 있는 일이라고. 정말 말들이 제 집으로 돌아왔다더라.”
Q. 우민호 감독 작품이라면 긴박감 넘치는 빠른 편집이 특징인데, 이번 작품은 아주 정적이다.
▶우민호 감독: “클래식하게 찍고 싶었다. 배우들의 단독 클로즈업도 넣고 싶지 않았다. 동지들이 함께 있는 그룹 샷을 많이 넣고 싶었다. 마치 역사책에서 볼 수 있는, 명화의 한 장면 같이. 그들이 함께 있다는 것이 중요하다. 그들도 우리와 별반 차이가 없다는, 그런 선택을 했다는 것을 보여주려고 했다.”
Q. 안중근 의사가 뤼순교도소에서 교수형 당하는 장면은?
▶우민호 감독: “하얼빈 거사가 성공하였고, 영웅이 되었지만 그건 독립이 되고 나서, 우리나라가 세워지고 나서의 대접이다. 그때는 사형대에 올라가는 것이 운명이었다. 인간이기에 죽음이 막상 코앞에 다가왔을 때 죽음의 공포를 느끼지 않았을까. 현빈의 눈빛과 숨소리에서 그것을 표현하려고 했다. 사실, 밑으로 떨어지는 장면도 찍었지만 편집에서 들어냈다. 그 장면 찍을 때 당연히 눈물이 났다. 하늘에서 길게 내려오는 나무 그림자를 ‘틸다운’으로 찍었다. 안중근이 끝까지 우리를 감싸 안는 것 같다.”
Q. 현빈을 안중근 역할에 캐스팅한 이유가 있다면. 한류스타가 그런 캐릭터를 연기하는 것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는가.
▶우민호 감독: “현빈 배우의 눈빛에 매료됐다. 그것으로 안중근 캐릭터를 만들어보고 싶었다. 현빈의 눈빛은 슬퍼 보이기도 하고, 뭔가 상처 입은 듯한 처연함이 있다. 또한 따뜻해 보기이기도 하고. 어떨 때는 강단 있고, 신념의 사람이다. 그런 꺾이지 않는 현빈의 안중근을 그리고 싶었다. 한류스타에 관해서는 특별히 이야기한 것이 없다.”
Q. 그럼 일본 배우 릴리 프랭키가 이런 한국영화에 출연한 것에 대해서는?
▶우민호 감독: “당시 이토 히로부미는 안중근의 존재에 대해 전혀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아마 하찮게 봤을지도 모른다. 릴리 프랭키는 우리가 생각하는 이슈에 대해 ‘1’도 관심이 없더라. 대본이 너무 좋았고, ‘내부자들’과 ‘남산의 부장들’을 너무 좋아해서 출연을 결정했다더라. 시사회 끝내고 같이 삼계탕 먹었다. 영화가 웅장하면서도 세밀하다고 했다. 격이 느껴진다는 평을 하더라.” (그래도 일본사람에게는 이토 히로부미에 대한 이미지가 있을 것인데, 그런 이야기는 나누지 않았나?) “아우라를 풍겼으면 좋겠다고 했다. 가만히 앉아 있어도 카리스마를 느낄 수 있는, 아우라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 인물에 대해서는 저보다 그 배우가 더 많이 알 것이다.”
우민호 감독
Q. 박정민 배우는 어떻게 캐스팅했는지.
▶우민호 감독: “당연히 연기를 잘하는 배우니까. 그런데 내가 <남산의 부장들>로 상을 많이 받았다. 상을 타러 가면 항상 박정민이 있더라.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로 조연상을 휩쓸 때 였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인사 나누게 되었고, 이것도 인연이라고 대본 쓰면서 생각이 나더라. 그래서 캐스팅하게 되었다. <하얼빈>에서의 박정민은 정말 그 시대의 사내다운 묵직함이 느껴진다. 처음 보는 박정민 같다. 살을 좀 찌워서 어울리더라. 야생의 느낌이 들었다. 어디 가더라도 살아남을 것 같다”
Q. 현빈 배우는 이 영화가 정신적으로 힘들었다고 했다.
▶우민호 감독: “저도 힘들었다. 대중들이 좋아하는 스타일을 왜 모르겠는가. 이 작품은 그렇게 찍고 싶지 않았다. 사람들한테 안중근과 독립군의 마음이 오래 남기를 바랐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극적이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오래 기억되는 숭고한 작품을, 품격 있게 보여주고 싶었다.”
Q. 한국에서의 기자시사회와 비교했을 때 해외 관객 반응은 어땠는지. (해외영화제에서 먼저 소개되었다)
▶우민호 감독: “웰메이드, 고퀄리티 한국영화라는 소리를 들었다. 토론토영화제에서는 2500 명이 입장한 큰 극장에서 상영되었다. 환호성과 박수가 터지더라. 안중근을 모르는데 왜 이렇게 열정적으로 볼까 의아했다. 공부인(전여빈)이 일본군을 칼로 찌를 때도 그랬고, 안중근이 총 쏠 때도 그랬다. 그 장면에서는 다들 자리에서 일어나더라. 우리 역사도 모를 텐데. GV때 보니, 토론토의 다양한 구성이 그런 반응을 보여준 모양이더라.
“안중근 의사는 거사에 성공했지만 통쾌하게 끝낼 수가 없었다. 우리의 저항은 항상 그랬다. 우리의 저항이 커지면 권력을 쥔 쪽의 폭압은 더 커진다. 그럴 수밖에 없다. 그러니, 우리는 멈추지 말고 싸워야한다.”고 다시 한 번 강조했다.
통쾌함이나 화려함보다는 묵직함과 진정성으로 승부를 건 우민호 감독의 <하얼빈>은 오늘(24일) 개봉한다.
하얼빈
[사진=CJ ENM/(주)하이브미디어코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