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가 어려움에 처하면, 외세의 압박을 받게 되면 민족 영웅을 다룬 이야기가 득세하는 법. 군인이 될 수도 있고, 스포츠 스타가 될 수도 있고, 문학가일 수도 있다. 중국에는 특이하게도 무술영웅이 많다. 이소룡과 성룡, 주성치까지 연기한 적이 있는 <정무문>의 진진, 이연걸이 연기한 곽원갑, 그리고 숱하게 만들어진 방세옥, 황비홍이 그러하다. 물론, 그 근원은 소림사의 무승들일 것이다. 여기에 언제부터인가 ‘엽문’(葉問)이라는 인물도 중화민족의 영웅대열에 합류했다. 비교적 덜 알려진 무인이지만 견자단 때문에, 시대 상황 때문에 더욱 주목받는 인물이 되었다.
<엽문>(1편)은 2008년 연말에 처음 개봉되었다. 홍콩의 재간둥이 영화제작자였던 황백명이 만든 이 엽문 시리즈는 만드는 족족 흥행에 성공한다. <엽문외전:장천지>라는 번외편이 나오더니, 작년 연말 시리즈의 마지막이라고 내세운 <엽문4>가 중국에서 개봉되어 역시나 흥행대박을 터뜨렸다. 한국에서는 코로나19 사태로 극장이 얼어붙은 가운데 극히 적은 관객만으로 박스오피스 톱을 차지했다. 엽위신 감독의 <엽문4>는 실존인물인 엽문의 말년의 삶을 그린다. 이게 다 사실일까? 그게 이 영화의 감상포인트이다.
때는 1964년. 엽문은 아내(張永成)가 병으로 죽자 둘째 아들 엽정(葉正)과 함께 홍콩에서 단출한 삶을 살아간다. 엽문은 암 진단을 받았고, 철부지 아들과의 관계는 소원하다. 그러던 차에 옛 제자였던 이소룡의 초청으로 미국으로 건너간다. 아들 유학문제를 알아보기 위해. 그런데, 샌프란시스코 차이나타운에서 목격하게 되는 것은 상상도 못 한 중국인에 대한 차별과 박해였다. 게다가 중국인 커뮤니티도 그에게 호의적이지 않다. 엽문은 공수도를 익힌 포악한 미 해병대 전사와 필사의 대결을 펼쳐야 하고, 중화인의 단결을 도모해야 하며, 무엇보다 홍콩에 있는 아들과의 화해를 소망한다.
엽문, 광동성 불산의 무술고수
엽문은 실존 인물이다. 지난 2010년, 중국 광둥성 광저우에서 열린 아시안게임의 격투기 종목은 광저우 바로 옆동네인 불산(佛山,포산)에서 열렸다. ‘불산’은 엽문의 고향이다. 불산에는 ‘불산조묘’라는 큰 사원이 있고, 그 한쪽에는 황비홍기념관과 함께 엽문을 기념한 엽문당이 자리 잡고 있다. 홍콩영화의 빅히트 이후 이곳을 찾는 사람이 많아졌다. 엽문은 1893년 불산에 태어나서 어릴 때 영춘권(詠春拳)의 고수 진화순에게서 잠깐 무술을 배운다. 그리고 홍콩으로 건너가서 역시 대가인 양벽에게 무예를 사사한다. 이후 다시 고향으로 온 그는 이런저런 일을 하게 된다. 결혼도 하고 가족도 이룬 그가 1949년, 대륙이 공산화되자 급하게 홍콩으로 건너온다. 이후 홍콩에서 무관을 세워 자신의 무술을 가르친다. 이소룡도 그에게 영춘권을 배웠다.
중화영웅 엽문 세우기
<엽문> 영화에서는 엽문이 일본강점기 시절 일본군과 대결을 펼치며 중화 민족혼을 드날린 것으로 나온다. 영화 성공 후 ‘엽문’의 그의 실제 모습에 대한 다양한 이야기가 나온다. 그가 1949년 중국을 떠난 것은 그가 (공산주의자를 색출하던) 국민당 소속이었고, 홍콩에서는 아편흡입을 했다는 주장도 있다. 엽문시리즈에서 줄곧 다루는 아내와의 애틋한 로맨스도 실상은 그렇지 않다. 뭐, 그런 드라마틱한 삶을 산 무예인이다 보니 속편이 거듭되면서 무리수를 둔다. <엽문4>에서는 부자간의 소통을 이야기하는 가슴 뜨거운 면이 있는가 하면, 미국 한복판에서 펼치는 ‘미-중’ 대결이라는 엄청난 이벤트가 자리하고 있다.
물론, 일제강점기라면 최배달 같은 민족영웅의 대활약에 환호한다. 하지만 일본 제국주의를 실컷 두들겨 팬 뒤 <엽문4>에서는 미국에 맞선다. 당연히 아시아인, 이민자들이 겪었을 인종차별과 국가폭력에 대한 울분이 묻어난다. 물론, 그런 사실이 있다고 하더라도 이것은 <크래쉬>(폴 해기스 감독,2004) 같은 드라마가 아니다. 중국인이 중국 최강무술로 미 해병대쯤은 박살 낼 수 있다는 카타르시스를 안겨주는 싸구려 국수주의 경향의 영화이다. 정치적으로 표현하자면 트럼프 시대에 시진핑이 날리는 핵 주먹이라고나 할까. 여하튼, 3자의 입장에선 맘이 편치 못한 게 사실이다. (물론, 중화총회에서 펼치는 테이블 액션, 이소룡의 쌍절곤 격투, 견자단의 모든 액션씬은 엽위신 감독의 매끈한 연출로 아드레날린을 폭발시킨다)
참, 이소룡으로 출연한 배우는 <소림축구>에서 이소룡 흉내를 내던 진국곤이 맡았다. 더 반가운 인물은 미 해병대원으로 나오는 중국인 하트만을 연기한 오건호이다. 한때 선풍적인 인기를 누렸던 대만드라마 <꽃보다 청년>(유성화원)의 그 F4의 멤버 오건호(바네스 우)이다.
참, 왕가위 감독의 <일대종사>에서 양조위가 연기한 인물도 바로 이 엽문이다. (KBS미디어 박재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