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올림픽이 열린 1988년, 서울의 초등학교 5학년생 은희는 학교 리코더 불기 시험에서 좋은 성적을 올려 부모님으로부터 칭찬을 받고 싶어 한다. 김보라 감독의 단편 ‘리코더 시험’이다. 그리고 김 감독은 이번엔 ‘중학생 은희’를 내세워 1994년의 서울을 보여준다. 1994년 한국을 살아가는 15살 여학생 은희의 삶은 어떠했을까.
1988년을 지나 1994년을 기억에서 끄집어 낸 김보라 감독을 만나 <벌새>에서 이야기하고자하는 바를 물어보았다. 영화 <벌새>는 복도식 계단의 아파트 10층에 사는 서민 가정의 막내 딸 은희를 중심으로 세상이 은희를 어떻게 보는지, 은희가 세상을 어떻게 살아가는지 보여준다. 제목 ‘벌새’처럼 1분에 90번 이상의 날갯짓을 하는 ‘벌새’처럼 바쁘게 사는 삶을 그리고 싶어한 모양이다.
● 벌새의 집
- <벌새>의 영어제목은 ‘House of Hummingbird’이다. ‘하우스’를 추가한 이유가 있나?
“그냥 ‘Hummingbird’라고 하면 왠지 액세서리 샵 같은 느낌이 들었다. 뭔가 아쉬웠다. ‘하우스 오브’를 넣으니 시적으로 완성된 느낌이 든다. 그런데 ‘벌새의 집’이라고 하면 또 느낌이 안 살아난다. 이 영화는 어찌 보면 은희가 자신의 집을 찾아가는 여정이다. ‘집 같아 보이지 않은 집’에서 ‘자신의 집’을 찾는 것이다. 그래서 영어제목을 그렇게 붙였다.”
단편 <리코더 시험>에 등장하는 은희네 가족과 구성이 같다. 떡집(떡방앗간)을 하는 것도 같고. 감독은 인터뷰를 통해 자신의 경험이 많이 투영되었다고 밝힌 바 있다.
- 아빠, 엄마, 오빠, 언니가 있다. 오빠와 언니 중 누가 더 위인가?
“그런 질문을 많이 받았다. 언니가 더 나이가 많다. 영화에서 언니는 20대 배우가, 남자애는 고등학생이 연기했다.” (오빠는 대원외고를 진학해서 궁극적으로 서울대 입학을 꿈꾼다. 언니는 강남의 학교 떨어지고 다리 건너 강북의 고등학교에 진학한 설정이다)
- 영화 첫 장면에서 은희는 엄마 심부름을 갔다가, 자기 집을 착각한다. 한 층수 아래 집, 벨을 누르고, 엄마를 소리친다.
“그런 경험 있잖은가. 복도식 아파트에 살 때, 그렇게 한 층 잘못 올라가는 경우가 있었다. 그런 자잔한 경험이 영화에 들어있다.”
●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
- 시사회 때, 3시간 30분짜리 버전이 있었다고 이야기했는데, 정말 그런가.
“러프컷이 3시간 30분이었다. 마음에 들었던 최종편집본은 2시간 44분짜리다. 그걸 더 좋아하시는 분도 있다. 고민을 하다가 2시간 18분 편집본을 택했다. 불필요한 것을 추려내는 방식이었다. 모두의 이야기를 다 하다보면 방만해진다. 주위사람 이야기를 조금씩 줄였다. 공감할 부분이 있어서 처음엔 넣었던 것이다. 애정을 가진 캐릭터다. 좋아하는 부분을 들어내는 것은 아쉬운 일이다.”
- 그래도 독립영화 치고는 꽤 긴 편이다.
“이 영화로 해외영화제 나가보니, 내 영화보다 긴 게 없더라. 추세인 모양이다. 2시간 18분 버전을 보시고, 모자란다고 하신 분은 없었다.”
- 그럼, 어떤 부분이 최종판에서 잘렸는지 이야기해 주실 수 있는지.
“배우들에게 미안해서. 가족의 이야기이다 보니 가족신이 많이 잘린 것 같다. 그리고, 성수대교 건너는 장면이 있었다. 약간의 복선처럼 등장하는데. 그것을 잘라냈다. 완성된 영화를 보면 전혀 안 나오다가 갑작스레 나오는데, 그게 좋았다는 사람도 있었다.”
- 단편 ‘리코더 시험’에서는 88년 서울올림픽을, 그리고 이번 영화에서는 ‘월드컵’과 ‘성수대교 붕괴’ 등 몇 가지 세계사적인 사건을 언급한다. 하지만, 그런 것들이 영화의 전체 주제를 이끄는 것은 아니란 느낌이 든다.
“<리코더 시험>에서는 TV뉴스를 통해 88서울올림픽 이야기가 나온다. 그때는 우리나라가 막 세계 시장에 데뷔하는 느낌이었다. 전쟁으로 초토화된 후진국이었던 대한민국이 올림픽을 통해 전 세계에 화려하게 데뷔한다는 느낌. 하지만 은희에게는 그런 것보다는 리코더 시험에서 좋은 성적을 내야한다는 게 주요한 과제였다. 그 두 가지를 병렬해서 보여주고 싶었다. 올림픽에서 여고생 김순영이 금메달을 딴 것처럼. 은희는 자기에게 금메달을 주는 것이다. 정치적 사건이나 국가적 이벤트는 괴리감을 느낄 수도 있다. 무엇이 큰 것인지 단편에서 보여주고 싶었다.”
김 감독은 자연스레 ‘88 초등학생’이 ‘94 여중생’ 은희로 바뀌는 것에 대해 설명을 덧붙였다.
“그렇게 내 세계관이 확장되었다. <리코더 시험>을 보신 분들이 은희가 어떻게 되었을지 궁금해 하더라. 그 캐릭터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어딘가에 살아있을 것 같았다. 이 아이를 살려내고, 키워내고 싶었다.”
- 그럼 은희의 성장처럼 <벌새> 뒷이야기도 만들어지는 것인가.
“그런 생각은 없었다. <벌새> 만드는 과정이 힘들기도 했지만. 은희 이야기는 그만 하고 싶다. 하지만 사람 일이 어떻게 될지 어떻게 알겠는가. 박찬욱 감독님이 속편 만들라고 하시더라.”
- 영화에서는 “대원외고 가고, 서울대 가자”라는 대사가 나온다. 1994년 대치동의 정서인가?
“그 시절엔 그런 목표가 있었다. 유학 가는 것이 유행이었고. 미국에 대한 열망이 있었다. 초등학생이 피자 먹으면 웬지 쿨 해 보였다. 미국문화들이 들어오고, 여러 브랜드가 보급되면서 그게 계급으로 나뉘었다. 당시 대치동을 통해, 보여주고 싶었던 것이 있다. 성적을 잘 받으면 엄마가 ‘캘빈 클라인’ 사준다는 친구 이야기도 등장한다. ‘뭘 하면 이걸 줄게’ 하는 식으로. 학교에서, 사회에서, 전반적으로 만연하는 분위기가 있었다.”
김 감독은 1994년 당시 한국사회의 한 단면을 이렇게 기억한다.
“당시 학교에서 가정조사를 하면 아빠 직업, 사는 집의 평수, 무슨 자동차 타는지를 물었다. 같은 아파트라도 어느 단지에 사는지, 몇 동에 사는지에 따라 계급이 달라지는 것이었다. 대치동 사는 아이들은 개포동 사는 아이들을 무시했고. 그런 동네에 타워팰리스가 들어섰다. 그런 야만적인 삶이 일상화된 사회였다. 타워팰러스 부지가 생겼을 때. 그곳이 재개발 되면 갈 곳이 없는 사람들이 생길 텐데. 어린 나이에 그런 생각이 들었다. 영화에 붉은 색으로 ‘죽어도 나갈 수 없다’라는 격문이 나오잖은가. 한 동네에 사는데 이웃주민으로 대하지 않는다. ‘달동네에서 온 아이’라는 식으로 대한다. 야만적인 생각이다.“
자신의 경험이 많이 투영되었다는 김보라 감독이기에, 그 시절 느꼈을 인간에 대한 고민을 엿보게 한다.
-떡집(방앗간)을 한다고 놀림을 받았나?
“부모님 직업 때문에 놀림을 많이 받았다. ‘리코더 시험’이 상영되었을 때 오빠가 너무 재밌게 봤다. 자랑스럽다면서 자신도 아이들에게 놀림을 받았다고 하더라. 오빠는 공부를 잘 했는데 말이다. 그런 일들이 아이였던 나에게 무엇을 남겼을까. 인간으로서 감사하게 생각한다. 그런 기억이 사람으로 성장하는데 큰 도움이 된 것 가다. 선물이라고 말하면 좀 이상하지만, 어떤 통찰을 준 것 같다.”
- 은희네 집을 얼핏 보면 콩가루 집안 같기도 하다. 아빠는 바람 피고, 엄마는 무기력하고, 언니는 밖으로 나돌고, 오빠는 폭력적이다. 그런 모습이 그리고자한 가족의 모습은 아닐텐데.
“난 그 시대의 정상적 가족이었다고 생각한다. <벌새>를 통해 헤드라인을 장식하는 사회문제를 그리고 싶진 않았다. 야만의 시대를 살아가는 가족이야기다. 어쩌면 합리화 되는 시기의 이야기다.”
김보라 감독은 당시의 사회상에 또 언짢은 기억을 불러일으킨다.
“생각해보라. 학교에서는 체벌이 심했다. 선생님은 가위 갖고 다녔고, 학생의 뺨을 때렸다. 내가 어른이 되면 그 선생님을 이해할 줄 알았는데 이해가 안 되더라. 내가 대학생을 가르쳤는데 대학생이 된 아이도 이렇게 예쁜데 중고생들, 그 작은 아이들은 얼마나 사랑스럽고 예쁘겠나. 어떻게 때릴 수가 있나. 체벌뿐만 아니다. 성폭행, 성추행은 또 얼마나 많았나. 괴담이 만연할 수밖에. 그게 정상인 것처럼 여기던 시기를 지나온 셈이다. 그렇다고 그런 시기를 극단적으로 전시하고, 선정성을 내세우는 폭력적 영화로 보여주고 싶지는 않다. 일상의 얼굴을 하고 도사린 폭력을 보여주고 싶었다.”
- 영화에서 보여주는 가부장적 모습은 어떤가.
“가족들이 모여 밥 먹을 때, 아버지가 수저를 들어야 나머지 가족이 밥을 먹는 모습이 일반적이다. 오빠가 여동생을 때리는 것도 주변에 많았다. 그런 일 때문에 시간이 많이 지나도 여전히 오빠와 화해를 못하는 사람을 주위에서 많이 보아왔다. 영화 보시는 분들이 이건 평범한 이야기라고 공감할 것이다.”
김보라 감독은 1990년대를 산 사람으로 이야기를 이어 간다.
“애정도 있다. 은희네 가족을 비정상적으로, 악마로 그리고 싶지는 않다. 밥 먹는 장면처럼 말하지 않아도 전해주는 느낌이 있다. 엄마 아빠에게도 삶의 고뇌가 있었다. 그 시절 다들 바쁘게, 빠르게 사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 학교든 사회든, 모두가 빨리 달려가고 있었다. 선진국을 만들려고 안달인 사회였다.”
“<벌새>는 과거에 야만이라 느낀 그 어린 시절을, 성인이 되어 마음으로 보듬는 작품이고 싶었다. 그런 시스템 안에서 많이 아팠지만, 성인이 되어 껴안아주고 싶었다. 그들의 삶에서 고군분투한 가부장 같은 아빠와 오빠에 대해서도 그들의 다른 일면을 보여주고 싶었다.”
- 김새벽이 연기하는 선생님은 전형적인 운동권의 모습인가.
“내가 멋지다고 생각하는 여성의 모습은 남성성을 수행하는 것이 아니다. 그 시대 운동권이라면 마치 남자처럼 행동하는 것이 트랜드라는 것도 안다. 하지만 여성으로서 자신의 존재를 부정하지 않고, 상대를 존중하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 운동권 영지는 소수자이며 사회에 분노하는 캐릭터다. 영화를 찍으며 김새벽 배우와 줄곧 이야기한 것이 이 캐릭터는 인간에 대한 존중하는 태도가 있어야한다는 것이었다. 아마도 영화 속 ‘영지’의 모습은 내가 평소 주변에서 관찰했던 멋진 여자들을 조금씩 담은 것 같다.”
- 영화에 등장하는 노래에 대해.
“어떤 노래를 넣을 것인가 고민을 많이 했다. 연출부들이 방대한 데이터를 뽑았다. 영화에 나오는 뉴스 기사, TV프로그램, 노래 등에 대해 연출부 친구들이 꼼꼼하게 조사했다. 그리고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노래다.”
“<여러분>은 윤복희가 부른 원곡이 아니다.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파는 테이프에서 들을 수 있는 퀄리티다. 아빠가 춤 연습할 때 그걸 틀어놓는다. <사랑은 유리 같은 것>은 내가 중학교때 노래방 가면 부르는 노래였다. 가사도 좋고. 분위기도 애잔해서 잘 맞겠다 싶었다. 그리고 은희 좋다고 따라 다니던 그 후배 캐릭터 이름이 유리라서. <칵테일 사랑>의 경우는 영화가 조금 지루해지는 타임에 밝은 분위기로 전환시키고 싶었다.”
- ‘뽀리 깐다’는 말로 표현되는 ‘물건 훔치는 장면’이 들어간 이유는?
“어렸을 때 있는 일이다. 특별히 심각한 케이스는 아니고. 그런 게 영화에서 전형적일 수도 있지만 공동의 경험이기도 하다. <아메리칸 사이코>의 메리 헤론 감독이 이 영화를 보더니, 자신도 그 시절 저런 적이 있다고 이야기하더라. 보편적인, 원형적인 행위이다.”
- 무너진 (상판 일부가 붕괴된) 성수대교 장면은 CG이다. 독립영화에서 이런 장면을 보게 될 줄은 몰랐다.
“모팩에서 작업했다. 우리 영화가 독립영화라서 할인을 많이 받았다. 물론 우리 예산에서는 부담이 되었다. 퀄리티가 좋았다. 서독제(서울독립영화제)에서 이 영화가 상영될 때 영화 끝나고 관객부에게 싸인을 해 드리는데 한분이 자신이 그 장면 CG작업했다고 말하더라. 후반작업 CG작업하는 것을 직접 못 본 감독으로서 너무 반갑고, 고마웠다. 영화작업을 하며 감동적인 것은 하나의 작품을 완성시키는 데는 정말 많은 사람이 함께 한다는 것이다. 기뻤다.”
- 홍보자료에는 ‘세계영화제 25관왕’이라고 나왔다. 실제 몇 군데에 직접 참석했나.
“ 베를린, 이스탄불, 트라이베카, 엘에이, 캐나다 몬트리온, 키에프.. 등등.. 11군데.”
- 혹시 상금을 받은 것도 있나. 다음 작품 제작비?
“우선은 이 작품 만드느라 빚이 많다. 그것 갚는데 도움이 되었다.”
- 차기작이나 구상 중인 작품은?
“준비 중인 작품이 있긴 하다. 여성의 눈으로 보는 역사, 전쟁, SF를 생각 중이다. 기회가 많지 않았던 그런 이야기를 하고 싶다. 새롭게 개척하고 싶다. 여성의 눈으로 본 전쟁이란 것이 어떨까. 스펙터클한 전장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전쟁의 폐허, 전쟁신이 없는 이야기를 하고 싶다. 전쟁의 상처를 보여주고 싶다. 개인적으로 <알제리 전투>를 굉장히 좋아 한다. 내전을 다루면서 정치적 상황을 잘 보여준다.”
김보라 감독의 <벌새>는 29일 개봉했다. ‘성수대교’가 무너지던 ‘야만의 한때’를 기억하는 사람이라면 보시길. 어쩌면 올해 최고의 영화는 <벌새>일지 모른다. (KBS미디어 박재환)
[사진제공= 아트나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