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무로 연기의 신(神), 이병헌이 연기인생에 처음으로 재난영화에 출연했다. 백두산 화산폭발에 이은 한반도 재난을 막기 위한 ‘남북합작’ 군사작전을 펼치는 북한사람을 연기한다. 변함없이 빨려 들어가는 눈빛 연기와 허를 찌르는 코믹연기를 만끽할 수 있다. 영화 <백두산>이 개봉된 다음날 미국 아카데미 회원인 이병헌을 만나 ‘세계 속의 한국영화’에 대해 들어보았다.
- 영화를 보고 나니 어떤가.
“눈앞에서 펼쳐지는 것이 반 이상이 CG인 영화이다. 나도 관객이 된 것처럼 영화를 보니 굉장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언론시사회가 있던 날 16개관에서 지인시사회가 있었는데 다들 재밌게 보셨다고 이야기하시더라. 눈빛과 어감으로 보아 정말 재밌게 보신 것 같더라. 다행이다.”
-시나리오에서 특별히 마음이 갔던 지점이 있다면.
“정치적인 부분이나 이준평-조인창-미군-중국요원이 맞닥치는 부분이 유치하게 보일 수 있겠더라. 그런 지점에 대해 감독님과 이야기를 많이 나눴다. 그 부분은 좀 더 갈 수도 있지만 대사를 좀 정리해 줄 수 있는 부분이 있었다. 난 그렇게 많이 나가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의견을 드렸다. 이 영화는 오락영화이고 굳이 메시지를 주려고 애쓸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뉘앙스만 풍겨도 되는 오락영화이다. 상업영화이고, 스케일이 큰 재난영화이니.”
- 완성된 CG는 만족스러운지.
“언론시사회 열리기 이틀 전에 CG작업을 끝낼 수 있었다고 하더라. 겸손의 말씀이겠지만 감독님은 며칠만 더 여유가 있었으면 좋았겠다고 하더라. 개봉날짜는 정해져 있으니. 촬영이 끝나고 나서 정말 많은 사람들이 몇 개월씩 후반작업에 매달린 결과물이다.”
- 스케일은 큰데, 재난영화와 북한 사람이 등장하는 영화가 보여주는 전형적인 이야기라는 지적이 있다.
“상업영화에서, 재난오락영화의 경우에는 그 공식이란 것이 헐리우드 같을 수밖에 없다. 클리세 덩어리다. 다음 장면이 예상 가능한, 많이 본 이야기이라는 것은 어느 정도 감수해야 되는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예측을 하더라도 더 놀랄만한 비주얼을 보여드리고 싶은 게 이 영화이다. 재미도 있다. 유머도 있고 감동도 있다. 물론, 아쉬움은 언제나 있다.”
- <공동경비구역JSA>에서도 남북대치의 중심인물을 연기했었다.
“그런 지점이 있다. 적과의 동침 같은 느낌. 남과 북이 서로 적으로 만나 점점 가까워진다. 남한 군인을 하다가 이번에 북한 쪽 첩자이다. 이런 것은 배우들만이 할 수 있는 다양한 경험이다. 하정우와 둘이 펼친 버디 플레이가 재미있다.”
<공동경비구역JSA> 이야기가 나온 김에. 최근 KBS에서 한국영화100년을 맞아 한국영화걸작 12편을 매주 금요일 밤에 방송했다. 공동경비구역JSA도 그 열두 편에 포함되어 지난 13일 방송되었었다. 그 영화 찍을 때 기억이 나는지 물어보았다.
“매일 밤 숙소에서 맥주 마셨던 기억이 난다. 진짜 매일 송강호, 김태우, 신하균, 그리고 박찬욱 감독이랑 다섯이 방에 앉아서 술 마셨다. 그 자리가 많은 도움이 되었고 생산적이었다. 촬영 끝나면 매일 술 마시면 항상 그 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했었다. 다음 촬영에 대해서. 다들 영화에 대한 열정, 애정이 끓어올랐었다. 그 에너지가 좋았던 것 같다.”
● 눈빛 연기의 비결
- 배우 이병헌 하면 관객을 매료시키는 눈빛 연기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다. 어떻게 연기하나?
“안약을 좋은 것 씁니다.(웃음) 기본적인 이야기를 하자면 내면의 상태를 (작품이 필요한 그런) 감정으로 만들어가는 것이 중요하다. 나도 사람이니 100프로까지는 안되겠지만 그 감정에 최대한 가까이 가려고 현장에서 발버둥 친다. 그렇게 노력하면 눈빛이든 얼굴의 표정이든, 자연스레 딸려 나오는 것 같다. 껍데기를 먼저 바꿀 수는 없는 작업이다. 영혼을 담으려 한다.”
- 현장에선 이병헌 배우가 스탭과 배우들과 농담하고 웃다가도 카메라 돌아가면 순간적으로 몰입하다고 하더라. 감정유지는 어떻게 하나.
“그건 아니다. 겉으론 돌변이라고 하겠지만, 레벨을 유지하려고 엄청 노력한다. 그렇지 않으면 어떻게 감정을 조절할 수가 있겠는가.”
- 이준평 캐릭터에 대해
“이준평은 자신의 모습을 안 보여준다. 처음 화면에 등장하고는 목포 사투리를 한다. 그리고 러시아말도 하고. 종잡을 수 없는 사람이다. 날카롭고 날이 선 듯 하면서도 인간적인 면모도 보여준다. 그러다가 언뜻언뜻 과거가 흘러나온다. 아내와 만나고 딸과 조우하고. 감추려고 하면서도 조금씩 드러나는 과정을 통해 관객들은 저 사람 뭐지 하고 캐릭터에 빠져든다.”
이병헌이 한 러시아말은 ‘말을 믿지 말고 그 행동을 믿어라’ 그런 의미란다.
- 전도연과 오랜만에 호흡을 맞췄다.
“너무 순조롭게 촬영했다. 아주 어려운 장면이다. 이전에 같이 작업한 적이 있어서 따로 뭔가를 맞출 필요가 없을 정도로 순조로웠다.”
- 영화를 고르는 데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재미가 제일 중요하죠. 나도 영화를 볼 때 재미가 있어야하니. 재미라는 것은 여러 형태이다. <그것만이 내 세상>의 유머코드나 슬픔도 내겐 재미로 다가왔다. <남한산성>에서는 실재했던 역사적인 두 인물이 치밀하게 대립하는 장면들이 내게 재미로 다가왔었다. 그 슬픔과 감동이 말이다.”
- 그럼 <백두산>의 재미는 무엇인가.
“비주얼 측면에서 보자면 늘 있던, 보아온 공간인 강남의 대로가 무너져 내리는 것을 볼 수 있다. 백두산 천지에 용암이 뿜어져 나오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런 비주얼적 재미에 더해 버디 무비의 독특한 재미가 있다. 버디와 재난이 합쳐지는 건 흔치 않다. 그런 게 나의 재미이다.”면서 “흥행은 모른다. 내가 재미있는 것을 관객들도 같이 재미있어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 하정우와 ‘말 줄임’ 개그를 펼치는 장면이 있다. 그런 트랜드를 좋아하나?
(고개를 절래 절래 흔들며) “그런 것 진짜 몰라요”
-하정우와의 연기 호흡은?
“어느 정도 서로의 성격은 파악하고 있다. 하정우 특유의 유머, 센스와 재치는 다 알 것이다. 기대한 만큼 카메라 앞에서 주어진 대사를 재밌고, 맛깔나게, 아주 유머러스하게 펼쳤다. 애드립도 잘한다.”
- 하정우와 연기해보니 어땠나.
“이번에 함께 촬영하면서 안 사실인데 하정우는 매 컷이 끝나면 잠깐이라고 나가서 걷거나 뛰더라. 그게 특이했다. 촬영을 여름에 했었는데 세트 안은 에어컨을 켜놓아 조금 쌀쌀했다. 코트를 입기도 했다. 그런데 하정우는 반팔이나 민소매에 땀을 뻘뻘 흘리더라. 자연 땀이다. 분장한 땀이었는데 말이다.”
- 이병헌의 연기세계에서 기폭제가 된 영화가 있다면?
“<달콤한 인생>(김지운 감독,2005) 같다. 그 작품을 통해 처음으로 외국 영화계에 알려지기 시작한 것 같다. 그 작품을 통해 미국에 에이전시도 생겼고 말이다. 작품적으로도 느와르 캐릭터의 매니아들이 생기게 된 계기가 된 작품같다.”
- 재난영화는 처음이다.
“재난영화라고 다른 영화와 크게 다르진 않았다. <지.아이.조2>(2013)에서도 블루 스크린 앞에서 상상으로 연기한 적도 있다. <터미네이터 제니시스>(2015)에서도 비슷한 경험이 있다. 배경이 바뀌는 것이 아니고 몸동작이 바뀐다. 그런 CG를 상상하며 손동작 연기를 한다. 재난영화에서의 특별한 점이라면 지진이 일어났을 경우 몸이 얼마나 움직여야 하는지 계산을 잘 해야 한다. 버스가 반으로 잘려나가는 장면에서는 그 안에서 어떻게 움직여야 리얼하게 보일지 생각하며 연기를 펼쳤다. 같은 타이밍에 움직여야하는데 그런 게 힘들더라.”
- 미국 예술과학아카데미 회원이다. 시상식에도 참석했었다. 투표는 해 봤는지. 어떻게 진행되는지.
“회원 된 지는 몇 년 되었는데 한 번도 투표를 해본 적이 없다. 회원이 되고 나서는 아카데미에 출품된 작품들이 DVD로 수십 번에 걸쳐 내게로 온다. 그걸 다 보고 결정을 해야 된다. 문제는 외국에 사니 시간도 없고. 그리고 무엇보다 서브타이틀(자막)이 없다. 특히나 외국영화상 부문에서는 못 알아듣는 경우는 그림만 보게 된다.”
이병헌은 2016년에 열린 88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최우수외국어작품상 시상자로 무대에 올랐었다. 그해 외국어상은 헝가리 영화 <사울의 아들>(감독 라즐로 네메스)에 돌아갔었다.
- 아카데미 시상식 무대 좀 소개해 달라.
“리허설 때를 생각해보면, 방송시작하기 전에 파티를 펼친다. 로비에 큰 바가 있고. 술이 계속 나왔다. 턱시도와 드레스로 한껏 차려 입은 상태에서 분위기를 업 시킨다. 기분 좋게 해피한 오스카 파티를 시작하는 것이다. 자유롭게 즐긴다는 느낌이 들도록.”
“아, 특이했던 것은 관객석에 영화인들이 빼곡하게 앉아 있잖은가. 시상자나 수상자 후보가 앉아있다. 그런데 그 사람들 대타가 있다. 화장실에 가거나, 시상을 다음 위해 자리를 비울 때 그 빈자리를 채우는 대역이 다 있다. 그게 좀 특이했다.”
- 또 언제 할리우드 작품에서 만날 수 있나.
“출연을 고민하다가 놓친 경우도 있다. 고민고민 하다가 결정하려며 좋은 한국 작품을 만나게 되고. 섭외가 오지만 스케줄을 맞추기가 어렵다. 내년, 내후년 중반까지 스케줄이 정해져있다.”
- 끊임없이 일을 한다.
“그만 했으면 좋겠어요.(웃음) 배우든 감독이든 작품을 하게 되면 몇 개월 동안 열정을 쏟아 붓는다. 그러면 내 안에서 뭔가가 소진된다는 느낌이 든다. 에너지도 새로 채우고 싶고, 이전 이야기 속의 나, 캐릭터를 털어내고 싶다. 그런 과정이 지나면 다음번, 새로운 작품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는 것이다. 충분히 에너지를 채우고 말이다. 이렇게 텀을 가지는 것이 이상적인데 작품이란 게 그렇지 않다. 스케줄이 말이다. 의지와는 상관없이 하게 되는 것도 있고.”
- <남산의 부장>(감독 우민호)이 개봉한다.
“개봉 시기는 나의 의지와는 상관없다. <남산의 부장>을 먼저 찍었으니 먼저 개봉해야할 것인데. 스케줄로 보자면 올 가을에 개봉할 수도 있었다. 어쨌든 <백두산>을 먼저 개봉하게 되었네요.”
-어떤 배우로 인식되고 싶나
“롤 모델이거나, 어떤 위대한 배우의 삶을 생각하기 보다는 내 자신이 나이 들어가면서 어떻게 변해갈까 궁금하다. 새로운 작품을 찍는다고 했을 때 사람들이 재미있겠다고 기대를 할 수 있는 그런 배우가 되고 싶다. 사람들이 살아가는 데는 곡선이 있을 것이다. 그 곡선이 얼마나 길게 늘어지느냐, 급격하게 떨어지느냐가 문제일 것이다. 길게 길게. 오래가는 배우가 되고 싶다.”
- 최근 SNS에 열심이라고 하는데.
“예전에 할리우드영화에 출연할 때 홍보차원에서 권유를 많이 하더라. 그 때는 왠지 에너지를 분산시키는 것 같았다. 필요성도 못 느꼈고. 기왕 시작한 것 재밌게, 사람들이 잠깐 웃으실 수 있었으면 좋겠다. 내가 본 영화도 추천할 수 있고 내 영화도 홍보할 수 있는 것 같다.”
이병헌의 <백두산>은 지난 19일 개봉되어 어제(26일)까지 454만 명의 관객을 불러 모았다. 이병헌은 곧 <남산의 부장들>에서 다시 만나게 된다. 1979년 대통령을 암살하는 중앙정보부장 역할이란다. 어쨌든 이병헌은 충무로의 최종병기인 셈이다. (KBS미디어 박재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