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세랑 작가의 ‘명랑판타지’ 소설 <보건교사 안은영>이 넷플릭스에 의해 6부작 미니시리즈로 완성되었다. 지난 달 25일 공개된 넷플릭스 오리지널 <보건교사 안은영>은 다른 사람 눈에는 보이지 않는 특별한 존재 ‘젤리’를 볼 수 있는 능력을 가진 고등학교 보건교사 안은영(정유미)이 학교 한문선생 홍인표(남주혁)와 함께 젤리 박멸전을 펼치는 이야기이다. <미쓰 홍당무>와 <비밀은 없다> 단 두 편을 통해 ‘이경미 월드’를 구축한 이경미 감독을 만나 영화 뒷이야기를 들어보았다. 코로나 사태로 영화계의 일상이 된 ‘비대면 온라인 인터뷰’방식이었다.
- 원작에서 ‘젤리’라는 존재를 처음 보았을 때 어떤 이미지였나, 영상으로 옮길 때 어떤 느낌을 주고 싶었는지.
“책에서는 젤리의 모습을 구체적으로 설명하지는 않는다. 막연하게 사람의 기운, 욕망의 잔여물로만 표현되어있다.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젤리를 어떻게 하면 영상으로 재미있게 표현할 수 있을까 고민했다. 젤리라는 것은 그동안 소설이나 영화, 게임에서 많이 사용된 소재여서 이미 익숙한 캐릭터이다. ‘안은영소설’에서는 에피소드마다 그런 캐릭터를 퇴치하는 구조이다. 우리가 만든 ‘젤리 크리처’는 말캉말캉한 느낌의 친근하고 귀여운 존재인 동시에 은영이가 해치워야 하는 몬스터의 느낌도 주어야 했다. 징그러우며 동시에 귀엽기도 한 극단적인 느낌, 그런 난감함을 전달하고 싶었다.”
- 정유미와 남주혁의 원작 캐릭터 싱크로율은?
“각본을 쓸 때 생각했던 이미지와 캐스팅된 배우로 캐릭터를 완성시킬 때 재미가 있다. 안은영의 경우는 상상한 것과 들어맞는 부분이 있었다. 정유미 씨만의 예측할 수 없는 신선한 표정과 동작들, 그리고 보편적인 감정을 보여주었다. 정유미 씨가 들어와서 극이 더 풍부해졌다. 홍인표를 연기한 남주혁의 경우는 생각보다 훨씬 재밌어졌다. 처음엔 이렇게 유머러스한 인물이 아니었다. 심심하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남주혁 씨가 들어오면서 재밌어졌다.”
● 오리의 등장, 한아름의 아우라
- 오리가 뜬금없이 화면에 등장한다. 어느 장면에서는 4마리, 또 어느 장면에서는 5마리였다. 오리에 대해 이야기 해 달라.
“원작에서 오리를 키우는 한아름 선생님의 에피소드가 좋았다. 넷플릭스로부터 작품 연출 제안을 받았을 때는 소설의 어떤 에피소드를 녹여낼지가 이미 정해진 상태였다. 한아름이 들어갈 틈이 없었다. 그러면 오리라도 남기고 싶었다. 하늘을 나는 새처럼 이유 없이 학교를 돌아다니는 오리가 등장하면 마치 만화처럼 작품에 도움을 줄 것으로 생각했다. 프리프로덕션 단계부터 오리 전문사육사를 섭외했다. 새끼 때부터 예뻐하며 잘 먹였다. 그 덕분에 털이 반질반질하다. 4마리, 5마리가 된 것은 오리들의 컨디션 때문이었다. 여름날 야외에서 촬영할 땐 아스팔트가 뜨겁다. 오리담당 연출부가 상황에 따라 오리를 투입한 것이다. CG아니다. 진짜 오리다. 6부 노래방 시퀀스에도 오리를 등장시키고 싶었다. 노래방 주인아저씨가 동물은 들이면 안 된다고 해서 포기했다. 아쉽다.”
- 학교 지하실 장면은 어떻게 촬영한 것인가.
“비밀이 가득한 지하실로 내려가는 좁고 긴 계단을 구현시키는 것은 여건상 힘든 작업이었다. 촬영한 건물에는 계단이 3개 밖에 없었다. 두 사람이 계속 걸어 내려가는 길고, 깊은 느낌을 주기 위해 CG작업을 한 것이다.”
- 학교 교정에 떡하니 버티고 서 있는 이사장 동상은 옛 정치인을 연상시키는 포즈이다.
“사실, 그 어느 독재자를 연상시켰으면 좋겠다는 생각은 했었다. 그런 동상은 많다. 고등학교 이사장일 수도 있고, 대학 총장일 수도 있다. 건물을 가로막고 우뚝 선 동상을 볼 때마다 어떤 의도가 느껴질 것이다. 그게 인상적이었다. 홍인표 선생의 할아버지는 등장하지 않지만 그 동상을 통해 이 이야기가 시작되었다는 것을 알리고 싶었다. 동상을 만들기 위해 많이 찾아봤다. 전국에 다양한 포즈의 희한한 동상이 많더라. 우리 것은 얌전한 편이라고 생각한다. 일상적인 것처럼 세워진 것이지만 학교의 큰 비밀을 남긴 인물로 인지되었으면 한다. 동상에서 할아버지 눈이 움직이고 말을 한다는 것은 익히 들어온 학교괴담이다. 그런 기괴함을 살리고 싶었다.”
● 넷플릭스와 작업하기, 박찬욱 감독과 작업하기
- 전작 <페르소나>도 넷플릭스를 통해 공개됐었다.
“<페르소나>는 미스틱과 작업한 것인데 그게 넷플릭스에 공개된 것이다. 넷플릭스와는 <보건교사 안은영>이 첫 작업인 셈이다.
- 넷플릭스와의 작업소감은 많이 들어봤는데, 박찬욱 감독(모호필름)과 작업할 때와의 차이점이 있다면?
“박 감독과 작업하면 속 시원한 재미가 있다. 내가 무엇을 좋아하고 재미있어하는지 너무 잘 아시니, ‘재미있는 거 더 주세요’하는 식이었다. <안은영>은 짧은 시간에 완성해야 했기에 누군가와 소통할 기회가 없었다. 정신없이 작업해서 뭘 느낄 틈도 없었다.”
- 학교/학생이야기를 계속한다.
“학생을 바라보는 관점이 있다면 학생들은 학생들답게 보였으면 좋겠다는 것이다. 특별히 미화하거나 포장하는 것은 싫다.”
● 명랑판타지에서 히로인 시리즈로
- <안은영>이 명랑판타지 맞는가?
“그렇게 포장되어 있긴 하다. 소설은 명랑판타지가 맞다. 그런데 이번 시리즈를 명랑이라 해도 되나 싶은 어두운 구석이 있다. 딱히 명랑은 아닌 것 같다. 내가 생각하는 10대의 명랑함이란 노래방 씬에서의 장면 같다. 명랑한 것 같기도 하고, 미친 것 같기도 하다. 안은영이 충전할 때 얼굴에 보이는 기분 좋은 표정이나 어딘가 서투른 장면에서는 명랑하잖은가. 물론 그게 전부가 아니다.”
- 이게 후속 시즌이 만들어진다면, 시즌1의 의미는 어떤 것인가.
“장차 여성 히어로물(히로인 물)로 가는 프리퀄이면 어떨까 싶었다. 일종의 성장드라마이다. 자신의 운명이 귀찮고 받아들이고 싶지 않지만, 결국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인다. 대의적으로
이타적인 모습으로 성장하는 드라마여야 다음 시즌으로 이어질 수 있을 것이다. 성장드라마로 가려며 늘 밝게만 갈 수는 없다. 뭔가를 깨야 한다. 자기 자신을 깨는 것이 근본적인 성장이다. 큰 위기를 겪어야 할 것이고 이야기의 흐름으로는 어두운 부분도 있을 것이다.“
- 전교생이 하는 아침체조가 인상적이다. 교장 선생님의 웃음철학도. 어디서 영감을 얻었나.
“그건 스크립터 김소연 씨 이야기에서 영감을 얻었다.(하하하) 각본 회의를 하다가 학교 다닐 때 그런 체조를 했다고 하더라. 기괴하지만 재미있었다. ‘웃읍시다’하는 장면도. 김소연 씨 모습이 너무 재미있어서 넣었다. 웃는 장면은 조금 더 기괴하게 연출했다. 학교를 다니면서 생기는 시련일 것이다. 멀리서 보면 행복한 듯 하지만 불편하게 살고 있는 그런 모습을 기괴하게, 과장되게 보여주고 싶었다.”
- 시즌2에서 다뤘으면 하는 것이 있다면.
“시즌2를 누가 할지 모르는 일이라서. 소설과 다르게 새롭게 만들어진 세계관을 친절하게 보여 주어야 할것 같다. 은영과 주변 관계가 더 나오겠죠. 시즌1에서 건너뛴 것이 많은데 그것도 보여주면 좋을 것 같다.”
- 한아름 선생에 애정이 있다고 했는데. 가장 마음에 든 캐릭터가 있다면.
“좋아하는 에피소드는 꼬깔콘의 정현에피소드이다. 원래는 그 에피소드가 빠져있었다. 넷플릭스와 논의할 때 이 작품은 죽음과 소멸의 이야기라며 정현 에피소드를 꼭 넣자고 했다. 그런데 촬영하면서 일정을 솎아낼 때 ‘정현 이야기’는 항상 먼저 빼야 할 아이템 1순위였다. 비가 와서, 일정 맞추느라 뭘 빼야할 때 말이다. 결국 이렇게 넣었고, 완성되어 다행이다. 고맙다. 에피소드 가운데 가장 드라마틱하다고 느끼는 캐릭터는 백혜민과 김강선 같다. 감정적인 움직임이 은영이를 비로소 성장시켜준다.”
- 이경미 감독 영화 속 음악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다. 이번 작품에서는 인상적인 노래가 계속 흘러나온다.
“음악감독님께 사람의 목소리가 나왔으면 좋겠고, 6부에서는 합창이 들어갔으면 좋겠다고 요청했었다. 해외에 소개되는 작품이니 외국 사람들이 재미있어할 한국적인 컨셉트이면 좋을 것 같았다. 이전 작품에서도 그랬지만 작사는 내가 한다. 이번엔 5부 엔딩곡인 ‘레인보우’에 대해 신경을 많이 썼다. 강선의 공사장 크레인 무너지는 장면에서 나오는 노래이다. 엔딩 곡 가사를 끝내야 내 작품이 완성된 것 같은 느낌이다. 또 ‘나는 젤리~’ 하는 곡은 장영규 음악감독님이 샘플을 들려주시는데 이 부분은 한글이 들어갈 거라면서 그냥 ‘나는 젤리젤리~’라고 임시로 넣어 들려주신 거였다. 괜찮아 보였기에 그냥 그것 사용하자고 했다. ‘아무 말 가사’인 셈이다.”
- 다음 작품은 언제 만나볼 수 있을까요.
“굉장히 하고 싶었던 시리즈가 있다. 죽기 전에 꼭 하고 싶은 작품이다. 넷플릭스와 이야기하다가 <안은영>을 하게 된 것이다. 그게 차기작이 될지는 모를 일이다. 호러도 하고 싶어서 시나리오를 쓰고 있다. 될 수 있으면 많이 만들고 싶다. 빨리 되는 것부터.” (KBS미디어 박재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