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의 페드로 알모도바르 감독에게 거장이라는 타이틀이 붙은 것은 꽤 오래 된다. 알모도바르 감독의 자전적 이야기를 담았다는 신작 <페인 앤 글로리>(Dolor y gloria)가 개봉되었다. 92회 아카데미시상식에서 스페인영화로 외국어영화상 후보에 <기생충>과 나란히 올랐다. <기생충>이 칸에서 작품상(황금종려상)을 받을 때 <페인 앤 글로리>의 주인공 안토니오 반데라스가 남우주연상을 수상했었다. 영화는 무척 오랜만에 돌아온 왕년의 영화감독이 자신의 삶을 회상하는 형태이다. 무엇이 자신을 영화감독으로 이끌었는지, 어떤 일로 창작의 열정이 불타올랐는지, 그리고 무엇 때문에 지난 30년간 활동을 중단했는지를 들려준다.
영화는 오래 전 개울가에서 빨래하는 아낙들을 보여준다. 아이를 업고 있는 여성이 주인공의 엄마 하신타(페넬로페 크루즈)이다. 그 소년이 자라 명감독이 될 것이다. 이제 60대가 된 그 감독, 살바도르 마요(안토니오 반데라스)는 현재 극심한 불면증에 시달리고 있다. 영상자료원에서 그의 32년 전 작품 ‘맛’을 리마스터링해서 상영하는 행사를 준비하였고, 감독에게 GV참석을 부탁한다. 살바도르 감독으로서는 기억하기 싫은 사연이 있는 작품이다. 작품 해석을 두고 주연배우 알베르토(아시에르 엑센디아)와 심하게 싸웠고, 이후 연락을 끊었던 사이이다. 오랜 시간이 지나면서 감독의 생각이 바뀐 모양이다. 작품에 대해서, 혹은 작품 속 배우의 연기에 대해서 말이다. 다시 만난 두 사람은 ‘헤로인’에 의탁하여 과거지사를 해소한다. 배우는 감독의 컴퓨터에 저장된 이야기에 매료된다. 연극무대로 올리고 싶어한다. 그 작품에는 감독의 과거가 고스란히 투영되어 있었다.
"내 어린 시절의 영화란 암모니아 냄새와 자스민 향기, 한여름의 산들바람이었다"
영화는 쥬세페 토르나토레 감독의 <시네마천국>의 감흥을 떠올리게 한다. 아련했던 어린 시절과 사랑의 성홍열, 그리고 다 자란 뒤의 애틋함과 안타까움이 속속들이 녹아있다. 감독은 첫사랑의 아픔을 잊기 위해 글을 썼고, 영화를 찍었고, 영화 때문에 물러선다. 이야기가 진행되면서 감독의 영특하고, 예민한, 섬세한 소년시절을 따라가게 되고, 햇살 가득한 ‘옥탑방’에서 그 뜨거운 여름날을 맞이하게 된다.
영화 제목 <페인 앤 글로리>는 왕년의 영화감독의 현재이다. 육신은 나이 들어 고통으로 가득하고, 그 고통을 기반으로 한 영광은 찬란하다. 이 영화가 감독의 자전적인 이야기라고 하는데 실제 어디까지가 그러한지는 모르겠다. 어린 시절 한없이 투명하고 섬세한 눈동자와 나이 들어서의 보이는 우수의 눈빛이 삶의 곡절과 예술의 무게를 더하며 이야기에 완전히 빠져들게 만든다.
살바도르 감독의 청년시절 열정에는 페데리코(레오나르도 스바라글리아)가 있었다면, 그의 삶의 방향을 결정지은 것은 유리같이 깨지기 쉬운 어린 시절, 문득 바라본 그 여름날 청년 에두아르도(세사르 빈센테)의 눈부신 나신이었을 것이다. 아마도, 극장을 나오며 고개를 갸웃하게 되는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영화는 소년의 감성을 놓치지 않고, 청년의 열정을 기억하며, 노년의 안타까움을 꼭꼭 삼킨다. 2020년 2월 5일 개봉/ 청소년관람불가 (KBS미디어 박재환)
[사진 = 영화 '페인 앤 글로리' 스틸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