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의 대문호 윌리엄 셰익스피어가 1599년경 쓴 것으로 추정되는 희곡 <헨리 5세>를 바탕으로 하는 영화는 이미 두 편의 걸출한 작품이 세상에 나와 있다. 2차 대전 말기, 전시 체제의 영국민에게 애국심을 불러일으키기 위해 만든 로렌스 올리비에 감독/주연의 클래식 <헨리 5세>(1944)와 역시 영국출신의 배우 케네스 브래너의 혁신적인 세익스피어극 <헨리5세>이다. 이 두 작품은 곧 넷플릭스를 통해 공개될 티모시 샬라메 주연의 <더 킹: 헨리 5세>와 달리 세익스피어 원작에 충실하다. 특히 케네스 브래너 작품은 더욱 그러하다.
‘헨리 5세’와 세익스피어
(나중에 ‘헨리5세’가 되는) ‘할’은 1386년 헨리 오브 볼링브룩(헨리 4세)의 큰아들로 태어나서, 웨일스 공이 되었고 아버지가 죽자 1413년 왕위에 오른다. 당시 머리에 씌워진 왕관의 무게는 잉글랜드의 국왕이며, 아일랜드의 영주이며, (프랑스에 있는) 아키텐의 공작이다.
랭카스터의 공작이었던 아버지 볼링브룩은 (사촌인) 리처드 2세가 런던을 비운 사이 왕위를 찬탈하고는 헨리 4세가 된 것이다. 왕위에 오르기까지 귀족의 도움을 받았기에, 왕위를 찬탈했다는 죄책감에 시달린다. 아들은 그런 아버지 밑에서 군사를 이끌고 반란을 진압하는 등 제왕의 자질을 보여주었고, 그것 때문에 부왕과의 알력도 있었다. 세익스피어는 ‘헨리 5세’를 드라마틱하게 왕좌에 올린다. 젊은 시절의 ‘할’은 존 폴스타프라는 난봉꾼과 어울리며 술집을 전전하며 방탕한 세월을 보내는 것으로 묘사된다. 그러다가, 아버지가 죽고 왕위를 이어받자, 어느 순간 개과천선한, 혹은 용의주도하게 왕위를 준비한 젊은 개명군주처럼 행동한다. 왕궁의 의심스런 작자들-귀족들, 성직자들-의 배신과 (젊은 시절의 방황에 대한) 경멸 등의 눈초리를 일거에 제압하고, 프랑스와 일전을 치르게 된다.
세익스피어는 <헨리 5세>에서 왕이 어떻게 군사를 이끌고 프랑스 땅에 발을 디딘 후 하플뢰르 성과 아쟁쿠르(애진코트,Battle of Agincourt)에서 프랑스군을 격멸하는지를 보여준다. 물론, 셰익스피어는 연극무대에 올리는 ‘대본’을 쓴 작가이기에 보여주는 이야기는 순전히 장엄한 나래이션과 몇몇 무대 위 배우들의 과장된 제스처로 전달될 것이다. 그러니, 왕궁의 화려함도, 귀족들의 뺀질거림도, 아쟁쿠르의 아비규환도 바랄 것은 없다. 대신, 언어의 연금술사 셰익스피어는 헨리5세의 용맹함을 글자 하나하나, 대사 하나하나에 녹여낸다.
영민한 케네스 브래너
케니스 브래너 감독은 세익스피어와 로렌스 올리비에가 쌓아올린 찬란한 <헨리 5세>에 다시 한 번 도전한다. 영국 왕립 셰익스피어극단에서 활동하던 그는 29살에 이 영화를 만든다. 감독 데뷔작이자, 주인공 헨리5세 역을 직접 해낸다. 그는 세익스피어의 장엄함과 영화적 재미를 완벽하게 결합시킨다. 물론, <브레이브 하트>이후 쏟아지는 블록버스터의 기풍을 기대하지는 마시라. 기본적으로 세익스피어극은 대사와 배우들의 진지함으로 완성되는 서사극이니 말이다.
넷플릭스 ‘더 킹’에서 ‘할’과 함께 맹활약을 하는 ‘폴스타프’ 캐릭터는 원래 세익스피어의 또 다른 희곡 ‘헨리4’(1부,2부)에 비호감 인물로 등장한다. ‘헨리5세’에서는 ‘할’왕세자가 왕위에 오를 때 런던의 더러운 여관방에서 죽어가는 모습이 그를 따르는 무리의 대사로 잠깐 등장할 뿐이다.
아마도 케네서 브래너의 <헨리 5세>를 보면서 제일 궁금한 것은 ‘폴스타프’란 존재여부보다는 프랑스 공주 캐서린의 대사일 것이다. 헨리5세는 프랑스어를 모르고, 공주는 영어를 모른다. 이제 프랑스를 접수한 헨리5세는 ‘전리품’으로 프랑스 공주를 얻고 로맨틱하게 프로포즈를 하게 된다. 삶과 죽음이 희롱하는 전쟁, 국가적/민족적 자부심과 자존감이 걸려있는 이야기에서 두 남녀의 혼담 장면은 기이하기까지 하다. 특히, 전세가 기울 때 캐서린 공주는 시녀에게서 몇 마디 영어 단어를 배우는 장면이 있다. ‘왓차플레이’에 올라온 자막은 불친절하기 그지없다. 세익스피어 희곡에도 그 장면이 실제 나온다. 귀엽다. (실제, 헨리 5세 역의 케네스 브래너와 캐서린 역의 1989년 결혼했다. 물론, 이후 헤어진다.)
이 영화는 이제는 보기 어려워진 중후하고도, 장엄한, 우아하고도, 치열한, 그러면서도 인문학적 아우라가 물씬 풍기는 셰익스피어의 무게감을 고스란히 전해준다. (KBS미디어 박재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