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연식 감독의 필모그래피를 보면 소소하다. 철학적이거나 문학적이다. <러시안 소설>이나 <조류인간>, <프랑스영화처럼>, <로마서 8:37>같은 영화 말이다. 그런데, 신연식 감독은 <동주>와 <거미집>의 시나리오도 썼었다. 그런 신연식 감독은 이번에 디즈니플러스와 수백 억원짜리 대작 시대극 <삼식이 삼촌>을 내놓았다. 철학적이거나 문학적인 작품을 만들다가 이번엔 역사적이고 정치적인 드라마를 완성시킨 신연식 감독을 만나 그 소감을 들어보았다.
Q. 꽤 규모가 큰 작품이다. 16부작 드라마를 완성시킨 소감은?
▶신연식 감독: “2024년 대한민국에서 쉽게 세상에 나오기 힘든 작품인데 선택해주시고 지지해준 제작사와 디즈니플러스, 참여해 준 배우들에게 감사드린다. 모든 면에서 감사하다. 작품을 끝내면 이런저런 마음이 드는데 영화와는 느낌이 다르다. 뭐라고 설명하기 어렵다. 극장이 아니라서 그런가. 이런 감정을 규정하기가 쉽지 않다.”
Q. 편집이 루즈하다는 반응이 이다. 원래 16부작으로 기획한 것인가.
▶신연식 감독: “10부작으로 찍은 것이다. 편집할 때 등장하는 인물이 많고, 역사적 배경이 있으니 차분히 설명하자는 의견이 있었다. 그런 의견에 동의해서 이렇게 완성시켰다. 영화는 늘리는 경우는 없다. 길어서 줄이면 줄였지 말이다. 드라마는 이런 경우도 있다는 것을 알았다. 낯설었다. 시나리오도 10부작으로 썼고, 그렇게 찍은 작품이다.”
Q. 제작비가 꽤 높은 것으로 알려졌다. 상업적인 성공, 흥행에 대한 부담은 없었는지.
▶신연식 감독: “난 작품을 하는 의도가 확실하다. 그 의도에 충실하게 하려고 했다. 시장에 나온 뒤 어떻게 소비될지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런 경지에는 이르지 못했다. 작품을 만들 때 내가 생각한 것에 부합되는 형식으로 만들기 위해 온 힘을 쏟는다. 그 이후까지 계산하기에는 부담이 된다.”
Q. 1960년 초까지, 대한민국의 현대사를 아주 진중하게 다루었다. 만나보기 어려웠던 시대극이다.
▶신연식 감독: “지금 우리 사회와 우리의 삶을 구성하는 요소가 무엇인지, 영향을 미치는 것이 무엇인지 미시적인 감정에서 거시적인 역사까지 다루고 싶었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서로에게 고통을 주는 그 부조리함. 단순하게 생각해서 ‘저 사람이 나쁜 놈이야’, ‘저런 정치적 성향을 가졌어’라고 생각하면 쉬울 것이다. 지금 내가 불행한 것도 ‘직장상사가 꼰대라서’, ‘남자친구가 나빠서’같이 이야기하는 것처럼. 그렇게 생각하더라도 상대는 변하지 않을 것이다. ‘정치인이 부패했고, 군인이 겁이 많아서’라고 생각하면 간단하겠지만 거시적으로 보면 그게 쉬운 것이 아니다. 미시적인 감정이 작동하고, 역사적인 흐름에 영향을 미치고, 그것이 다시 개인에게 영향을 끼치는 것들을 작품에 담고 싶었다. 우리가 생각한 세상이 이럴 줄 알았는데 그런 게 아닐 수 있다. 사실 내 영화가 다 그랬다. 결국 엔딩에 가서 그런 부조리를 인식한다. <동주>도 그랬다. 이번 작품도 어쩌면 삼식이가 말하는 대로 된 셈이다. (김산이) 장관이 되었고, 5개년경제개발계획도 추진된다. 이게 내가 생각하고 꿈꿨던 세상일까?”
“나는 우리 역사에서 우리사회의 정체성을 형성한 가장 결정적인 순간을 ‘신라의 통일, 계유정란, 419’라고 생각한다. 한국사회의 정체성, 지배층과 피지배층의 성향 등이 확립된 때라고 본다. 그래서 419를 담은 것이지 대체역사를 그리려고 한 것은 전혀 아니다. 세상은 그런 식으로 움직이는 게 아니다. 14부에서 시위대가 지나가는 장면이 있다. 제가 하려는 이야기에 가장 부합되는 장면이다. 개인의 천성과 감성들이 쌓인다. 모두 한 곳에 모여 거대한 파도가 된다. 미시적인 감정과 목적으로 그 곳으로 몰려간다. 그 군중을 뚫고, 파도에 휩쓸려 모두들 각자의 천성과 관성으로 움직이다. 박두칠과 김산, 둘은 전혀 다른 세계에서 살지만 각자의 천성과 관성 때문에 서로 사랑하고, 또 그것 때문에 서로 의심하고, 주변사람에게도 영향을 준다. 주여진도, 강성민도 그러하다. 나는 나름대로 정밀하게 세팅해놓았다. 그 행간의 맥락과 흐름을 봐야 재밌을 것이다. ‘그래서 누가 나쁜 놈이지?’ 하는 관점을 보면 사실 재미없는 작품일 것이다. 그런 의도로 만든 것이 아니기에.“
Q. 제목도 ‘삼식이’이고, 피자로 시작해서 단팥빵, 그리고 시루떡이 나온다. 먹고 사는 이야기를 하려고 한 것인가.
▶신연식 감독: ”‘삼식이 삼촌은 전쟁 중에도 하루 세 끼를 먹였다‘고 말한다. 그런데 사실은 하루 세 끼만 주면 뭐든 하는 사람이다. 살인도. 이 사람의 천성은 못 바꾼다. 천성이 관성이 된다. 그리고 그게 신념화되기도 한다. 삼식이가 혼자서 빵을 먹는 장면이 있다. ’하루 세 끼‘ 이야기를 하며 자기의 본성을 숨기고 신념화한다. 자기 주인이 마음에 안 들면 기꺼이 주인을 갈아치우려는 사람이다. 관성이 그렇게 이끈 것이다. ’다른 주인은 없을까?‘하며. 삼식이의 그런 모습에는 그 시절의 페이소스가 있다. 엘리트인 김산은 욕망이 있다. 삼식이와 대비되는 순수가 있다. 돌아가는 형국을 보고 판단하는 것이다. 당 중진의원이 국가재건부 장관자리 대신 공천을 보장하겠다고 하자 ’내가 국회의원에 목 멘 줄 아세요?‘라고 말한다. 순수해서 그럴 수도 있지만 사실은 그 욕망에 흔들리기도 한다. 엘리트인 김산은 그런 식으로 관성을 신념화하고, 삼식이는 저렇게 표출하는 것이다. 혁명군 앞에 끌려올 때 삼식이는 ’난 이미 죽었다‘고 각오하고 있고, 김산은 ’어쩌면 나는 죽을 수도 있겠다‘는 신념이다. 그런 식으로 신념이 고착화된 두 사람이 마지막에 고백한다. ’난 피자 맛을 몰라요‘라고. 이건 엄청난 고백이다. 삼식이는 식탐이 있어서가 아니라 자신의 삶의 가치를 지키려는 방어기제에서 ’하루 세끼‘를 말하고, 김산은 자신의 삶의 가치를 보호하고 증명하기 위해 ’나는 그런 놈이 아니어요‘라고 말하는 것이다.“
Q. 영화만 찍다가 드라마를 해보니 어떤 차이가 있던가.
▶신연식 감독: “영화는 시나리오 다 써야 캐스팅이 된다. 그런데 드라마는 그렇지 않더라. 4(10회분 기준으로) 4회분을 썼을 때 캐스팅이 진행되었다. 그런 게 낯설었다. 시나리오가 다 안 나온 상태에서 배우를 만나서는 ‘당신 죽을 거야’, ‘당신 헤어질 거야’ 하면서 이후의 이야기를 배우에게 설명해야할 때 낯설더라. 내가 약을 팔고 있는 거야 싶었다. 그런 게 낯설고 신기했는데 물리적으로 힘들었던 것은 촬영을 하면서 대본을 쓴다는 것이었다. 장점을 따지자면 촬영하면서 배우들하고 이야기를 하면서 대본을 쓴다는 것이다.”
Q. 그동안 찍던 작품에 비해 큰 자본이 들어간 작품이다.
▶신연식 감독: “큰돈이 들어갔다면 아마 사람이 날아다니거나, 건물이 무너져 내릴 것이다. 그런데 나는 ‘419’를 했다. <삼식이 삼촌>은 시대물이라 돈이 많이 들었다. 1960년대는 다 만들어야했다. 그런 제약이 있었다. 이 시대에 좋은 이야기 소재가 많다. 종합촬영소, 세트장이 있다면 그런 이야기가 나올 가능성이 많을 것이다. 세트 짓는데 너무 많은 돈이 들었다.”
Q. 시대극이다. 해외 드라마를 보면 실명을 거론하는 다채로운 역사드라마가 있다. 그런데 <삼식이 삼촌>에서는 다 아는 역사적 인물에 대해서도 ‘비슷한 이름’으로 대체했다. 굳이 그렇게까지 바꿔야할 이유가 있는지.
▶신연식 감독: “괜한 오해를 받을 수가 있으니. 실제 역사적 사건의 맥락대로 한 것이지만 연루된 인물은 다 창작된 것이다. 그 사이사이에 유추 가능한 인물이 나온다. 아예 다르면 혼선의 여지가 있어, 그냥 디자인적으로 한자에서 비슷한 이름으로 바꿨다. 보시는 분이 어떻게 받아들일지는 결국 선택의 문제이다. 개인적으로는 한국사회는 그런 걸 포용할 여지가 작은 것 같다. 그게 한국사회의 특징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 문제에 대한) 예민함이 있다.”
Q. 소녀시대의 티파니 영을 캐스팅한 이유는?
▶신연식 감독: “레이첼은 영어를 잘 해야 하는 역할인데 캐스팅이 쉽지가 않았다. 이 작품에는 너무 뜨거워서 가까이 가면 델만한 배우들만 모여 있어서 어지간한 열정이 없으면 크게 델 수 있는 역할이다. 티파니는 연기경험이 많지 않지만 근성과 열정이 놀라울 정도였다. 신뢰가 갔다. 소녀시대라는 최고의 브랜드를 그렇게 오래 유지할 수 있다는 것은 보통의 의지로 이뤄질 수 없는 것이다. 잠깐 잘 되는 것은 쉬워도 오랜 시간을 정상을 지키는 것은 뭐가 달라도 다르기 때문이다.”
Q. <삼식이 삼촌>을 해보니 또 시리즈를 하고 싶은지.
▶신연식 감독: “당장은 아니지만 언젠가는 또 해보고 싶을 것이다. 지금은 영화를 하고 싶다. 어쩔 수 없다. 작용반작용인 것이다. 영화 했으면 다음엔 드라마, 멜로 하면 다음엔 액션, 심각한 것 했으면 코미디 하고 싶은 것이다. 늘 그렇다.”
Q. 신연식을 매료시키는 키워드가 있다면.
▶신연식 감독: “한 단어를 꼽자면 ‘갈등’. 그 안에 모든 감정이 있다. 애정, 분노, 권태. 그 어디에도 다 갈 수 있다. 인간을 움직이게 하는 작동원리 같다. ‘어디로 가지? 저리로 갈까?’크게 작게 어떤 갈등은 가지고 있느냐이다.”
Q. 영화사 ‘루스이소니도스’(Luz Y Sonidos) 이름은 어떻게 지은 것인가.
▶신연식 감독: “대학을 졸업하진 못했지만 전공을 살릴 수 있는 유일한 길이 스페인어로 회사이름 짓는 것이었다. ‘Luz Y Sonidos’는 ‘빛과 소리’라는 뜻이다. 멕시코 가변 유적지에서 밤에 불을 켜고 ‘루스이소니도스’ 쇼를 한다. 하하. 군 제대로 한 간 사람이 군대 이야기 제일 많이 한다더니, 내가 그런 것 같다.”
[사진=월트디즈니컴퍼니코리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