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사정권을 끝내고, ‘대망의 문민정부’로 출범한 YS는 임기 내내 ‘사고공화국’이라는 오명을 벗어나지 못했다. 오래된 부정과 비리가 대한민국 방방곡곡에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93년 기차가 탈선하고, 비행기가 추락하고, 배가 침몰하는 등 갖은 재난을 겪어야했다. 이듬해에도 대형사고는 끊이질 않았다. 88서울올림픽을 성공적으로 치른 나라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1994년 10월 21일에는 한강을 가로지르는 성수대교가 무너졌다. 아침 출근, 등교시간에 상판 하나가 내려앉았고 그 위를 달리던 차들이 낙엽처럼 푸른 한강 위로 떨어지면서 다수의 학생이 불귀의 객이 되었다. 1994년은 그렇게 대한민국에 기록된다. 그해를 특별하게 기억하는 김보라 감독이 신작 <벌새>를 통해 한국인의 삶을 들여다본다.
김보라 감독은 2011년 단편 <리코더 시험>에서는 1988년을 사는 초등학교 3학년 학생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올림픽이 열리든 말든, 엄마 아빠가 싸우든 말든, 은희는 관심사는 어떻게든 사랑을 받고 싶은 것이다. 방법은 리코더 시험에서 좋은 결과를 얻는 것. 하지만 자기의 피리는 싸구려이고, 오빠의 손찌검은 그칠 줄을 모른다.
<벌새>는 단편 ‘리코더 시험’의 연장이다. ‘1994년의 은희’(박지후)는 이제 중학생이 되었다. 떡집을 하는 아빠(정인기)는 바람이 난 것 같고, 엄마(이승연)는 그 때문에 저기압이다. 언니(박수연)는 공부를 못해 강북의 고등학교에 다닌다. 집안의 기대는 온통 오빠(손상연)에게 쏠려 있다. 은희는 공부엔 관심이 없고, 학교에선 날라리로 찍혔다. 그런 은희에게도 희망이 있을까. 한문학원의 단짝(박서윤)도, 자기 좋다고 쫓아다니는 후배(설혜인)도, 어쨌든 키스를 한 남친 지완(정윤서)도 은희의 열다섯 삶을 아름답게 채워주지는 못한다. 집안에 우환이 있고, 귀 밑엔 혹이 돋아난다. 그리고 1994년 10월 21일 된다.
28분짜리 단편에서 초등학생의 삶의 무거움(!)을 구겨 넣었던 김보라 감독은 이번 작품에서는 138분에 걸쳐 여중생이 감당해야할 인생의 무게를 싣는다.
영화는 묘하다. 은희의 삶은 당시 그 나이 또래가 으레 겪던 고난이고, 가족이라는 족쇄도 최선은 아니지만 최악보다는 훨씬 나았다. 지금 와서 보면 그 때가 온통 회색이겠지만 적어도 무채색은 아니다. 보습학원에서든, 학교 운동장에서든, 아파트 어느 공간에서든 숨 쉴 공간은 존재했고, 이야기를 나눌 친구나 따르고 싶은 인생의 우상은 존재했으니 말이다. 은희의 삶은 따라가다 보면 그 아이의 주위엔 많은 사람들이 각자 자기만의 생을 그리고 있었음을 알게 된다. 물론 중간에 연기처럼 사라지는 존재도 있지만 말이다.
1994년의 한국 모습을 지금 다시 돌아보니 우리 사회는 어느 순간부터 조금씩, 그러나 확실하게 바뀌고 있었음을 알게 된다.
아마, 김보라 감독이 ‘리코더 시험’과 ‘벌새’에 이어 또 한 번 은희에게 카메라를 들이댄다면 어떤 이야기일까. 대학생이 된 은희를 찍든, 유학을 다녀와서 훌쩍 나이든 은희를 찍든, 한국은 여전히 가족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국가적 보호라는 울타리를 실감하지 못한 채 멈칫거리는 모습을 보여줄 것은 확실해 보인다. 그때 가서도 “은희가 내적으로 성큼 성장했다”고 말할 수 있을까. <벌새>는 곱씹어볼 2019년의 발견이다. (박재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