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은 ‘헬조선’이라는 표현을 예전만큼은 쓰지 않는다. 상황이 더 좋아졌는지, 바닥 밑의 지하실까지 왔는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대만에서는 자신들의 희망없고 비참한 현실을 ‘귀도’(鬼島/귀신의 섬)라고 자조한다. 여러모로 보나 최악의 상황이라고. 하다못해 지진도 자주 일어나는 곳이다. 그런 대만에서 날아온 ‘생존기’이다. 귀신의 땅에는 귀신이 살까, 인간이 살까.
대만 작가 천쓰홍(陳思宏)의 소설 <귀신들의 땅>이 지난 연말 민음사를 통해 번역 출간되었다. 504쪽에 이르는 두꺼운 책에는 대만 인민의 슬픈 역사, 눈물의 가족이야기가 담겨있다. 이 책은 출간 이후 대만 유수의 문학상을 수상했고, 12개 언어로 출간되어 호평을 받았다.
이야기는 주인공(천텐홍) 가족의 이야기가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텐홍은 자신이 살아온 이야기, 한 많고 사연 많은 가족이야기, 그리고 끈끈이처럼 자신을 영원히 옭아매는 고향 이야기를 전해준다. 이야기는 대만 중부의 용징(永靖)을 배경으로 한다. 용징은 대만 중부지방 장화(彰化)현의 시골마을이다. 이곳에서 수도인 타이베이를 가려면 위앤린으로 나와 타이중까지 가서 타이베이 행 기차를 타야했단다. 이 편벽한 시골마을은 영원히 ‘과거’에 머무를 것 같다. 텐홍의 가족은 식구가 많다. 아버지(아산), 어머니(아찬), 그리고 누나 다섯과 형 하나. 텐홍까지 모두 9명이나 된다. 제 명에 산 사람도 있고, 죽은 사람도 있다. 자살한 사람도 있고, 살해된 사람도 있다. <귀신의 땅>은 산 자와 죽은 자가 함께 나와 저마다 떠들고, 저마다 악다구니 쓰는 이야기이다. 살아있을 때도 그러했지만 죽어서는 더더욱 그 말과 뜻이 상대에게 미치지 못한다.
텐홍은 결국 대만을 떠난다. 독일에 갔지만 삶이 더 나아진 것 같지는 않다. 소설가인 그는 독일에서 글을 쓴다. 여전히 과거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동성의 애인을 죽이고 독일의 교도소에서 형을 산 뒤 귀국한다. 오랜만에 찾아간 고향 마을에서 제사도, 추모도, 회한의 눈물도 흘릴 여유가 없다. 과거의 기억은 그의 삶을 영원히 옭아맬 것이니.
<귀신들의 땅>은 아마도 1980년대부터 펼쳐진다. 온갖 미신이 살아 숨 쉬던 이 곳 용징에 개발 붐이 분다. 천씨 가족은 낡은 삼합원에서 ‘타운 하우스’라는 새로운 주거공간에 들어간다. 개발은 과거와의 단절이다. 오래된 숲을 밀어버리고 그곳에 집이 들어선다. 주위에는 대나무 숲이 있다. 대나무 숲에는 (일제강점기 때) 일본군에게 강간당해 죽은 여자 귀신이 있단다. 개천에는 죽은 돼지와 개와 고양이가 떠다니며 썩어간다. 대만 땅 곳곳에는 온갖 신과 귀신을 모시는 묘당이 있고, 사람들은 틈만 나면 향과 지전을 불태우며 귀신을 위로하고, 산자의 삶을 모색한다. 이곳에는 우리가 아는 ‘TSMC’ 같은 초일류 기업이나 ‘자유중국’ 같은 우아한 정체성은 없다.
<귀신들의 땅>은 단편적인 기억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는 소설이다. 거듭 등장하는 이야기의 고리를 따라가다 보면 텐홍의 가족의 실체를 그러모을 수 있다. 첫째 누나(수메이)는 중학교를 겨우 마친 뒤에 어머니의 등쌀에서 벗어나고자 방직 공장에 취직하였고, 지게차를 몰던 남편과 사랑에 빠져 결혼하지만 노름에 빠진 남편 때문에 노후가 신통찮다. 둘째 누나(수리)는 타이베이에서 공무원이 되지만 진상 민원인의 표적이 되어 비참한 최후를 맞는다. 셋째(수칭)는 공부 잘해 타이베이대학에 가지만 그 뒤는 불행하다. 뉴스 앵커와 결혼하지만 폭력남편이었다. 넷째는 돈 많은 왕씨 집안 큰아들과 결혼하여 용징에서 가장 큰 저택인 ‘백악관’의 여주인의 여주인이 되지만 정신이 온전히 못하다. 다섯째는 자살한다. 텐훙이 용징으로 돌아온 시기는 중원절(中元節)이다. 음력 7월 15일. 도교(道敎)에서는 이 즈음 귀신들이 돌아오는 시기로 본다. 그래서 이승의 사람들은 그들을 위해 먹을거리를 마련하여 봉양한다.
<귀신들의 땅>은 대만의 민초의 고달픈 삶을 이야기하면서 몇 가지 개인적인 이야기와 기억을 전해준다. 소설에는 ‘밍르서점’이라는 비밀스러운 공간의 이야기를 전해준다. 서점 주인은 뚱뚱한 남자와 홀쪽한 남자, 두 사람이다. 둘은 동성애자이고 그들의 정체(성 정체성)가 발각되면서 어떤 일이 생기는지 전해준다. 그리고 고향사람 중에는 ‘계엄령 시절’의 불행한 삶도 언급한다. 이 모든 이야기는 대만의 지나간 이야기이고, 지나간 역사이며, 잊힌 과거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귀신의 땅’에 살았던 사람, 살고 있는 사람의 머리와 가슴에는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생채기가 된다.
작가 천스홍은 잘 알려진 성소수자이다. 대만에서는 ‘동성애’를 ‘동지’同志)라고 완곡하게 표현한다. 우리나라에 소개되는 대만영화에서는 이런 경향성을 곧잘 만나볼 수 있다. 천쓰훙은 누나가 7명, 형이 하나 있었단다. 놀라운 정도의 대가족이었단다. 이제는 세계적인 작가가 된 천쓰훙 작가의 인터뷰를 찾아보았다. 작가가 오랜만에 고향에 돌아와서 엄마와 뉴스를 보았단다. 유럽에서 동성애자들이 시위를 하는 모습이 방송되고 있었는데 엄마가 무슨 말인지 몰라 아들에게 물어보았단다. “퉁싱리엔(同性戀)이 무슨 말이지?”라고. 아이는 순간 뭐라고 대답해야할지 몰랐단다. 작가는 “그때서야 그 단어(퉁싱리엔)가 대만의 시골마을에는 존재하지도 않은 단어란 걸 알았다.”고.
꽤 어려운 이 책은 김태성이 우리말로 번역했다. <딩씨 마을의 꿈>,<인민을 위해 복무하라>,<번화> 등 수많은 중문서적을 번역한 실력가이다.
▶귀신들의 땅(鬼地方) ▶지은이:천쓰홍(陳思宏) 옮긴이:김태성 ▶민음사/2023.12.29 ▶504쪽 18,0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