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시가)문학에서 '비'는 주요한 소재로 쓰인다. 추적추적 내리는 비는 망향가를 불러일으키기도 하고, 첫사랑의 추억을 떠올리게 한다. 수호전에는 송강을 일러 '급시우'(及時雨)라 했다. 도움이 필요할 때, 딱 때를 맞춰 적절하게 등장하는 요긴한 인물이란 뜻이다. 두보는 ‘호우시절’(好雨知時節)에서 “좋은 비는 때를 알고 내리는 비”라고 읊었다. 농업사회에서는 비가 내려야할 때와 그 양을 생각한다면 합당한 의미가 떠오를 것이다.
최근 과거의 아픈 기억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사람들의 이야기, 애써 잊으려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영화로 많이 만들어지고 있다. 세월호, 성산대교 붕괴, 대구지하철 화재사건 등 국가적 재난사고를 경험한 한국인의 기억과 고통, 그리고 성장을 다룬다. 2009년에 개봉된 영화 <호우시절>(허진호 감독)은 어떤가. 이 영화는 수 만 명의 생명을 앗아간 2008년 중국 사천(쓰촨)성 원천대지진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물론, 영화는 ‘힐링’보다 ‘멜로’에 가깝다.
중장비업체의 박동하 팀장(정우성)이 중국 사천성 청두(成都,청뚜)에 출장을 온다. 일상적인 출장이었다. 현지 지사장(김상호)은 서울에서 온 동하에게 현지 음식을 맛보이고, 그에게 어울릴 중국의 문화유산도 안내한다. 당나라 시인 두보가 한때 머물렀던 두보초당을 구경시켜 준다. 그런데 동하는 이곳에서 그곳에서 뜻밖에 가이드로 일하고 있는 중국 여인을 마주치게 된다. 오래 전 미국유학시절의 아련한 추억을 떠올린다.
사실 이 영화는 원천대지진과는 그다지 관계가 없는 듯하다. 한국중장비업체가 재난현장 복구에 투입되고 있다는 사실을 잠깐 보여줄 뿐이다. 대신, 관객들은 조금씩 ‘중국여인’ 고원원의 개인적인 비극을 알게 되는 것이다. 그 과정에 이르기까지 머뭇거리며 다가가는 한국남자와 중국여자의 연애담에 관심을 갖게 된다.
사천성 성도의 있는 두보초당은 대나무숲이 우거진 단아한 곳이다. 격동기 시절을 살아간 두보의 시는 지금도 읽히고 있다. 영화제목으로 쓰인 ‘호우시절’도 그러하고 말이다. 동하와 메이는 미국에서 유학할 때 알던 사이였다. 둘의 사이는 노란 자전거로 상징된다. 둘은 깊이 사귀는 사이였을까. 서로를 마음 속 연인으로 기억할까. 남자와 여자의 기억은 맴돈다. 두보의 좋은 시는 중국어도 아니고 한국어도 아닌, 영어로 이해된다.
사천성에는 삼국지와 관련된 유적이 많다. 성도에만 해도 유비의 무덤인 무후사와 유비-관우-장비를 모신 삼의사가 있다. 그 옆 골목이 그 유명한 금리거리이다. 대부분의 관광객들은 이곳에서 현지전통 길거리음식을 맛보게 된다. 동하가 맛보다가 토할 뻔한 ‘돼지내장탕’도 현지인에겐 인기메뉴. 물론, 여기 성도까지 왔다면 판다 재롱도 보고가야겠지. 영화에는 다 담겨있다.
영화에서는 한국남자 동하와 중국여자 메이의 엇갈리는, 하지만 길을 찾아가는 대사가 흥미롭다. “봄이 오면 꽃이 피는 걸까? 꽃이 펴서 봄이 오는 걸까?” 이런 식상한 질문에서도 말이다.
배우 고원원은 사천성 출신이 아니다. 베이징 출신이다. 결국 한국남자 동하와 결혼한 것이 아니라, 조우정이라는 대만남자와 결혼했다.
참, 이 영화는 CGV(아트하우스)가 가끔 진행하는 기획전의 하나로 <집으로>,<만추>와 함께 가을 극장에 내건 잔잔한 작품이다. 작은 화면에서만 보다가 스크린으로 다시 만나게 되니 반갑다. (KBS미디어 박재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