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사카모토 준지(阪本順治) 감독이 최근 한국을 찾았다. 사카모토 준지 감독의 신작 <오키쿠와 세계>(원제:せかいのおきく)는 지난 21일 한국 극장가에 소개되었다. ‘에도 시대’가 저물던 일본을 배경으로 분뇨수거를 업으로 하는 남자와 몰락한 사무라이 집안의 여자가 운명적으로 만나, 아름다운 인생 이야기를 펼친다. 비록 ‘똥’ 퍼는 장면이 화면을 가득 채우지만 흑백 필름을 뚫고 나오는 아름다운 이야기는 가릴 수가 없다. 한국을 찾아 GV를 이어가는 도중에 잠시 한국 기자들을 만나 ‘오키쿠와 세계’와 ‘사카모토와 영화’이야기를 전해주었다.
Q. 영화제를 통해 작품이 소개되던 감독의 신작 ‘오키쿠와 세계’가 극장에서 개봉된다. 소감이 어떤지.
▶사카모토 준지 감독: “제 작품 중 한국에서 개봉된 것은 <케이티>와 <어둠의 아이들>인 것 같다. 아주 오랜만에 제 영화를 보여드리게 되어 감개부량하다. 이 영화는 완성되는데 3년이 걸렸다. 단편으로 만들기 시작해서 조금씩 찍어나가며 하나의 장편으로 완성된 것이다. 크랭크인할 때도 배급사가 정해지지 않았고, 완성하고서도 개봉이 불확실했다. 편집된 것을 보고 마침내 일본 극장에 내걸릴 수가 있었다. 해외영화제에도 초청되었고, 이렇게 한국에서도 개봉된 것이다. 창작자 입장에서는 이보다 더 행복한 게 없다. 한국관객분과 토크(GV)를 나눌 수가 있었는데 일본관객과 비교했을 때 연령층이 상당히 낮았다. 젊은 관객이 많다는 것이다. 일본영화 팬들은, 그분들에겐 실례가 될 수 있겠지만 중장년층, 노년이 많다. 한국의 젊은 관객들을 볼 때 놀랐다. 그 진지한 눈빛에서 창작자에 대한 리스펙하는 마음을 느낄 수 있었다.”
Q. 인분(人糞/똥)을 소재로 한 영화이다. 이런 걸 어떻게 기획하게 되었는지 궁금하다.
▶사카모토 준지 감독: “처음 기획한 것은 나와 오랫동안 작업을 함께한 하라다 미츠이다. 원래는 미술감독이었는데 이 작품의 프로듀서이기도 하다. 4년 전에 그로부터 환경문제를 다루는 극영화를 만들자는 제안을 받았다. 환경문제에 의식을 갖고 있거나, 활동을 하는 입장이 아니어서 그런 계몽영화를 만들 자신이 없다고 말했다. 그런데 자료를 받아보았는데 에도 시대의 순환경제 이야기가 있었다. 신선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내가 일본영화계에 대한 불만이 있었다. 그들에게 한 방 먹이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 시원하게 ‘똥’을 던지고 싶은 마음에 만들고 싶었다. 너무 과하게 해버렸다.”
Q. 그래서, 시원하게 한 방 먹인 것 같은가?
▶사카모토 준지 감독: “분뇨를 던진 보람은 있는 것 같다. 일본 영화판에서는 내가 이런 영화를 만든다는 것을 모르는 상황이었다. 해외에서 상을 받으며 알려졌고, 메이저 영화사에서도 축하한다고 인사를 많이 받았다. 축하하기 전에 의식이나 좀 바꿔보지 그런 말을 한다. 저의 경우는 행복하게도 오래 영화를 찍을 수 있었다. 이게 30번째 작품이다. 그런데 일본의 젊은 영화감독은 한 편 찍고, 그게 안 되면 다음 번 영화를 찍기가 어려운 상황이 되었다. 영화가 쉽게 투자가 날 수 있는 게 아니다. 젊은 영화인들이 일회용으로 써다 버려진다. 그들의 재능을 아끼고, 육성하고, 챙기고, 지켜보는 것이 필요하지 않을까. 프로듀서들도 경제적으로 많이 힘들 것이다. 이해되지만 과거엔 그러지 않았다. 지나치게 리스크를 피해가려고만 한다. 메이저영화사들이 새로운 도전을 하지 않는다. 예측가능한, 흥행이 될 것 같은 작품만 만드는 게 현실이다.”
Q. 시대극은 처음이라는데, <오키쿠와 세계>를 만들 때 특히 주의를 기울인 것은 무엇인가.
▶사카모토 준지 감독: “이런 말을 하면 건방지다거나 너무 거창하다고 말할지 모르겠지만 나는 현대극이든 시대극이든 늘 위에서 내려다보는 시선이 아니라, 낮은 곳에서 낮은 시선으로 사물과 세상을 보는 영화를 만들어 왔다. 분뇨를 다루는 사람의 이야기이기에 그럴 수도 있겠지만, 나는 더러운 곳에서 세상을 바라보고 싶은 마음에서 작품을 만들었다. 제 의식 속에는 항상 그런 게 있어왔다. 성향이 그런 모양이다. 모던하려고 애쓰지도 않았다. 과거의 향수를 불러일으키며 그 때가 좋은 시절이었다는 식으로 완결시키고 싶지 않았다. 그런 이야기는 지금도 있다는 것을 전해주고 싶었다.”
Q.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이 흑백버전으로 상영된 적이 있다. 봉 감독은 ‘흑백버전에서는 지하실 냄새가 더 날 것 같다‘고 했다. <오키쿠와 세계>에도 아주 가끔 컬러 장면이 있다. 흑백으로 꼭 찍어야한 이유가 있는가.
▶사카모토 준지 감독: “나는 이 영화 전체를 컬러로 본 적이 없다. 그런 시도조차 안했다. 흑백영화를 동경하는 마음이 있어서 그렇게 작업했다. 색깔에 대한 정보가 없는 만큼 인물의 표정에 집중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자연과의 공생을 주제로 삼고 있는 만큼 화면에 보이는 자연을 잘 묘사하고 싶었다. 나뭇잎이 출렁거림을 흑백으로 표현하는 게 단순한 풍경이 아니라 언어로 느껴지는 효과가 있을 것이다. 빛과 그림자의 세계로 다가갔을 때 오히려 관객들의 상상력을 불러일으키는 힘도 있다고 생각한다. 좀 더 적극적으로 몰입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3년에 걸쳐 찍은 것이다. 단편을 찍은 것을 모아 완성한 것이다. 하나하나가 완결된 단편집 같은 형식이었다. 그래서 1화의 마지막 부분에서 엔딩을 구별하는 것이 좋을 것 같아서 컬러를 집어넣었다. 그리고 만약에 전편을 흑백으로만 찍었다면 과거의 어느 시절에 찍은 아카이브 필름 같은 느낌을 줄 것 같았다. 과거에 일어난 이야기일 뿐만 아니라, 우리 시대의 과제를 이야기하고 있다는 것을 전하고 싶어서 컬러를 넣는다면 관객들도 더 잘 느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컬러부분에서 똥을 컬러로 보여주는 것에 대한 불안감 있었다. 하지만 업계에 대한 분노가 있었으니 분뇨로 날려버리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 그런데 단편 하면서 컬러 집어넣는 것도 중간에 그만 뒀다. 눈 속에서 포옹하는 장면은 컬러보다는 흑백으로 보여주는 것이 낫다고 생각했다. 눈이 쌓여가는 풍광은 컬러보다는 흑백으로 보여주는 것이 훨씬 아름답다고 보았다. 여기서, 컬러로 마무리 짓는다는 저만의 룰을 스스로 깬 것이다.”
Q. 제목 ‘오키쿠의 세계’는 어떤 의미인가. ‘오키쿠가 바라보는 세계’, 아니면 ‘세계가 보는 오키쿠’ 이런 관념인지.
▶사카모토 준지 감독: “그에 대한 답은 피하고 싶다. 어떻게 받아들일지는 관객들의 몫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생각한 제목은 이름 없는 사람들도 세계와 밀접하게 이어져있다는 것을 담고 싶었다. ‘오키쿠의 시선’이라든지 ‘누구의 시선’으로 바라본 어떤 것이라는 것, 이런 것은 아닌 것 같다. 세계적으로 활약한 사람들은 그렇게 기억되지만 저는 이름 없는 사람들도 세계와 이어져 있다는 것을 나타내고 싶었다. 거창한 말로 들리겠지만 지금 세계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이 그렇다. 남의 나라에서 일어나는 일이 나랑 전혀 상관없는 것이 아니다. 나와 연결되어 있는 의식을 가지고 있어야한다고 생각한다. 밀가루 값이 오르고, 원유 가격이 출렁대는 게 실생활에서 영향을 받고 있으니. 세계와 이어져있다는 것을 느꼈으면 한다.”
Q. 단편을 이어 붙여 만든 장편이라고 했는데, 그런 식으로 찍을 때 어려움은 없었는지. 연결성에 있어서 차이를 느낄 수 있잖은가.
▶사카모토 준지 감독: “4년 전에 처음 순환형 사회, 순환형 경제를 주제로 한 에도시대 분뇨 영화를 찍는다는 하라다 피디로부터 제안을 받고 함께 장편을 만들기 위해 처음에는 15분짜리 단편을 파일럿처럼 만들어서 예산을 모으려고 했는데 쉽지가 않았다. 시간이 지나, 3년 전에 또 하나의 단편을 만들어서 두 개의 파일럿 단편을 가지고, 영화사 투자사 찾아가서. 기획서 대신 그 단편을 보여주었다. ‘이런 것을, 이렇게 찍으려고 한다’고 보여준 것이다. 예산조달이 쉽게 되지 않았고, 두 편의 단편이 공개도 되지 못했다. 2년 전에 영화와는 관계없는 단체로부터 펀딩이 되어 나머지 60분을 더 찍을 수 있었다. 먼저 찍은 두 개와 합쳐져서 완성된 것이다.”
원래는 새로 장편을 찍으려고 했는데 이미 찍은 것이 있었기에 그것을 포함하여 만든 것이다. 눈 속에서 추지와 오키구가 포옹하는 장면과 야스케와 추지가 배로 똥을 실어 나르는 장면이 3,4년 전에 찍은 것이다. 어쩌면 클라이막스 부분을 먼저 찍은 셈이다. 시나리오 쓸 때는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서 오키쿠가 목을 다치지 전에 어떻게 살고 있을까. 거꾸로 생각하고 1장의 시나리오를 쓴 것이다. 이런 방법은 해본 적이 없었다. 엔딩을 먼저 찍고 한 것이어서 신선했다. 상당히 변칙적인 영화방식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아마, 주연 배우 세 명은 뒤로 갈수록 세 살 어린 모습이란 것을 눈치 챘을 수도 있을 것이다.“
Q. 분뇨를 어느 정도로 리얼하게 보여주려고 했는지.
▶사카모토 준지 감독: “기모노 등 소품에도 리얼리티를 주려고 했지만 그보다 분뇨를 더 리얼하게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 영화는 분뇨가 주제가 아니라 분뇨를 수거하는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그들이 얼마나 더러운 일을 하고 있고, 그것 때문에 사회로부터 멸시를 받는지를 보여준다. 이를 위해 스태프들이 ‘똥’을 많이 연구했다. 당시 무사계급의 똥과 가난한 사람의 똥이 다르다. 먹는 것이 달라서 그렇다는 대사도 나온다. 그런 리얼리티를 위해 스태프가 자기 똥을 연구하며 리얼리티를 살렸다.”(하하하)
Q. 아버지의 마지막 출정 소식을 듣고 오키쿠가 품에 넣고 가는 것은 무엇인가.
▶사카모토 준지 감독: “비수, 단도를 품고 간다. 아버지를 도우려 가지고 나간 것이다. 일본 무사의 아내들은 단도로 가지고 있는 것은 싸우기 위해서이기도 하고, 사무라이의 자존심이 훼손되었을 때 자결하기 위해서 반드시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 비수는 오키쿠 어머니가 남긴 유품이다.”
Q.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이 ‘시궁창에서 핀 연꽃이 가장 아름답다’고 했다. 오키쿠의 상황이 그런가.
▶사카모토 준지 감독: “오키쿠는 몰락한 무사 가문의 딸이다. 사무라이의 자존심을 버릴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 목소리를 잃게 되면서 깨닫는 것이 있을 것이다. 말을 할 수 있을 때와 잃었을 때 무언가 얻음이 있을 것이다. 신분의 차이가 있는 상대방과 사랑도 있다고 생각한다. 목소리를 잃었기에 어떤 편견을 극복할 수 있었다. 오물 속에서 피는 연꽃이 가장 고결하다는 것과 맥이 닿을 것이다.”
“오키쿠가 아침에 세수를 하는 장면에서 컬러가 된다. 무사의 딸로서 입고 있는 기모노의 색채, 광택을 좀 보여주고 싶었다. 신분의 차이를 나타내기 위해 다른 예복을 입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 오물을 뒤집어서고 머리를 조아리는 쿠지와 야스케가 얼마나 허름한 옷을 입고 있는지 보여주려고 컬러로 보여준다. 촛불이 일렁이는 것은 사랑하는 마음, 심상을 보여주려고 한다. 자연의 풍광에서도 그런 심상을 잡아낸다.”
Q 전작에서 보여준 작풍으로는 사무라이 액션신이 적나라할 것으로 기대되었는데, 그런 것을 의도적으로 배제한 것인지.
▶사카모토 준지 감독: “이 작품에서는 피를 보여줄 필요가 없다고 보았다. 영화는 시간의 예술이기에 어떻게 배치하느냐에 따라 관객의 상상력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 이번엔 그런 폭력 장면이나 잔혹한 장면은 생략하는 것이 맞다고 보았다. 이 영화 최고의 폭력은 ‘똥’이라고 생각한다.”
[사진=엣나인필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