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벨바그’(Nouvelle Vague)는 1950년대 후반에 시작된 프랑스의 새로운 영화운동 사조(思潮)를 일컫는다. 프랑수와 트뤼포, 클로드 샤브롤, 장 뤽 고다르, 에릭 로메르 감독들이 판을 뒤집어엎겠다며 새로운 감각의 영화를 열심히 찍었었다. 그런 영화정신은 홍콩에도 전해졌다. 홍콩영화계에서는 1980년대 들어 기존의 영화판을 뒤집는 시도가 이어졌다. 주로 미국과 영국에서 영화를 공부한 일단의 젊은 영상학도들이 TV방송국에 몸담았다가 자신들의 영상미학으로 작품을 만들기 시작한 것이다. 허안화(풍겁/투분노해), 담가명(열화청춘/명검), 서극(접변), 방육평(부자정), 장완정(가을의 동화)이 대표적인 감독이다. 이들이 일으킨 영화운동이 바로 ‘새로운 물결’이라는 의미를 가진 홍콩 신낭조(香港新浪潮/Hong Kong New Wave)이다. 이전에 나왔던 홍콩영화들과는 확실히 결이 다르고, 품격에서 차이가 난다. 담가명 감독의 <명검>(1980)은 홍콩 신낭조의 대표작 중 하나이다. 기존 홍콩 쿵푸 영화나 쇼브라더스 작품과 조금 다른 느낌을 전해준다.
영화는 칼잡이, 검객의 운명을 이야기한다. 최고의 검을 만드는 대장장이가 최고의 검객 화천수(전풍)를 위해 명검 ‘한성검’(寒星劍)을 만들어준다. 그런데 화천수에게는 또 다른 명검 ‘제물검’(齊物劍)이 있었다. 대장장이는 그 칼을 보더니 “제물검에는 칼을 만든 사람의 한이 서려있으며 그 화가 결국 당신에게 미칠 것”이라고 충고한다. 화천수는 불길한 예감에 강호를 떠난다. 세월이 흐른 뒤, 청년검객 이모연은 자신의 실력을 믿고 화천수를 찾아 일전을 펼쳐보고 싶어 한다. 이제 세상을 등진 천하고수 화천수와 젊은검객 이모연, 그리고 이모연을 질투하는 악객 련환이 천하 명검을 손에 쥐고 절정의 칼날을 휘두르게 된다.
젊은 검객 이모연을 연기한 배우 정소추는 1960년대부터 TVB의 수많은 무협드라마의 주인공으로 초절정 인기를 누린 배우이다. 기억에 남는 영화작품은 서극 감독의 레전드 SF무협 <촉산>(新蜀山劍俠, 1983)이다. 천하고수지만 슬픈 운명을 맞는 화천수 역은 쇼브러다스 작품에서 홍콩뉴웨이브를 거쳐 홍콩느와르작품까지 출연했던 베테랑배우 전풍이 맡았다. 악당 련환 역의 서소강도 그 시절 숱한 홍콩 무협물에서 만나보았던 배우.
영화는 고수의 비극을 잘 보여준다. 검술이든 격투기이든 일가를 이뤘지만 세상은 호락호락하지 않다. 세상 그 어디선가 무서운 신예가 등장하는 법. 새파란 신예는 용맹스럽게, 혹은 무모하게 최강고수에게 도전장을 던질 것이다. 영화 초반에 이모연이 폐가로 변해버린 화천수의 집을 찾는 장면이 있다. 고수가 떠나간 그 곳에서 그를 기다리는 것은, 그처럼 ‘고수와의 일전’을 바라는 검객. 12년 동안 화천수가 돌아오길 기다리며 광인이 되어있다. 이모연은 자신의 운명을 그때 깨우쳐야했는지 모른다.
<명검>은 무협의 세상, 강호에서 펼쳐지는 최고수들의 운명을 그린다. 천하의 명검을 손에 쥐었다 하더라도, 지금은 천하제일의 검객이라 하더라도, 내일의 운명은 알 수 없는 법.
그런 점에서 이 영화는 서부극 <건파이터>(헨리 킹 감독, 1950)와 울림이 같다. 그레고리 펙은 천하제일의 총잡이. 그 누구보다도 총을 빨리 뽑아 상대를 쓰러뜨린다. 하지만 그의 인생은 서글프다. 술집에 들어서면 사람들이 두려워하며 뒤로 물러서지만, 꼭 한 놈 정도가 나선다. 새파란 총잡이가. “저 자만 쓰러뜨리면 나는 세계 제일이 된다.”고. 세계 제일의 건파이터가 언제까지 세계 최고수일 수는 없는 법. 강호도, 서부도 고수의 몸짓은 허망할 뿐.
담가명 감독은 장국영이 출연한 청춘방황극 <열화청춘>(82)과 오늘날의 왕가위 품격을 느끼게 하는 <최후승리>(87), <살수,애접,몽>(89)을 만든 뒤 오랫동안 영화계를 떠난다. 지난 2006년, 17년 만에 신작 <부자>(2006)를 내놓으면 다시 한 번 주목받았다. 담가명 감독은 왕가위의 <아비정전>과 <동사서독>의 편집을 맡기도 했다.
쇼브러더스 작품과는 조금 다르고, 요즘 나오는 무협과는 많이 다른 무게감을 가진 <명검>은 OTT서비스 왓챠플레이에서 만나볼 수 있다. (KBS미디어 박재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