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을 살린 아내가 치매에 걸렸다, “괜찮아요, 우리가 기억할게요”
경북 영덕, 동해가 내려다보이는 칠보산 중턱. 이곳에 사는 송학운(73) 씨, 김옥경(65) 씨 부부는 영락없는 잉꼬부부다. 어딜 가든 손을 꼭 붙잡고 다니고 음식을 먹을 때도 아내의 입에 넣어주는 남편. 사실 옥경 씨는 6년 전, 알츠하이머 진단을 받았다. 학운 씨에게 아내가 더 애틋한 이유는 바로 옥경 씨가 자신을 살려낸 사람이기 때문이다.
42살에 직장암에 걸렸던 학운 씨. 살날이 고작 6개월 정도라는 의사의 진단에 항암치료를 포기하고 깊은 산으로 들어갔다. ‘이제 죽었구나’ 기댈 것이 하나도 없던 그때. 아내 옥경 씨가 매일 같이 산에 올라 나물을 뜯고 밤낮없이 자연식을 연구해 남편을 먹였다. 피를 쏟아내는 남편을 위해 정성을 다했고, 1년 후 학운 씨는 기적적으로 살아났다. 하지만 30여 년이 흐른 지금, 남편과 아내의 입장이 바뀌어버렸다.
이젠 학운 씨가 아내의 손발이 되어야 했다. 부엌일에 손끝 하나 댄 적 없던 학운 씨는 난생처음 아내를 위한 요리를 시작했다. 아침에 일어나 옥경 씨를 씻기고 밭일하러 갈 때 수시로 옆에 있는 아내를 확인하는 것도 이제는 자연스러운 일상이다. 고집 세고 다혈질이라 평생 따뜻한 말 한마디 없었던 학운 씨는 요즘 아내의 볼을 쓰다듬고 틈만 나면 칭찬하며 이전과는 180도 바뀐 다정한 남편이 되었다.
남편을 살린 자연요리연구가로 옥경 씨의 이름이 알려지자, 많은 사람이 부부를 찾아왔다. 처음에는 무료로 밥을 해주고 요리법도 가르쳐 주었지만, 더 이상 감당할 수 없었다. 부부는 고민 끝에 아픈 사람들이 휴식하며 생활하는 방법을 배워가는 교육원을 차렸다. 그리고 10년 전, 민가가 없는 영덕 산속에 자리 잡아 물심양면 모든 것을 쏟아부었다. 남편은 땅을 일구고 아내는 열심히 음식을 했다. 하지만, 고된 노동으로 지친 탓일까? 옥경 씨는 얼마 지나지 않아 무기력과 과로로 인지장애가 생기더니 결국 알츠하이머 진단을 받았다.
갑작스러운 옥경 씨의 치매를 받아들이기 힘들었지만, 가족들은 손 놓고 있을 수 없었다. 엄마의 빈자리는 딸 현주 씨가 나서서 채워야 했다. 엄마의 음식을 어깨너머 배웠던 딸은 엄마가 했던 것처럼 환자들을 위해 요리를 하고, 부모님과 자신의 두 아이를 돌보며 고군분투 중이다.
옥경 씨의 지난 삶은 한마디로 ‘헌신의 연속’이다. 암에 걸린 남편을 낫게 하려 노력하고, 밤새 요리하고, 바쁜 와중에도 자식들을 사랑으로 보살폈다. 이런 삶이 옥경 씨를 지치게 했던 걸까. 평생 누군가를 위한 삶을 살았던 옥경 씨. 그녀의 헌신을 누구보다 잘 아는 가족들은 새로운 기억을 만들어주려고 한다. 예전에 살던 곳으로 여행을 떠나고, 늦었지만 하루하루를 아낌없이 함께하며 옥경 씨에게 받은 사랑을 돌려주는 중이다. 비록 옥경 씨는 과거의 모든 기억을 잃어버렸지만, 그런 옥경 씨에게 가족들은 말한다. “괜찮아요, 옥경 씨. 우리가 기억할게요”
[사진=KB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