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전도연이 연극 무대에 올랐다. 오래 전, 연극 <리타 길들이기>(1997)와 창작가무극 <눈물의 여왕>(1998)에서 두 편의 무대 연기를 펼친 이래 27년 만에 다시 무대로 돌아온 것이다. 지난 4일, LG아트센터서울 LG시그니처홀에서 개막한 연극 '벚꽃동산'이다. 제정러시아 말기, 귀족이 몰락하고 신흥 자본세력이 부상하던 극도의 혼란기를 배경으로 한 안톤 체호프의 클래식 희곡 <벚꽃동산>을 호주 사이먼 스톤(Simon Stone) 연출가가 한국적 변형을 통해 재해석한 작품이다. 개막 후 몇 차례 무대에서 송도영(원작의 류바)을 연기한 전도연 배우가 취재진을 만나 무대연기의 치명적 매력에 대해 이야기했다. 러시아의 몰락한 귀족의 가문 이야기는 이번 무대에서 현대 한국의 재벌가 이야기로 변형된다.공연은 7월 7일까지 전도연, 박해수, 최희서 등 '원 캐스트'로 관객들을 만난다.
Q. 무척 오랜만에 무대 연기를 하게 되었다. 부담감이 없었는지.
▶전도연: “물론 부담감이 컸다. 하지만 재미있기도 하다. 무대 위에서 느끼는 자극이 대단하다. 저의 연기가 새롭게 느껴졌다. 무대를 즐기려고 한다. 무대를 하나하나 알아가고 있다. 이번에 무대에 오르는 배우가 모두 10명이다. 호흡이 너무 좋다. 어떤 실수를 해도 받아들이려는 믿음이 있다. 그래서 더 안심하고 연기를 펼칠 수 있는 것 같다.”
Q. 사이먼 스톤의 연출 방식이 특이했다고 하는데.
▶전도연: “처음에 대본을 아주 조금 주는 것이었다. 4월 1일 연습 시작한 첫날은 당황스러웠다. 겨우 몇 장의 대본만 주고는 리딩하는 방식이었다. 그래서 끊임없이 컴플레인을 했다. 사이먼도 스스로 뭔가 새로운 것을 시도하는 것 같았다. 그렇게 대본을 완성하면서 보여준 연출 방식이 지금은 전적으로 신뢰가 간다.”
Q. 사이먼의 작품 접근 방식이 어떠했는가.
▶전도연: ”사이먼이 처음 연습할 때 배우들에게 '실수를 하라', '다른 사람들을 불편하게 하라'고 주문했다. 배우들은 실수를 두려워하는데, 사이먼은 실수할 때 나오는 어떤 새로움을 생각한 것 같다. 제가 무대에 오르는 게 오랜만이라 긴장이 컸는데 그런 접근법이 한편으로는 든든했다. 불균형 속에서 나오는 새로운 것들을 느낄 수 있었다.“
Q. 무대 위의 연기는 어땠는가.
▶전도연: “제가 27년 만에 무대에 선다는 것도 기사 보고 알았다. 그때 일은 기억도 아난다. 오랜 세월이 지났다. 상견례 때 신인의 자세로 연기를 하겠다고 했다. 영화나 드라마와는 달리 무대 연기는 카메라를 보고 하는 것도 아니고, NG가 있으면 다시 하는 것도 아니다. 무대를 완벽하게 소화하겠다는 욕심보다는 나도 실수를 할 수 있다는 것을 받아들이려고 했다.”
Q. 관객들의 반응이 어땠는지.
▶전도연: “이 작품은 블랙 코미디이다. 연출자에겐 코미디 연출 의도가 많았던 것 같다. 관객들이 어떻게 받아들일지 모르겠더라. 한국적으로 바꾼 해석을 잘 받아들일까 걱정이 되었다. 그런데 사이먼의 의도대로 관객의 반응이 나올 땐 기뻤다. 무대장치에서 배우가 집으로 들어가면 방음이 잘 되어 있어 관객 반응이 안 들린다. 그래서 좀 더 집중할 수 있었던 것 같다.”
Q. 송도연 캐릭터에서 본인과 닮은 부분이 있는지.
▶전도연: “극중 이름은 배우들이 정했다. 사이먼이 우리끼리 편하게 정해보라고 했다. 송씨네는 도영, 재영으로 정했다. 공연을 하다 보니 제 이름과 비슷해서 무대에서 ‘도연’이라고 해도 사람들이 모를 것 같다고 농담하기도 했다. 지난 1월에 사이먼과 배우들이 1주일 동안 워크샵을 하면서 각자 느낀 것에 대해 이야기 나누었다. 사이먼은 배우들이 하는 이야기를 계속 듣고, 관찰했다. 우리는 1주일동안 관찰대상이었다. 배우와 캐릭터 사이에서 비슷한 것을 뽑아 그것을 대본에 반영한다고 했다. 그런 과정을 거치면서 개인적으로 가지고 있는 품격이나 성향이 많이 반영된 것 같다.”
Q. 도영이라는 캐릭터에 대해.
▶전도연: “대본을 봤을 때는 도영 캐릭터를 이해하지 못했다. 이렇게까지 해도 괜찮을까. 가장 이해가 안 되는 것은 자신의 상처, 고통, 아픔 같은 것을 딸들에게 고스란히 전달하는 것 같았다. 고통분담처럼. 관객들이 이해할 수 있을까 의심한 것이다. 사이먼은 그때마다 걱정하지 말라면서 잘 전달될 것이라고 했다.”
Q. 오래전에 연극 한 편과 창작뮤지컬을 했었는데, 그 당시 무대를 선택한 이유가 있었는지.
▶전도연: “그때는 왜 연극을 하려고 했는지 모르겠다. 아무 생각 없이 했다. 어떻게 보면 그 당시 이윤택 연출에 대한 호기심도 있었다. 가극이었는데 어린 나이에 무모한 도전을 한 것이다. 제가 노래를 못하는데 어떻게든 해보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 예술의전당에서 공연을 했었는데 지금보다 더 많은 배우가 있었다. 선배님도 많았고. 그 분들 지켜보는 것만으로 좋은 경험이었다.”
“이런 이야기는 오래 전부터 했지만 영화나 방송 말고도 갈증이 있었다. 내가 뭘 할 수 있을까 고민했었다. 요즘 와서 보면 K콘텐츠는 영화나 드라마 장르에만 집중된다는 생각이 든다. 선택지를 넓히고 싶었다. 그런 면에서 연극은 또 다른 도전 같다. 나에게 대본이 많이 주어지는 것도 아니고, 내가 공연을 많이 보고 제의하는 사람도 아니다. <벚꽃동산>으로 그런 갈증을 해소할 수 있었으면, 여기서 에너지를 얻을 수 있었으면 한다. 앞으로 방송이나 영화가 아니어도 폭넓게 해야할 것 같다.”
Q. 무대 연기를 다시 해보니 어떤가.
▶전도연: “첫 공연 때는 죽고 싶었다. 내가 내 발등을 찍은 것 같았다. 왜 내가 이걸 한다고 했을까. 도망가고 싶었다. 첫 공연은 어떻게 했는지 기억을 못할 정도로 정신없이 지나갔다. 무대에 오를수록 긴장되고, 부담되고, 떨린다. 이런 게 공연 끝날 때까지 계속될 것 같다. 힘들다. 제 명이 단축될 것 같다. 그런데 스스로 그런 긴장감을 즐기고 있는 것 같다.”
Q. <벚꽃동산>의 인물에 대해.
▶전도연: ”송도영은 딸의 남자친구와 썸도 타고, 키스하고 그런다. 대게 나쁜 여자 아닌가? 나이브하고 순수한 영혼을 가졌다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 연기하며서 제가 받아들이는 게 있었다. 글로 읽을 때는 불확실함이 있었지만 말이다. 관객들도 그런 점에 대해 호불호가 있겠지만 저에게는 그 인물이 납득이 되었다. 그러니 연기를 할 수 있을 것이다.“
Q. 대사 만들어가는 과정.
▶전도연: ”연출자 사이먼이 한국말을 모르니 대사를 빼먹거나, 다르게 해도 눈치 못 챌 거야 생각했는데 귀신같이 알아내더라. 다른 나라에서, 다른 나라 말로 연기하는 것을 봐와서 그런지 언어습득이 빠른 것 같다. 이름 정할 때도 ‘이거 좋아’하더라. 배우들이 하는 것 지켜보면서 여러 가지 시도를 해보면 ‘나 그거 좋아’ 그런다. ‘그 대사’도 연습하는 과정에서 박해수 배우가 하는 것 보고 좋아하더라. 언어습득력이 좋다.“
Q. <벚꽃동산>은 해외공연도 계획 중이라는데.
▶전도연: ”저도 처음에 걱정한 것이 자막 문제였다. 예전에 칸(국제영화제)에서 심사위원 할 때, 한글자막이 없었다. 영어와 프랑스 자막만 있었다. 그걸 얼마나 이해할 수 있을지. 영화제 측에서 대본을 주겠다고 했는데 저한테 그럴 여유가 없었다. 하루에 세 편씩 봐야하니까. 그런데 가능하더라. 영화를 보면서 감정을 따라가니 느끼는 것이 있었다. 집중하니 피로감이 쌓이지만 불가능한 것은 아니었다. 뭔가를 이해하는데 언어가 중요하지 않을 수 있다. 배우의 감정선을 따라가는 데는 무리가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Q. 작품 선택할 때 책임감 같은 것을 느끼는지. 한국 중년 여배우로서는 항상 그런 부담감이 따를 것 같은데.
▶전도연: ”저는 그렇지는 않아요. 후배들 일은 후배들이 알아서 할 것이고. 책임감이나 부담감을 느낀다면 우선 저 자신이 자유롭지 못할 것 같다. 제가 어떤 작품을 할지 그게 더 걱정이 되니까.“
Q. 공연 평은 찾아보았는지.
▶전도연: ”찾아보지는 않았다. 반응이 좋다는 이야기는 들었다. 앞으로 공연을 더 해야 하니 앞으로 할 것에 대해서만 집중하고 있다. 드라마 <일타스캔들>도 시청률이 잘 나왔고, <길복순>도 잘 되었다. 나에게 이런 날도 있구나 싶다. <벚꽃동산>도 나중에 회자되면, ‘좋은 작품 했구나’ 이야기할 수 있을 것 같다.“
Q. <벚꽃 동산>을 선택한 계기가 있는지.
▶전도연: ”대본이 중요한 것 같다. 원작 책을 봤을 때 재미없다고 생각되었다. 내가 이해 못하는 작품이었다. 안톤 체호프가 유명해도 말이다. 사이먼의 작품 '메디아'가 국립극장에서 스크린으로 상연될 때 봤는데 피가 끓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거기에 나오는 배우들이 부러웠고, 나도 하고 싶어졌다. 영어가 아니고 한국어로 한다니. 같이 할 수 있겠구나 생각했다.“
Q. <벚꽃동산>을 통해 관객에게 어떤 메시지를 전해 주고 싶은지.
▶전도연: ”모르겠어요. 구세대와 신세대 충돌을 다루고, 새로운 세계로 나아가야한다는 이야기인데, 저마다 바라는 새로운 시대가 있을 것 같다. 각자 보고 새로운 시대에 대해 생각해봐야할지 않을까.“
Q. 그럼, 전도연에게 새로운 시대란?
▶전도연: ”저는 변화를 무서워하는 사람이다. 작은 변화에도 스트레스를 받는다. 안주하는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새로운 시대란 그냥 아이들이 살기 좋은 시대였으면 좋겠다. 그게 어떤 것인지는 모르겠다. 사이먼이 물어봤을 때도 대답을 안했었다. 각자 다를 것 같다.“
Q. 한 달 간 무대연기를 이어가려면 건강관리를 잘 해야 할 것 같다.
▶전도연: ”한약 먹고 있다. 체력이 좋다고 생각하는데 한 해 한 해 다르게 느껴진다. 일을 할 때는 집중하다보니 모르고 간다. 일이 끝나면 후유증 같은 게 오더라. 잘 쉬어야할 것 같다.“
Q. 또 연극 무대에서 볼 수 있을까?
▶전도연: ”러브콜을 받으면. 다른 작품도 해보고 싶다는 얘기는 했다.“
”전도연이 선택한 작품에 대한 믿음을 주고 싶다. 전도연이 연기를 너무 잘한다는 말은 사실이기 때문에 이야기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하하), 그것보다는 '벚꽃동산'이 좋은 작품, 사랑받는 작품으로 회자되길 바란다.“며 인터뷰를 마쳤다.
전도연과 함께 박해수, 손상규, 최희서, 이지혜, 남윤호, 유병훈, 박유림, 이세준, 이주원 등이 원캐스트로 출연하는 연극'벚꽃동산'은 오는 7월 7일까지 LG아트센터 서울 LG SIGNATURE 홀에서 공연된다.
[사진=LG아트센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