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6월 15일. 반세기 만에 남과 북 두 정상이 만났다. 그리고 이루어진 ‘6.15남북공동선언’ 적대와 대립의 역사를 넘어 교류와 협력의 시대로 가자는 취지였다. 네 개의 항목으로 이뤄진 합의문 네 번째 항에는 ‘남과 북은 경제협력을 통해 민족경제를 균형적으로 발전’시키자는 약속이 담겼다. 그 실천의 산물이 바로 개성공단이었다. 그렇다면 어떻게 분단 이후 최초의 남북정상회담이 성사됐을까? 그 막후에는 대북특사 역할을 했던 박지원 전 국회의원, 회담 직전 평양을 오가며 김정일 위원장을 만났던 임동원 전 장관이 있었다.
남측 기업 공단 부지로 ‘개성’이 낙점된 비하인드 스토리
개성에 남측 공단이 들어선다는 것은 놀라운 발상이었다. 개성은 평양보다 서울이 더 가깝고 군사분계선 최전방의 군사요충지였던 까닭이다. 그 기적 같은 일은 어떻게 가능했을까?
당시 사업을 맡았던 현대 아산 관계자, 그리고 정세현 정동영 이종석 전 통일부 장관의 생생한 비하인드 스토리를 듣는다.
우리 기업의 돌파구, 개성공단. 북한 노동자와 남한 기업이 만드는 시너지
남측이 자본과 기술을 북측은 토지와 노동력을 제공하여 협력한다는 것이 개성공단의 기본취지. 이미 알려진 대로 북측 근로자들의 생산성은 기대 이상이었다. 의무교육으로 고등교육을 받았고 손재주가 좋았다. 무엇보다 말과 문화가 같았다. 1~2년의 시행착오 후에는 놀라운 생산성을 달성했다. 중국, 동남아 등 그 어느 곳보다 저임금으로 고품질의 제품을 생산했다. 저가 중국제품에 경쟁력을 잃어가던 우리 제조기업들은 개성에서 새로운 도약의 기회를 잡았다.
개성공단은 한반도 평화의 안전판이었다
개성공단에는 2004년 시범단지 입주를 시작으로 남측 기업 120여 개, 영업기업 200여 개가 입주해 있었다. 북측 근로자 5만4천 명, 남측 주재원 200여 명이 365일 일상을 공유하던 공간, 그곳은 날마다 통일이 이뤄지던 한반도 평화의 공간이었다. 북한의 핵 개발과 무력 도발이 있던 순간에도 기계가 돌아가던 개성공단은 남북 관계 안전판 역할을 하던 곳이었다.
2016년 폐쇄 이후 ‘제재’에 묶여 버린 개성공단은 다시 열릴 수 있을 것인가
2016년 북한의 핵, 미사일 발사 이후 박근혜 정부는 개성공단 전면 중단을 선언했다. 대북 압박이 목적이라고 했지만, 법적 절차적 과정을 무시한 일방적인 대통령의 ‘구두지시’임이 밝혀졌다. 그 피해는 엄청났다. 2016년 우리 정부가 먼저 닫아버린 개성공단은 국제사회 제재에 묶여 버렸다. 개성공단에 입주해 있던 우리 기업과 근로자들은 하루아침에 일터를 잃었다.
그리고 2018년 세 번의 남북정상회담과 두 번의 북미 정상회담이 열렸지만, 하노이 북미회담의 ‘노딜’이후 남북 경협 재개의 희망은 실마리를 찾지 못하고 있다.
2000년 6월 15일 남과 북 두 정상의 약속에서 시작된 남북경제협력의 상징, 개성공단. 한반도 비핵화와 평화를 향해 나아가기 위해 우리 사회는 어떤 선택을 해야 할까.
6·15 공동선언 20주년 특집 다큐멘터리 <개성공단>은 6월 15일 오후 7시 40분에 KBS 1TV를 통해 방송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