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 끔찍하다. 두고두고 회자될 듯하다. 대사를 거의 읽는 수준이었다. 그 때 연기는 정말 다시는 못 봐주겠다. 완전 발연기였어요.”
데뷔 초, 단역으로 출연했던 영화 <와니와 준하>(2001)를 떠올리며 이정은 배우가 던진 말이다. 무작정 연기가 좋아 연극판에 뛰어들었고, 오랫동안 무명의 배우로 남아야 했던 중년 여배우의 속사정이 느껴지는 듯하다.
이정은 배우는 올해 영화 <기생충>에서의 문광과 드라마 <동백꽃 필 무렵>의 정숙 캐릭터로 인지도가 급상승했다. 가만히 돌이켜보면 ‘눈이 부시게’에서도, ‘미스터 션샤인’에서도, ‘타인은 지옥이다’에서도 볼 수 있었던 배우이다. 알게 모르게 더 많은 영화에서 ‘단역’출연 했었다. 1991년 연극으로 데뷔한 이래 최근 들어 이름을 날리고 있다. 그런 이정은 배우를 만나 ‘짧지 않은 연기 인생’에 대해 들어보았다.
라운드 인터뷰가 시작되기 전, 카페 한쪽에서는 연신 카메라 플래쉬 터지는 소리가 들렸다. 이날 사진기자도 꽤 많이 왔다. 그만큼 각 매체에 ‘이정은 공식사진’이 없었던 모양이다.
자리에 앉자마자 기자에게 “식사는 하셨어요? 전 안 먹으면 안돼요.”라고 말문을 연다. “(사진 찍기가) 아직 어색해요. 팔을 어디다 둬야할지 모르겠어요.”란다. 그리고는 1시간동안 거리낌 없이, 속사포같이, 무대 위에 오른 한 많은 캐릭터처럼 이야기를 펼치기 시작했다. 이른바 곧 ‘인생 5학년’이 되는 여배우의 여유이다.
- 요즘 알아보는 사람들이 많아졌을 것 같다.
“지하철 타면 날 알아보고 폰카 찍는 소리가 난다. 살을 빼야겠다.”며 “지금이 완전 황금기다. 영화흥행도 되고. 시청자가 많이 사랑해주셔서. 그런데 운이 있는 사람보다 운이 있는 사람 옆에 있는 것 같은 기분. 내가 지금 그런 것 아닐까.”라고 솔직하게 말한다.
- ‘동백꽃 필 무렵’은 어떻게 연기하게 되었나.
“(정숙이의) 전사를 모두 알고 연기를 한 건 아니었다. 짐작으로 연기를 시작했다. 뭔가를 마지막으로 해주고 싶다는 게 있다는 것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갔다. 퍼즐처럼 맞춰질 때 쾌감은 작가님이 계획하신 것 같다.”고 사연 많은 동백 엄마를 연기한 소감을 밝혔다.
- 정숙의 정체가 처음에는 수상했다.
“‘기생충’에서 역할이 무서웠는지 ‘공포 효과’를 걱정했다. ‘타인은 지옥이다’(OCN드라마)에서의 연기 때문일 수도 있다. 신경이 쓰였다. 제가 중간에 등장하니까 ‘까불이’ 아니냐, 사기꾼 아니냐며 의심을 많이 하시더라. 사실 배우입장에서는 그런 역을 하고픈 욕심이 있긴 하다.”
- 드라마 ‘동백꽃 필 무렵’은 어떤 드라마인가.
“‘나랑 7년 3개월 어땠는데’ 물었을 때 ‘나한테는 적금 타는 것 같았어’라는 대사가 가장 와 닿았다. 자기가 낳은 자식에 대해 어떻게 책임을 져야하는지 이야기하는 것 같다. 드라마에는 많은 엄마가 등장한다. 다음 세대를 대하는 어른들의 자세를 보여준 것 같다. 애를 버리고 가는 미혼모 이야기는 신문에서만 봤는데 이 작품을 통해 가슴으로 이해하게 된 것 같다.”
"내 이름은 이정은"
이정은 배우가 연기에 발을 들인 것은 꽤 오래되었지만 시청자의 주목을 받은 것은 불과 몇 년 사이이다. ‘오 나의 귀신님’(2015)에서 점쟁이 역할을 맡아 강한 인상을 남겼고, ‘미스터 션샤인’에 출연하면서 시청자들이 그 이름을 기억하기 시작했다. 그야말로 황금기를 구가하는 듯하다. 올해 상복도 쏟아졌다. JTBC드라마 ‘눈이 부시게’로 백상예술대상 TV부문 여자조연상을 받았고, 칸 황금종려상에 빛나는‘기생충’에서의 빛나는 문광 역으로 춘사영화상, 부일영화상, 청룡영화상 여주조연상을 수상했다. 앞으로 얼마나 더 많은 트로피를 수집하게 될까.
“연극하며 상을 받았을 때 언제 또 상을 받을 수 있을까 생각했었다. 저도 얄팍한지라 조금 더 일찍 두각을 나타냈다면 자만했을 것 같다. 그런 영광을 잊으려고 상은 어머니 댁에 갖다 둔다. 인간이 간사해서 상을 진열해놓고 그 앞에서 대본을 보는 게 부담스럽더라.”면서 “근데 주신다면 받아야죠.”라고 덧붙인다.
(이정은 배우는 인터뷰 말미에 동백꽃 수상가능성에 묻자, “수상은 천천히, 그래야 목표가 생기죠.”라고 다시 답변한다)
이정은은 아직 독신이다. 아무렇지도 않은 듯 대답한다. “45살 이후로 연애를 못하고 있다. 절대 비혼주의자는 아니다”며 “지금은 연애보다는 일에 에너지를 쏟아야 하는 시기인 것 같다. 사랑을 제외하고 모든 면에서 안정기다.”고 자신한다.
- 그럼, 연기 말고의 일상은?
“산책을 통해 힐링을 얻는다. 지금 키우고 있는 유기견 두 마리를 데리고. 친한 동료와 한강변을 걷는다. 김수진과 동효희와 친하다. 이들과 가끔 술도 마신다. 나이를 먹으니 서로 운동할 수 있는 곳에서 만나게 되더라.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고 나면, 운동이 힘들어서 걱정 같은 것은 싹 사라진다.”
이정은의 내년 일정까지 연기스케줄이 꽉 차 있다고. “지금처럼 많이 소비되면 쉬어야 할 때가 온다. 연기자라면 감내해야한다. 그건 연극판에서도 느꼈던 것이다. 산책 많이 하고, 생각을 잘 정리해 내년도 잘 보낼 것이다”고 다짐한다.
● 영화 <기생충> 이야기
“‘기생충’ 전에는 장르물을 찍은 적이 없었다. 생활 대사가 많은 작품에만 출연했었다. 문광을 찍으면서 귀엽다는 생각을 했었다. 그런데 관객들이 무서워하는 것은 상황이 그렇게 만들어주는 것이다. 분명 웃고 있는데 저 뒤에 칼은 없을까 이렇게 상상을 하니까. (봉준호) 감독님이 계획이 다 있으셨던 것 같다.“
이정은 감독은 ‘기생충’뿐만 아니라 ‘마더’(2009)와 ‘옥자’(2017)에도 나왔다. 단역이었지만 봉준호 감독 작품에 연거푸 출연한 배우이다. 기생충에서의 ‘문광’이름에 대해 물어보았다.
“감독님이 디테일한 힌트를 주시진 않았다. 달(Moon)에, 미칠 광. 달빛 아래 미친 사람 같은 캐릭터라고 생각했다. 영화 시작하고 한 시간 정도 있다 등장한다. 누군가 ‘문을 여니 빛이 보였다’고 해석하기도 하더라.”며 “봉준호 감독은 정말 천재이다. 영감이 번쩍인다. 그리고, 말도 얼마나 잘 하는지.”라고 덧붙인다.
이날 이정은 배우는 적극적으로 자신의 가정사(?)를 밝혔다. 단역배우로 전전하는 연기를 하느라 아르바이트도 많이 했다고 말했는데 그것 때문에 대중들이 자신을 오해하는 것 같다면서. "저희 집은 절대 가난하지 않았다. 집안이 가난해서가 아니라, 부모님은 내가 연기하는 것을 원하지 않아 서포팅해 주지 않았을 뿐이다. 그래서 나 혼자 집을 나와서, 무일푼으로 시작한 것뿐이다. 나와서 살다보니, 연극을 하며 아르바이트를 했다. 연기를 가르치는 시간강사도 했다.“
그러다가 결심했다고. “연기를 가르치는 일을 포기해야만 연기를 더 잘 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간을 이렇게 쪼개면 안 될 것 같더라. 방법을 찾았다.”
무명시절을 같이한 동료 중에는 황석정이 있다. “황석정의 연기는 따라갈 수가 없다. <햄릿>할 때 천국과 지옥의 감정묘사를 할 때 졸도를 하더라. 그런 사람 앞에서 내가 무슨 연기를..”
무명시절을 보내며 사람이 남는다는 이야기를 하다 연극 <에덴미용실>(2017) 이야기가 나왔다. “추민주(극본 및 연출)와는 ‘빨래’때부터 같이 작업을 한 동지라 코가 꿰어 출연한 것이다. 연락이 오면 같이 하려고 노력한다. 지금은 긴 창작의 길에 들어갔기에 언제 할 수 있을진 모르겠다. 사실 ‘에덴미용실’에서는 손님 중 한 명으로 잠깐 나오기로 했었는데 배역이 ‘빵구’가 나는 바람에 내가 나온 것이다. 미용실 연기를 한 것이 ‘눈이 부시게’에 도움이 되었다. 다른 인물을 창조하는데 도움이 되었던 작품이다.”
● 드라마 <동백꽃 필 무렵>
- 임상춘 작가에 대해서는.
“‘7년 3개월이 어땠느냐했을 때 적금 탄 것 같다고 말하는 장면, 그 부분을 처음 읽었을 때 작가님이 정말 글을 잘 쓰신다고 생각했다. 모든 게 장치이고, 계획이고, 작가의 필력이다.”
이 배우는 임상춘 작가가 쓴 ‘쌈, 마이웨이’에도 출연했었다. “난 6부에 처음 등장한다. 이번 동백꽃에서도 6부(10회)에 등장한다”며, “찬찬히 첫 회부터 보는데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등장하면서 시청률 떨어지면 어쩌나. 난 죽음이다 생각했다.”
- 강하늘의 연기는 어땠나.
“강하늘과는 뮤지컬 ‘어쌔신’(2012)에 같이 출연했었다. 그의 인품이 어떤지 너무 잘 알고 있다. 부모님에게 교육 잘 받은 아들 같다. 생각 같아선 사위 삼고 싶다. 그런 남자가 세상에 또 있을까요.”라며 “근데 그 친구를 바르게만 봤었는데 용식이 연기하는 것 봐라. 군대 갔다 와서 변한 모습. 어찌 그렇게 능글능글하고, 사람 비위 잘 맞추는 연기를 실감나게 하는지. 생각도 못했다.”
- 필구 역의 김강현은?
“‘기생충’에서의 정현준처럼 카메라 돌아가는 것을 직감적으로 아는 천재다. 방송계에서는 필구가 그런 천재다. 시청자를 울리고 웃기는 아역배우가 아니라 그냥 배우다. 먹기도 잘 먹는다. 키가 클 것 같다. 떡볶이 먹는 연기할 때 절대 굴하지 않더라. 다 먹는다. <미스터 션샤인> 때보다 훨씬 많이 컸다. 강훈이는 이름을 날리는 배우가 될 것이다. 요대로만 커준다면, 그때는 난 할머니하고 있겠죠.”
- 임상춘 작가가 여자냐 남자냐는 질문이 있었다.
“여자분이시다. 작고 귀엽게 생기셨다. 박보영 스타일로. 이름에 신기가 있는 것 느낌 안 들어요. 무당처럼.”
- 부모님이 연기하는 것 반대하셨나?
- “특별히 반대는 안 하셨다. 과년한 딸이 빌빌거리고 짜증나겠죠. 그래서 화가 나서 집을 나온 것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집에서 먹고, 자고 연기할 수 있었을 텐데 왜 내가 나갔을까. 학교 다닐 때 공부 꽤 잘했다. 상도 많이 받았고. 지금은 연기로 상을 많이 받으니 좋다.”며 “부모님도 자식이 잘 나가서 좋아하는 게 아니라, 자기가 자기 일을 책임지고 미래를 설계할 때 좋아하는 것 같다. 어쨌든 난 돌아온 탕아라도 된 것 같다.”
- 이 드라마보고 부모님께 전화 드리게 되는 작품이라는 평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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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혀 없다. 생각할 틈이 없었다. 너무 바빴던 것 같다. 이제 여유가 생겼으니, 가족여행을 갈 생각이다. 열흘 정도” (소속사에서 두 달간 휴가를 주었단다. 물론, 연말 시상식에는 참석할 것이라고)
이정은 배우의 ‘종횡무진’한 활약을 2020년에도 기대한다. (KBS미디어 박재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