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어도>, <만추>, <만다라>, <안개마을>, <취화선> 등 한국영화사에 길이 남은 걸작들을 필름에 담아낸 촬영감독 정일성의 영화세계를 한 눈에 만나볼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 서울 마포구 상암동 한국영상자료원에서는 지난 25일부터 내달 6일까지 <수집가의 영화 – 정일성> 전시회와 상영회를 갖는다. 전시회 개막에 앞서 정일성 촬영감독을 만나 ‘영화인생’을 들어보았다. 정일성 촬영감독은 1929년 생으로 올해 95세이다. 여전히 정정한 모습으로 ‘한국영화의 호시절’을 명확하게 회상했다.
Q.이번에 한국영상자료원에서 [수집가의 영화: 정성일 촬영감독]을 열면서 감독님의 소장품 전시와 함께 회고전을 연다. 이번 행사의 의의가 있다면.
▶정일성 촬영감독: “가족 중에 영화하는 사람이 없으니 남겨줄 사람이 없다. 몇몇 대학 도서관에서 자료를 기증해 줄 것을 요청이 왔었는데 영화전공학생 뿐만 아니라 일반 매니아들에게도 자유롭게 내 자료들을 보면서 기쁨을 느낀다면 좋을 것 같았다. 그런 생각에 영상자료원에 기증하게된 것이다.”
“내가 영화에 발을 내디딜 수 있었던 것도 공부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신 분 덕분이다. 그 분은 내게 영화관련 책을 사서 보내주셨기에 영화이론을 접할 있었던 것이다. 그때는 지금처럼 영화과가 없었던 시절이니 독학할 수밖에 없었다. 직접 현장에서 체험하는 노력도 있었지만 책을 통해 많은 것에 개안(開眼)할 수 있었다. <세계영화사> 책을 읽으면서 나라마다, 정치적, 경제적, 문화적인 문제를 느낄 수 있었다. 역사책을 보는 것보다 영화서적이 내겐 더 감흥이 있었다. 내가 소중하게 생각했던 것이 남들도 소중하게 느끼게 될 것이다.”
Q. 기증품 중 특히 애정이 가는 것이 있다면.
▶정일성 촬영감독: “영화제에서 받은 트로피도 있지만 애정이 가는 것은 따로 있다. 나는 아날로그 방식으로 영화를 만든 사람이다. 아날로그 방식의 필독서가 바로 <영화촬영학독본> 상하권이다. 이 책은 촬영감독뿐만 아니라 감독, 촬영, 편집, 녹음하는 사람들의 필독서였다. 나를 흥분하게 만들었다. 그 책을 보며 내가 영화를 할 수 있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Q. 촬영감독의 길에 나서게 된 계기는.
▶정일성 촬영감독: “미(美) 공보원에서 1년 7개월 동안 월급쟁이 생활을 했다. 우연하게 영화 공부를 하였고, 영화를 위해 사표를 냈다. 그런데 수리를 안 해주더라. 내게 1년 기다려줄 수 있다고 기회를 주더라. 6개월 만에 촬영 끝나니 나 스스로 이게(영화촬영) 할 만하라고 느꼈다. 영화전공이 아니더라도. 공보원 사람이 내게 <독본>뿐만 아리라 기술적인 서적들을 보내주었고, 도움이 되었다. 아마 오늘날의 내가 있게 된 것은 공보원장의 동기부여가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학교도 중요하지만 독학할 수 있는 뭔가가 있다면 좋은 일이다. 그 때 첫 촬영한 작품은 <출격명령>(1955)이라고 나는 촬영조수로 참여했던 것이다. 당시 미 공보원이 부산에 있을 때이다.”
Q. 그 동안 많은 감독들과 작업을 했었는데 소회가 있다면.
▶정일성 촬영감독: “세어보니 그동안 138편의 영화를, 38명의 감독과 함께 했었다. 한 작품만 한 경우도 있고, 10작품 넘게 한 감독도 있다. 나랑 일하기 전에 ‘고집이 세서, 같이 작업ㅎ하면 감독이 죽을 지경이다’는 소문이 나더라. 그래도 난 세 가지 원칙을 갖고 있었다. ‘리얼리즘, 모더니즘, 형식’이다. 형식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어떤 형식, 어떤 구도로, 어떤 앵글로 찍을 것인지 원칙이 서 있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이보다 더 중요한 게 있다. ‘격조’이다. 영화는 시나리오작가, 배우, 감독이 만드는 것이 아니라 촬영감독이 화면을 통해, 현장을 통해 색채와 구도, 앵글을 통해 절묘하게 잡아내는 것이다. 광학적 요소(렌즈)와 함께 화학적(필름)인 근거로 해서 이뤄지고, 만들어지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인문학적 소양과 함께 촬영감독이 과학적이며 기술적인 정보를 끊임없이 제공해줘야 한다. 촬영감독은 원인제공자이고 감독은 수용자인 셈이다. 결국 마지막엔 감독이 판단하는 것이다. 감독과 촬영감독은 ‘아이폰’ 같다. 폰은 인문학이고, 그 내장은 과학이다. 그렇게 관계가 엮어지고, 서로를 계발시키는 것이다. 감독이 어떻게 수용할 것인가. 그래서 감독은 아량이 있어야한다.”
Q. 최근에 극장에서 본 영화가 있다면.
▶정일성 촬영감독: “안드레이 타르콥스키의 <희생>(1986)을 보고 자리에서 일어날 수가 없었다. 내 자신이 너무 부끄러워서. 나는 ‘질 낮은 영화’를 많이 찍었었다. 생활인으로 어쩔 수 없었다고 변명했었다. 그런데 그건 변명밖에 안 된다. 타르코프스키는 평생 7편밖에 안 찍었는데 세계적인 명감독이다. 생활인이라는 변명의 여지가 없다. 질 낮은 영화를 찍은 사람으로 내 대표작은 내 실패작이 될 수도 있다. <희생>은 스웨덴의 스벤 닉비스트(Sven Nykvist) 촬영감독이 찍었다. 그 영화 보면 불나는 장면이 있는데, 한 번에 찍지를 못했다. 카메라 감독이 모금을 해서 다시 찍을 수 있었던 것이다. 롱테이크로 첫 장면과 마지막 장면을 장식한다. 명동 CGV에서 <희생>을 보면서 부끄러워 일어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영화가 지루할 수도 있다. 지루하게 찍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주인공의 희생이며, 감독의 자전적이 이야기이다. 우리는 모두 편하게 영화를 찍었다. 나처럼 똑같이 변명하는 사람 많을 것이다. 그렇게 변명했던 것이 부끄럽다. 좋은 영화만이 대표작이라고 말한 게 부끄럽다.”
Q. 요즘 한국영화에 대해서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지.
▶정일성 촬영감독: “재능 있고, 노력하는 영화인이 많다. 어떻게 보면 국적불명의 영화라는 느낌이 많이 든다. 30년 전에 나에게 미국에 가서 영화를 찍었으면 좋겠다고 한 사람이 있었다. 나는 사심이 없다. 난 이 땅에서 태어났고, 이 땅을 지켰다. 미국에 살아본 적이 없으니. 그 사람들은 (내 영화의 우리 모습을 보고) 아름답다고 말하지만 난 그렇게 (아름답게 보이려고) 노력한 적이 한 번도 없다. 우리 역사는 수많은 외침을 받았다. 난 그 아픔의 미학을 찍고 싶다. 그걸 그들이 아름답게 보았다면 그건 그들이 몫이다. 나는 캘린더를 위해 (화보처럼) 아름답게 찍으려고 노력한 적이 없다. 아픔을 찍으려고 했다.”
Q. 후대가 작품들을 어떻게 읽기를 바라는가.
▶정일성 촬영감독: “나를 딛고 넘어섰으면 좋겠다. 내가 전부가 아니다. 선배들이 일정시대(일제강점기)에서 해방, 625를 거치며 오직 영화정신 하나를 갖고, 명맥을 이어온 것이다. 기술보다도 그 정신을 이어받은 것이다. 나의 그런 기술이, 정신이 나의 기증품에 조금이라도 남아있다면, 각자의 몫으로 이어졌으면 좋겠다. 이제 기증자의 몫이 아니라, 이 물건을 통해 만나는 사람들이 또 다른 자기를 발견했으면 좋겠다.”
지금은 폐간된 영화잡지 [키노] 1998년 5월호에서 정일성 촬영감독에게 <내가 지금 사랑하는 영화(들)> 이라는 베스트를 뽑아달라고 요청한 적이 있다. 그 때 정성일 촬영감독이 선택한 작품은 다음과 같다.
■ 내가 지금 사랑하는 영화(들): 구두닦이(비토리오 데시카), 디어 헌터(마이클 치미노), 라쇼몽(구로사와 아키라),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밀로스 포만), 시티 라이트(찰리 채플린), 이유 없는 반항(엘리아 카잔), 자전거 도둑(비토리오 데시카), 태양은 가득히(르네 클레망), 플래툰(올리버 스톤), 하나비 (기타노 다케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