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 박홍준'이 대학 나와 처음 들어간 회사는 부산시 영도구에 자리한 조선회사였단다. 지금 그 회사는 오너가 바뀌었고 회사 이름도 바뀌었단다. 그곳에서 배를 만든 것이 아니라, 배를 만드는 사람들의 인사관리를 맡았었단다. 바로 인사팀 업무. 하지만 때는 세계적으로 조선업이 불황이었고, 그가 근무하는 동안 기억나는 것은 구조조정에 관한 업무였단다. 4년 가량의 인사팀 업무를 매듭짓고 오랫동안 꿈꾸던 영화계로 뛰어들었다. 그리고 내놓은 작품이 바로 <해야 할 일>이다. 조선소 인사팀 대리의 이야기이다. 작년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상영되어 호평을 받았고, 전국 독립영화관 순회상영을 거쳐 25일 정식 개봉될 예정이다. 박홍준 감독을 만나 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Q. 첫 직장이 조선회사, 그것도 인사과이다. 영화감독의 꿈은 어떻게 조련되었는지.
▶박홍준 감독: “일단 학교(연대 문헌정보학과)는 들어갔지만 사춘기처럼 무얼 해야 할지 몰랐다. 다행히 이런저런 동아리가 많았다. 연극, 밴드, 같이 책읽기 등 다양한 활동을 했다. 하라는 공부는 안하고 그런 것만 열심히 했다. 연극동아리와 밴드는 졸업할 때까지 했었다. 사실 연극 하면서 먹고 살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는 안했다. 영화는 보는 것은 좋아했지만 내가 만들 것이라는 생각도 안했다. 학교를 좀 오래 다닌 셈이다. 29살 되던 해 8월에 졸업했다. 취업은 정해지지 않아 막막했는데 절 받아준 데가 조선소였고, 인사과에 발령받았다.”
“회사 생활하면서 처음에 한 동안은 적응을 못했다. 부산엔 연고가 없었으니. 그런데 10월에 부산국제영화제에 놀려갔다가 안내 팸플릿을 보는데 시네마테크도 있고, 일반 시민 대상의 영화수업도 하더라. 재미있을 것 같았다. 단편시나리오 수업 듣고는 나도 영화를 만들어보고 싶은 욕망이 생기더라. 그 다음엔 제작 워크샵에 들어갔는데 푹 빠져버렸다. 그 때 만난 친구 중에는 영화를 제대로 하고 싶어 하는 친구가 있었다. 다들 영화의 재미에 푹 빠진 것이다. 그 친구들하고 계속 같이 영화작업을 했다. 서로 품앗이 하듯이 단편을 만들었다. 3년 정도. 단편을 좀 더 잘 만들고 싶었지만 회사에 메여 있다 보니 한계가 있더라. 영화에 대한 꿈을 접든지 회사를 계속 다닐 것인지 결단을 해야 했다. 그때 서른 넷, 다섯 이었다. 더 늦으면 못할 것 같았다. 인생에서 한번 모험을 해보자. 어떻게든 밥은 먹고 살겠지. 그렇게 회사 그만뒀고, 그해 겨울에 명필름랩이랑 연결되었다. 그 때 쓴 시나리오가 ‘해야할 일’이다. 내용도 그렇지만, 단편만 만들던 저랑 친구의 역량으로는 만들기 힘들었다. 명필름랩이랑 연결된 게 좋았다.”
Q. 근데 인사팀은 어떻게 간 것인가. 인사에 대한 지식이나 철학이 조금이라도 있었는가.
▶박홍준 감독: “입사동기 중 두 명은 회계를 전공한 것 같다. 난 ‘인상 괜찮은 놈’으로 뽑혔다. 2015년에 입사했는데 그 다음해부터 전 세계적으로 조선업계의 경기가 안 좋아졌다. 조선소마다 구조조정하고, 문 닫고, 오너 바뀌고 그랬다. 2016년부터는 구조조정이 상시 진행되었다. 난 신입이었으니, 회사 막내들이 할 법한 업무를 했다. 구조조정 업무 서포터하고, 해외출장 가는 사람들 업무지원하고, 파견근무 스케줄링 하고, 뭐 그런 잡다한 업무를 했었다. 계약직 채용하는 것도.”
Q. 시나리오는 언제 쓴 것인가. 펀딩과 제작 과정을 소개해 달라.
▶박홍준 감독: “8월에 회사 나와서 시나리오를 썼다. 그때 명필름랩에서 낸 공고를 본 것이다. 1년에 한 번 지원자를 뽑았었다. 지원하려고 시나리오를 완성시킨 것이다. 난 영화과 출신도 아니고, 이곳에 인맥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영화를 만들려면 이런저런 도움이 필요할 것 같았고, 명필름랩이랑 하는 것이 최선이라고 생각했다. 다행히 운이 좋아 뽑힌 것 같다. 2020년부터 시나리오 수정작업을 했다. 원래 시나리오는 대게 길었다. 아마 3시간 분량은 될 것이다. 등장하는 인물도 훨씬 많았다. 그런데 예산에 맞춰 분량을 줄이며 다듬은 것이다. 그때 넣을 수 있는 제작 지원사업 공모에는 다 지원했는데 모두 떨어졌다. 그러다가 운이 좋게 2022년 부산영상위원회의 장편영화 지원사업에 선정된 것이다. 거액이 지원 결정된 것이다. 그게 물꼬가 터여서 그 때부터 지원사업이 수월하게 이어졌다. 일단 촬영은 끝낼 수 있는 예산이 생겼으니 촬영을 진행했다. 그 다음 단계는 편집하면서 생각해 보기로 했다. 후반편집, 색보정, 사운드작업, CG, DI 등 후반작업 말이다. 다행히 편집작업하면서 경기영상위원회와 부산영화제의 ACF에서 후반작업 지원작 선정되어 업체와 연결되었다. 물론 그런 지원 조건 중에는 이 영화가 부산국제영화제에서 프리미어 상영된다는 것이 있다. 그런 식으로 완성할 수 있었다.”
Q.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처음 상영되었으니, 감회가 새로웠겠다.
▶박홍준 감독: “당시 같이 근무했던 분들이 영화제 오셔서 영화를 관람했다. ‘잘 봤다.’ ‘수고했네’라는 반응이었다. 같이 온 아내분이 남편이 힘들어하는 것을 알고 있었는데 영화를 보고 얼마나 힘들었는지 알겠더라며 울컥하시더라.”
Q. 이번에 개봉에 앞서 전국을 돌며 순회상영을 했다.
▶박홍준 감독: “스물 군데 정도를 돌고 있다. 서울권 빼고는 다 돈 것 같다. 배우들도 GV에 참여했다. 이런 이벤트를 하는 것은 지역의 독립영화관 존재 자체를 아는 사람도 많지 않기 때문이다. 독립예술영화가 있어도 접하기 자체가 어렵다. 전국의 독립영화관 존재를 알리고, 우리 영화도 홍보하기 위한 취지로 기획되었다. 지방영화관 같은 경우 GV를 하기가 쉽지 않다. 독립영화는 빠듯한 예산으로 개봉을 겨우 할 수 있으니 감독과 배우 두어 명이 오더라도 부담이 된다. 제가 찾아가는 것이니 다들 좋아하시더라. 지방에 거주하는, 영화 좋아하시는 분에겐 영화관이 거점인 셈이다. 영화모임 하시는 분이 관객으로 오시면 영화 이야기도 많이 할 수 있다. 조금 더 많은 관객을 만나볼 수 있었으면 좋았을 것 같다. “
Q. 강준희 대리역의 장성범을 캐스팅한 이유는? 배역에 요구한 것이 있는지.
▶박홍준 감독: “장성범 배우는 시나리오 수정작업 하면서 캐스팅에 도움이 될 만한 영화와 드라마를 볼 때 만났다. <땐뽀걸즈>(KBS,2018)를 보는데 여고선생님으로 나온다. 그게 10년 전 드라마이니 이 친구가 20대 초반이었을 것이다. 안정적으로 연기 잘한다고 생각했고, 얼굴이 가진 힘도 좋았다. 틀에 박힌 연기를 하지 않는 것 같아서 주연배우로 생각하고 있었다. 만나서 이야기를 나눠보니 연기에 대한 자기의 생각이 있었다. 자기가 맡은 인물에 대해 대단한 준비를 해 온다기보다는 세팅된 상황에 맞게, 상대 배우가 하는 것에 따라 리액션하는 연기를 잘하더라. 보통 주연을 맡으면 본인이 끌고나가려고 하는 경우가 많다. 이 친구는 그런 욕심보다는 전체와 잘 어우러진다. 사실 <해야 할 일>은 준희의 이야기라기보다는 한 발 떨어진 관찰자, 인사팀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그렇게 한 발 떨어져 리액션을 잘 하는 게 팀을 돋보이게 하는 것이다. 그걸 잘 아는 영리한 친구다.”
Q. 인사팀 팀원의 연기가 자연스럽다. 삶의 애환이 고스란히 묻어난다.
▶박홍준 감독: “우리에 게 익숙한 이미지의 배우를 캐스팅 하지 않으려고 했다. 독립영화계가 좁지만 나름 독립영화의 스타가 있다. 하지만 현실과 맞닿은, 더욱 현실처럼 보이기를 원했다. 익숙한 배우가 나온다면, 특정한 이미지가 강하게 박힌 배우가 연기한다면 영화를 보는 사람은 ‘이건 영화구나’ 생각할 것이다. ‘어디선가 봤는데...’하면서도 익숙하지 않은 배우를 캐스팅하고 싶었다. 김영웅 배우는 드라마엔 자주 나오지만 독립영화에선 낯설다. 장리우는 그 반대이고. 배우 찾는데 시간이 많이 걸렸다. 이쪽 사투리도 쓸 줄 알아야하니. 부산영상위와 경남영상위의 배우 데이터베이스 보고 찾아봤다. <내가 할 일>은 독립영화지만 꽤 많은 배우가 나온다. 주조연 확정한 뒤 촬영을 시작했다. 잠깐 나오는 캐릭터는 촬영 진행하면서 캐스팅된 경우도 있다. 이 작품 찍을 때 OTT 작품이 많이 만들어질 때였다. 배우들 스케줄 빼기가 쉽지 않았다. 그 때문에 무산된 캐스팅도 있다.“
Q. 장리우 배우의 역할에 대해. 인사팀의 홍일점이지만, 남성중심 집단에서의 여성의 한계를 대표하는 캐릭터이다.
▶ 박홍준 감독: “많이 없어진 문화라고 생각하는데 아직도 제조업 기반에는 그런 문화가 남아있는 것 같다. 인간에 대한 폭력적인 대우라고 생각한다. 그 사람의 삶을 배제해 버리고. 전문대 나오고 여자라는 이유로 성장가능성을 막고 단순한 업무만 반복해서 시킨다. 아무리 일을 해도 그 딱지를 뗄 수가 없다. 열심히 일해 대리까지 달았다. 회사에 녹아들려고 야근도 하지만 계속해서 인정받지 못한다. 조직으로부터 상처를 받는다. 그런 인물이 회사 돌아가는 ’꼬라지’를 보고 미련 없이 떠나는 사람이다.”
Q. 회사일로 맘고생이 심한 강준희의 아내 재이로 등장하는 이노아 배우의 역할은? 그런 상황에 완벽히 녹아든, 관객이 공감할 수 있는 연기를 펼친다.
▶박홍준 감독: “극중 강준희(장성범)랑은 대학 다닐 때부터 만났다. 학생회 활동에 관심 있었고 살짝 몸을 담군 인물이다. 제가 06학번이다. 저희 세대는 과거와는 달리 학생운동으로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던 것 같다. 그런 생각을 갖고 있더라도 군대 갔다 와서는 취업하고. 둘 다 그런 루트를 밟았다. 미래를 꿈꾸는 생각, 방향성이 일치하기 때문에 같이 사는 것이다. 준희는 회사에서 하는 일로, 스스로의 양심의 가책을 느끼는 사람이다. 비슷한 성향의 사람에게 섣불리 이야기를 못할 수 있을 것이다. 비난 받을 수 있으니까. 정치적 성향이랄까? 비슷한 인물로 설정했다. 재이는 그런 것 말고도 전형적이면서 이상적인 인물로 보았다. 남편이 말할 때까지 기다려주기도 하고. 작품에서 입체적인 느낌을 준 것은 이노아 배우의 역량 때문인 것 같다. 어쩌면 평면적인 인물일 수 있는데 잘 살려준 것 같다.”
Q. 준희와 재이가 마지막에 크리스마스 캐롤이 울려 퍼지는 가운데 시내에서 만난다. 밖에서는 정치적인 구호가 넘친다. 새 시대의 희망인가?
▶박홍준 감독: “시나리오 쓸 때부터 생각한 것이다. 나의 성향이기도 하고 이 영화의 출발점이다. 2016년에 회사가 구조조정을 진행하면서 회의가 생기면서 힘들었다. 밖(사회)에서는 사회를 더 나은 방향으로 만들자는 소리가 커지는데 난 회사에서 뭘 하나. 사회로부터 고립된 느낌이 들었다. 그때 선배나 친한 사람에게 힘들다고,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토로하면 ‘다들 그렇게 살아. 니가 아니어도 누군가가 그런 일을 해’라고 나름의 위로를 하는데. 왜 이렇게 되어버린 것일까. 그때 고민을 많이 했다. 제목이 <해야 할 일>이 된 것도 그런 이유인 것 같다. 회사에서도 이런 일을 해야 할 것이고, 사회 구성원으로 해야 할 일도 있을 것이다. 그 두 개가 부딪치는 이야기를 쓰고 싶었다.”
Q. 요즘은 구조조정이 일상화 되었으면, 또한 쉽지 않은 과정이다. 인사팀에서 일했고, 이런 영화를 만들었으니 사회적 합의에 대한 철학이 있다면.
▶박홍준 감독: “사실 어려운 문제이다. 기업이란 것은 산업구조의 변화에 따라가는 것이니 기업이 안 좋아서 그럴 수도 있다. 케이스바이케이스이겠지만 우선 드는 큰 생각은 사회적 안전망이 약한 나라에서 노동자를 낭떠러지로 내모는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었다. 재취업 자리가 힘들다. 안전망을 더 잘 구축해야하지 않을까. 구조조정에 이르기까지 노동자의 책임보다는 경영자의 책임이 크다. 경영자가 한 발 뒤로 빠지고, 그들은 책임지지 않은 모습을 많이 봤기에.”
Q. 김향기 배우가 목소리 연기로 등장한다. 전화로 마지막 출근하는 아버지를 위해 꽃다발을 전해주고 싶다는 장면. 굉장히 인상적인 순간이다. 창작인가, 실제 사례인가?
▶박홍준 감독: “저의 상상력이었다면 좋을 텐데. 실제 있었던 이야기에 살을 좀 붙인 것이다. (인사팀 근무할 때) 희망퇴직하려 오셨다. 회의실로 들어가고 나서 잠시 뒤에 전화벨이 울렸다. 막내여서 전화를 당겨 받았다. 전화기 너머 울음소리가 들렸다. 이름을 대며 ‘아버지가 마지막 출근하시는데 꽃을 보내드리고 싶은데 어디서 근무하는지 모른다’ 울면서 전화한 것이다. 저도 찡했다. 딸은 아버지가 어느 부서에서 근무하는지 몰라 미안하고. 그걸 영화에 녹여보려고 애를 썼다. 이 (전화) 연기를 할 수 있는 목소리가 필요했다. 지금 이런 비인간적 곳과 다르게 인간적인 정서가 나오는 순수한 느낌이 드는 20대 초중반 여성, 연기를 잘하면 좋겠고 생각했다. 그때 앳된 소녀적인 이미지와 성숙한 느낌도 드는 이중적인 에너지가 있었으면. 그 때 김향기 배우가 명필름 영화에 출연하고 있어서 섭외를 부탁했고, 성사된 것이다.”
Q. 곧 개봉된다. 관객에게 전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면?
▶박홍준 감독: “언젠가부터 우리 사회에는 구조조정, 희망퇴직, 정리해고를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것 같다. IMF이후 항상 일어나는 일이 되어버린 것 같다. 그게 괜찮은가 생각이 들었다. 기존의 노동영화와는 시각을 달리하니 같이 볼 수 있는 영화라고 생각한다. ‘노동’의 문제를 소재를 삼았지만 거부감 갖지 마시기를. 대다수가 월급노동자이지만 ‘노동’ 이야기가 나오면 불편해하는 경향이 있다. 거부감 줄이시고, 현실적 이야기이니 보시고 같이 이야기 나누면 좋지 않을까. 직장인 분이 많이 봐주시길 바란다.”
장성범, 서석규, 김도영, 김영웅, 장리우, 이노아 등이 출연하는 박홍준 감독의 장편영화감독 데뷔작 <해야 할 일>은 25일 개봉된다.
[사진=명필름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