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재명
언젠가부터 한국 영화와 드라마에서 유재명이 등장하면 긴장하게 된다. 그만큼 작품에서 보여주는 유재명의 연기의 힘과 아우라가 대단하기 때문일 듯. 지난 31일 공개되기 시작한 디즈니+/U+모바일tv의 '노 웨이 아웃: 더 룰렛'에서도 그런 유재명을 만나볼 수 있다. ‘노웨이아웃’에서는 정체를 알 수 없는 ‘가면남’이 인터넷방송을 통해 사회의 공분을 사고 있는 인간쓰레기들을 지정한 뒤 거액의 상금을 내걸고 사적 제재를 부추기는 일이 벌어진다. 유재명은 흉악한 연쇄살인범 김국호를 연기한다. 여성들을 상대로 몹쓸 짓을 하다가 교도소에 가고, 출소하지만 그에게 200억원의 몸값이 걸리자 대한민국은 시끄러워지기 시작한다. 유재명이 연기하는 캐릭터에 대한 분노, 혹은 타게팅에 대한 관심을 높이며 작품의 긴장감을 폭발시킨다. 공개를 앞두고 유재명 배우를 만나 악역의 소감과 연기의 재미에 대해 물어보았다.
유재명 배우는 “8부작인데 한 호흡에 다 보게 되는 작품이다. 재미난 논쟁거리를 안겨주는 작품이라고 생각한다.”고 말문을 열었다.
Q. 공개를 앞둔 소감은
▶유재명: “올 3월 말 촬영을 끝냈으니 빨리 공개되는 편이다. 작품이 공개될 때면 항상 기대가 된다. 열심히 찍은 작품을 대중들이 어떻게 볼지 설렌다. 잘 되었으며 좋겠다. 많은 작품 속에 변별력이 있기를 바란다.”
Q. 김국호 캐릭터는 얼핏 들어도 한 인물이 연상되는 악역이다. 망설이지는 않았는지.
▶유재명: “그동안 악역을 몇 번 했었다. <나를 찾아줘>에서의 홍 경장처럼. 작품을 고르는 별다른 기준은 없다. 직감적으로 선택하는 편이다. 이걸 연기할 때 주변사람들이 대신 걱정을 해주더라. 김국호는 ‘내추럴 본 악인(惡人)’이다. 태생적으로 나쁜 사람이다. 작품이 진행되면서 출구가 없는 혼돈 속에서 살기 위해 도망자가 된다. 자기는 죗값을 다 치르고 나왔는데 왜 그러냐고 항변을 하는 인물이다. 살고자 애를 쓰는 한 인간의 본성을 보여주려고 했다. 선하거나 악하게 표현하는 것보다 인간 본성을 연기하는 것이 매력적이었다.”
노웨이아웃: 더 룰렛
Q. 그 인물을 연기한다는 것은?
▶유재명: “아마 다들 ‘그 인물’이 떠오를 것이다. 생존하고 있고, 그런 범죄자들도 우리 사회의 공존의 대상이 되어버렸다. 성범죄자 정보가 공개되고 있다. 그런 존재가 내 이웃에 있다는 것이 많은 사람을 두렵게 만든다. 유재명이란 배우가 더 좋은 이미지로, 영향력 있는 선한 인물을 연기하기를 바라지만, 배우로서 이런 것 저런 것 가리는 성향이 아니다.”
Q. 김국호는 분명 분노유발자이다. 자신의 범죄에 대한 반성이 없는 것 같다. 어느 정도의 선까지 악을 표현하려고 했는지. 상황에 따라서는 인물을 미화할 우려도 있는데.
▶유재명: “최민식 선배가 <악마를 보았다>에서 보여준 무지막지한 악인 연기를 보면서 나는 어디까지 잔인한 면을 보여줄 수 있을까 생각해 보았다. 살고자 하는 모습을 보면서 본성의 영역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본능적으로 살려는 것 말이다. 혐오스럽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주변의 사람들과 비교해 볼 수 있을 것이다. 타고난 악인이지만 우리 주위에는 ‘이 사람도 만만찮은데’ 하는 생각이 들 수도 있을 것이다. 우리 사회의 구조가 엉망진창인데 누가 더 선하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법을 집행하고, 수호하는 사람들까지 모두가 자신의 욕망을 드러내고 있는데 말이다.”
Q. 범죄자를 연기할 때 참고한 작품이나 다큐가 있는지.
▶유재명: “특별하게 찾아보지는 않았다. 대신 현장에서 고민하며 디테일을 찾으려고 했다. 대본에 나온 것은 자신이 형(刑)을 다 살고 나왔는데 갑자기 경찰이 나를 보호해 주겠다고 하면서, 봉인된 본성이 깨어난 것이다. ‘난 형을 다 살았지 않았느냐?’라는 눈빛. 그런 게 중요했다. 회를 거듭할수록 조금씩 드러난다. 마지막에 무언가 표현해 내려고 했다.”
유재명
Q. 후반부엔 이야기가 어떻게 진행되는 것인가?
▶유재명: “스포일러라 다 말할 수는 없지만 회를 거듭할수록 변화한다. 처음에 그렇게 시작되지만 아들을 만나고, 아내를 만나고, 변호사를 만나고, 시장을 만나면서 느닷없이 생명의 위협을 느끼게 되고, 점점 괴물이 되어간다. 다른 사람을 해하려고 하는 괴물이 아니라 자신을 보호하려는 인물이다. ‘나는 살려고 할 뿐이다’면서 끝을 향해 치닫는다.”
(그럼, 자신이 형을 다 살았고, 반성했다고 한 것에 대해서는?) “세상이 괴물이라는 점을 말하고 싶다. 그 사람이 살려고 하는 것은 세상이 괴물이라는 것과 이어져 있다. 제목 ‘노 웨이 아웃’처럼 출구가 없다. 연기를 한 사람으로서 어떻게 말해야할지 잘 모르겠다. 잘 표현해 주기를 바란다. 사적 제재에 대한 이슈도 다룬다. 유튜브의 문제점에 대해서도. 그런 이슈들을 (기자들이) 이야기해주셨으면 한다. 법의 울타리에서 빠져나가는 존재가 있다. 김국호는 ‘난 갈 데가 없다’고 한다. 그런 인물과 이야기를 통해 사회구조를 명확하게 보여주고 싶었다.”
Q. 김국호는 분명 죗값은 치룬 것은 맞다. 그 점에 대해선.
▶유재명: “어떤 죄를 저질렀던 간에 현재의 우리 사회에선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감옥에서 징역형을 사는 것이 가장 진보적인 문제 해결방식, 구조일 것이다. 그래서 김국호는 자신이 벌을 받고 나왔는데 어떤 이유로, 황당하게 시작된 일이 점점 자신의 목숨의 위협을 느끼게 되고, 가늠할 수 없는 일들이 카오스처럼 이어지게 된다. 점점 살고자 하는 욕구만 남는 인물을 통해 사회의 모습을 보여주려고 했다. 미화시키거나, 한 악인의 인간적 모습을 보여주려는 것은 없다. 악마를 보여주기보다는 그런 사람에게 200억 이라는 목숨 값이 걸렸을 때 어떤 모습을 보일까? 지극히 현실적인 모습을 보이려고 했다. 그런 점에서 다른 작품과의 변별력이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Q. 이런 악역을 연기하는데 어려운 점은 없었는지.
▶유재명: “배우들이 캐릭터를 표현하려고 할 때는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드라마는 60분 안에 이야기를 끝내야하니 그런 감정의 순간을 점프하는 경우가 많다. 배우로서 어떻게든 해결해야한다. 연출에게 요구를 하다가도 수긍을 해야 할 때가 있다. 디테일을 볼 때 만족스럽지 않을 때가 있다. 하지만 연기자는 주어진 대사와 신 안에서 디테일을 최대한 살리려고 하는 작업인 것 같다.”
Q. <노웨이아웃>은 연출자가 둘이다. 어떤 방식으로 연출이 이루어졌는지.
▶유재명: “두 분이 다른 스타일이다. 현장에서는 촬영감독, 작가, 동료배우들과 함께 작업하면서 경우의 수가 많다. 이들을 다 만족시키는 현장은 없다. 다행스러운 것은 이번 작업에 대한 공감대가 있었다. 토론을 통해 설득하는 조율의 과정이 있었다. 그게 또 작업의 매력인 것 같다. 연출 스타일을 보면 ‘테이크’와 ‘메이크’의 개념이 있다. 어떤 감독은 직접 나서지 않고 배우들의 연기를 보고 ‘테이크’하는 경우도 있고, 어떤 감독은 ‘메이크’ 만드는 방식이다. 우리는 양쪽을 다 왔다 갔다하는 줄타기를 했다. 두 팀으로 나눠서 작업을 한 경우도 있다. 현장 일이 많아져서 분업화되었다.”
Q. 캐스팅은? 같이 연기한 배우들은?
▶유재명: “작품 제안 받고 제가 제일 먼저 합류하게 되었다. 제법 긴 시간 기다리며 한 분씩 합류하는 것을 보았다. 너무너무 좋은 배우들이 메이드된 것이다. 조진웅 배우는 다들 아시다시피 특출한 배우이다. 에너지와 함께 덩치도 있고 든든했다. 염정아 배우의 새로운 모습을 기대하셔도 될 것이다. 새로운 매력을 보여준다. 김무열 배우는 감각이 정말 뛰어난 멋있는 배우이다. 이광수는 ‘아시아의 프린스’란 것을 몰랐다. 연기를 더 많이 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성유빈 배우는 이전에 작품을 같이 했었는데 앞으로는 이 친구의 시대가 될 것 같다. 허광한(쉬광한) 배우는 사실 몰랐다. 글로벌스타가 될 수 있을 것 같다. (이미 그런 스타이다) 벌써 그런가? 몰라서 미안하다. 하하.”
Q. 김국호를 노리는 사람들이 많다. 어떤 인물이 가장 무서웠는지.
▶유재명: “스포가 안 되는 선에서 말하자면 모든 인물이 그랬다. 이 이야기는 어디로 진행될지 예상이 안 된다. 뒤로 갈수록 더 강력한 이야기가 나오니 누가 더 악하다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어쩌면 김국호가 가장 단순한 인물일 수도 있다. 살려고 애쓰는 것이 전부이다. 보다보면 각자의 생각이 있을 것이다. ‘노웨이아웃’이다.”
노웨이아웃: 더 룰렛
Q. 강렬한 캐릭터를 연기하고 나서는 일상으로 돌아올 때 후유증이나 극복 방법인 있는지.
▶유재명: “배우들에겐 각자의 노하우가 있을 것이다. 저는 노하우가 없다는 것이 노하우이다. 다작을 하는 편이라 그런 모양이다. 배우로서 행복한 소리이다. 뒤늦게 일을 많이 하는 케이스라서 좋은 작품이 들어오면 일중독처럼 뛰어든다. 닥치는 대로 작품을 하다 보니 이렇게 된 것 같다. 사흘 정도 쉬면 역할에서 빠져나온다. 목욕 갔다 오고, 동네친구와 술 한 잔 하고, 늘어지게 한 잠 자면 된다.”
Q. 필모를 보면 우정출연, 특별출연이 많다. 최근 <삼식이 삼촌>은 왜 ‘특별출연’인지, 꽤 중요한 역할이잖은가.
▶유재명: “20살에 연극을 시작했다. 20년 정도 쉬지 않고 공연을 했다. 도와달라면 달려가서 도와줬다. 극단을 창단할 때도, 글을 부탁받아도. 그렇게 작업하는 게 영상(영화)쪽 일을 하면서도 그대로 온 것이다. ‘도와주시겠어요?’하면 그냥 합류한다.”
“<삼식이 삼촌>은 일정상 할 수가 없었던 상황이었다. 다른 작품이 겹쳐서. 정중하게 고사를 하였는데 송강호 선배가 직접 요청 하셨다. 일정이 안 되어 거절을 했다가 고마움 때문에 특별출연하게 된 것이다. 초반에 분량이 많지 않고 후반에 많았다. 초반에 어느 정도일지 가늠이 안 된 상태에서 시작한 것이다. <삼식이 삼촌>은 좋은 드라마였다고 생각한다. 대한민국 한 시대가 그 이야기를 통해, 그 배우들을 통해 멋진 작품이 나온 것 같다.”
Q. 대학에서 연극을 시작했다. 연기를 하게 된 계기가 있는지.
▶유재명: “연기쪽으로 가고 싶었는데 집안사정 같은 게 있었다. 음악미술 같은 것을 반대하는. 안정적인 직장을 원했다. 대학가서 연극이라는 새로운 세상을 만났고, 눈을 뜨니까 지금 내 나이가 된 것 같다. 무대 만들고, 무대 해체하고, 연애하고, 헤어지고. 술 먹고 깨고, 작품하고, 그렇게 살아온 것 같다. 정신없이 살아서 어지러울 정도이다. 그렇게 이쪽 길로 온 것을 보니 운명인 것 같다.”
Q. 최근 가장 다작을 하는 배우인 것 같다. 일과 가정, 어떻게 밸런스를 맞추나.
▶유재명: “가족과 일의 밸런스를 맞추는 것. 조화롭게 살아가는 것은 50을 남은 남자의 삶의 화두이다. 뜨거운 청춘을 보낸 것 같다. 지금은 조화롭게, 평화롭게, 담백한 삶을 살고 싶다. 그러기 위해서는 일을 줄여야하는데, 좋은 작품이 계속 이어진다.”
Q. 최근 가장 다작을 하는 배우인 것 같다. 지금 찍고 있는 작품이 있는지. 힘들지 않은지.
▶유재명: “나는 운이 좋은 것 같다. 체력적으로 힘들다는 신호가 오래 전에 왔고, 정신적으로 신호가 오기는 하는데 오히려 지금이 편한 것 같다. 전에는 너무 잘하고 싶어서 힘들었다면 지금은 (몸이) 그런 열정을 받쳐주지 못하는 것 같다. 전체적으로 운이 좋다고 말하고 싶다. 대학로에는 20년 이상 연기를 한 분이 많다. 잘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진짜 연기를 잘 하신다. 그에 비하면 전 좀 알려진 편이다. 물론 그런 게 성공의 척도는 아니다. 대중에게 과분한 사랑을 받은 배우인 것 같다.”
유재명
Q. 김국호 말고 다른 역할은?
▶유재명: “중식이(조진웅) 역할도 매력적이다. 그리고 안명자 시장(염정아)이 남자라면 역시 매력적일 것이다.”
Q. ‘사회구조적 문제’라는 점에 대해 첨언한다면.
▶유재명: “엄청난 양의 영상이나 기사나 화두들이 세상에 쏟아지고 있다. 문제가 터질 때마다 많은 전문가들이 나와 토론한다. 그런데 안 바뀌더라. 똑같은 일이 반복되는 것이 출구가 없다는 것이다. 사회공동체적인 인식이 필요하다고 본다. 드라마 영상 일을 하는 우리가 보람을 느끼는 것은 단순한 재미를 넘어서 의미를 던져줄 수 있다는 것이다. 내가 하는 이 일로 사회의 구조적 문제에 대해 질문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 동네에, 우리 아파트에 그런 성범죄자가 산다는 것은 굉장히 현실적인 이야기일 것이다. 이런 이야기를 많이 나누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하얼빈>에서는 독립운동가 최재형 선생을 연기한다. <수능, 출제의 비밀>에서는 수능출제위원을 연기할 예정이다. <왕을 찾아서>에서는 또 다른 캐릭터를 연기한다. 앞으로 계획은 ‘무계획의 계획’이다. 정해진 게 없으니. 주어진 작품에 최선을 다할 것이다. 특별히 얻은 이미지도, 잃은 이미지도 없으니 자유롭게 연기하고 살 것이다.”
유재명 배우는 <노 웨이 아웃>에서 분노유발자 김국호를 연기하고, 14일 개봉하는 <행복의 나라>에서는 10.26사건을 수사하는 합수단장 전상두를 연기한다. ‘전두환’말이다! 관객들은 혈압이 또 오를 듯하다.
[사진=STUDIO X U]