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일어나니 눈이 하얗게 내렸더라. 천지신명이 도와주신 듯하다.” 영화 <파묘>가 예매 호조를 보이며 흥행에 대한 기대감을 높이자 최민식 배우는 하늘 덕분이라고 한다. <검은 사제들>과 <사바하>에 이어 다시 한 번 오컬트 영화에 도전하는 장재현 감독의 <파묘>에서 최민식은 40년 동안 땅만 ‘파고든’ 풍수사, 지관 김상덕을 연기한다. 영화 개봉 다음 날, 삼청동 옛 청와대 후문 인근에 자리한 볕 좋은 건물의 카페에서 배우를 만나 ‘천-지-인’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Q. 장재현 감독의 <파묘>에 출연한 소감은.
▶최민식: “장 감독에게서 대본 받고 같이 만나 이야기를 나눴는데 감독이 ‘우리 땅의 트라우마를 치료하고 싶다. (나쁜 것을) 뽑아내고 약을 발라주고 싶다’고 말하더라. 그 정서가 마음에 들었다. 그런 게 ‘국뽕’으로 느껴지지 않았다. 이 친구는 신과 인간과의 관계, 자연, 종교의 이야기를 한다. 인간은 나약해지고 코너에 몰릴 때 뭔가를 찾는다. 불편할 수 있고, 편협한 사고에 갇힐 수 있다. 이런 문제를 건드리는 것은 위험할 수 있고, 고루해질 수 있는데 그런 것에 열려있는 친구였다. 형이상학적이고 관념적인 것을 영화적으로 재밌게 만든다. 대본을 보고 나서 친근함을 느꼈다. 오컬트 여부를 떠나 풍수나 무속 같은 것은 내게 어릴 때부터 늘 있어온 소재였다. 내가 언젠가 말한 적이 있는데 난 어릴 때 폐결핵 거의 죽을 뻔 했던 사람이다. ‘이 세상 사람 아니다’는 사주였다. 의사도 포기한 상태인데 어머니가 산에 가서, 절을 찾아 기도를 드렸다. 희한하게 나았다. 어머니의 정성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것처럼 살면서 이성적으로 이해 안 되는 것이 있다. 한국인에게는 그런 정서가 조금씩 있다. 현관 문 열고 들어갔을 때 뭐가 보이면 안 된다거나, 어떤 액자를 걸어놓는다든지 하는 식으로. 그런 게 미신이라고 생각하기보다는 재밌잖아요. 굳이 안 할 이유도 없고. 괜히 과학적으로 분석하고 그러지 말고. 물론 전 재산 날리고 뒤통수 맞지는 말고. 정화수 떠놓고 우리 손주 건강하라고 비는 할머니 마음처럼. 그런 정성을 보았다.”
Q. 풍수사를 연기하기 위해 어떤 준비 과정을 거쳤는지.
▶최민식: “작품 제안 받고 몇 달 동안 아무리 연구한다 해도 한계가 있을 것이다. 극중 인물은 40년 동안 ‘땅만 파먹고 살았다’고 한다. 그걸 어찌 책으로 메꿀 수 있겠는가. 대신 그것 하나만은 제대로 표현하고 싶었다. 이 사람은 평생을 자연을 보고 살았다. 그래서 어디가 흉지(凶地,안 좋은 땅)인지 자연스레 터득했을 것이다. 땅의 길흉화복을 터의 모양새, 형태, 질감으로 알아내는 것이다. 산에 올라도 일반 등산객과는 달리 볼 것이다. 흙의 냄새, 흙의 맛. 풀 한포기를 보더라도 깊이 바라보는 태도가 있을 것이다. 그런 느낌으로 김상덕에게 접근했다. 나머지는 다 김고은이 한 것이다. 난 굿이나 보고 떡이나 먹은 거다. 이 영화 때문에 풍수사를 따로 만나지는 않았다. 예전에 사석에서 지관을 만났을 때 그런 것을 물어본 적이 있다. 그런 분들 보기에는 특별한 것이 없다. 그냥 점퍼 입은 평범한 아저씨이다. 그런 평범한 사람이 의뢰를 받고, 땅을 감별할 때는 전문성이 번뜩이는 것이다.”
Q. 풍수사라는 전문직이면서, 또 한편으로는 딸의 혼사를 걱정하는 아버지이다.
▶최민식: “상갓집에서 웃는 사람도 있다. 그게 인생이고 삶인 것 같다. 깊은 슬픔 속에서도 웃음은 있고, 행복함과 유머 속에서도 눈물이 있다. 결혼식 장면에서 관객들의 웃음소리를 듣고 내가 그 장면을 제대로 살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대사를 배우가 못 살린다면, 감독이 실망할 것이다.”
Q. 한국의 장례문화에 대한 평소 생각은 어땠는지.
▶최민식: “사실 우리나라엔 (매장할) 땅이 없잖아요. 유교적인 풍습이 많다. 나의 경우엔 부모님을 다 화장했다. 사실, 그런 것들은 후손들이 잘 먹고 잘 살려고 하는 것일 수도 있다. 돌아가신 분이 무슨 덕을 보겠는가. 이승에 있는 우리가 덕 좀 보고 살려고 그러는 것이지. 그러니 살아 계실 때 잘해 줘야할 것이다. 돌아가시고 나서 좋은 땅 찾는다는 것은 얄밉다. 시대 흐름이 자연스럽게 바뀌는 것 같다. 어떤 마음으로 모시느냐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Q. ‘파묘’ 속 이야기는 굉장히 비현실적인 상황이 펼쳐진다. 그런데 그걸 사실적으로 보여주는 연기를 펼친다. 어떤 노하우가 있는지.
▶최민식: “그건 업계 비밀이다. (하하) 사실, 별다른 노하우는 없다. 그렇게 하는 게 저의 일이다. 그럴듯하게 사기를 치는 셈이다. 허구의 인간을 현실에 있을법하게 하는 게 일이다. 감독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김상덕은 이런 인물이다. 이러지 않았을까? 예전에 풍수사는 이랬다더라..’ 식으로 데이터를 입력해서, 마지막에 카메라 앞에 섰을 때 그 인물이 되어 있어야한다. 그렇지 않으면 (김)고은이 말대로 돈값을 못하는 것이다. 그 순간은 무슨 일이 있어도 저 혼자 감당해야하는 외로운 순간인 것이다. 절벽에 떠밀려 서있는 것 같은 절박함이 있다. 계속 생각을 하면서, 내가 생각한 무형의 인물 속으로 다가가 밀착이 되어야 한다. 그런 상태에서 촬영장에 가야한다.”
Q. 최민식의 연기론이 대단한 것 같다.
▶최민식: “대중들에게 어떻게 평가받느냐가 중요하다. 일단 한 번 스타트가 되면, 맛보고, 이야기도 하면서 서핑 타듯이 올라타고 그냥 달린다. 좌고우면하지 않아야 한다. 일단 파도를 타면 그냥 즐기는 것이다. 연기의 몰입감이 그런 것이다. 점점 뒤로 갈수록 그 인물에 견고하게 붙어버리는 것이다.”
Q. 장재현 감독에 대해서.
▶최민식: “배울 점이 많은 친구이다. 상업영화가 이제 세 번째인데 카펫 짜듯이 촘촘하게 빌드 업 시키는 과정이 대단하다. 지치기도 하고, ‘그냥 갑시다’ 할 수도 있는데 그렇게 넘어가지 않는다. 흙의 색깔도 점검한다. 나는 옆에서 그냥 ‘콩가루 좀 많이 넣어’하는데 말이다. 감독은 ‘색깔이 이게 아니다’고 한다. 그런 걸 옆에서 볼 땐 흐뭇하죠. 그런 걸 보면 믿음이 간다. 영화에서 하늘을 맴도는 커다란 불 있잖은가. 그것 CG로 만든 것 아니다. 내가 감독에게 ‘과학기술이 액세서리냐? 그걸 왜 고생해서 만드냐?’고 그랬었다. 큰 공 모양으로 호스를 만들고 LPG 넣어, 크레인에 매달아 집어 올려서 돌린 것이다. 덕분에 따뜻하게 촬영했다. 불덩이가 내 곁으로 올 때 뜨끈뜨끈했다.”
Q. 갈비뼈를 다쳤다는데, 그런 걸 내색도 하지 않고 촬영에 임했다는데. 배우의 현장철학인가.
▶최민식: “그게 뭐 별거라고? 크고 작은 부상은 누구나 있다. 특히 이런 영화는 그럴 수 있다. 도깨비랑 맞장 뜨는데 갈빗대 정도야. 아무리 조심하고 그래도 다친다. 사실, 그 장면에서 내가 오버를 한 것이다. 내가 찔리는 장면에서 뒤로 넘어지는데 그때 그런 것이다.”
Q. 유해진, 김고은, 김도현과 이른바 ‘묘벤저스’를 이뤘다. 연기 합은 어땠는가.
▶최민식: “이들은 사실 비즈니스 파트너이다. 극중 유해진과는 오랜 세월 지관과 장의사로 함께 다닌 사이이다. 그렇게 오랜 시간 같이 일하니 척 보면 안다. 신 빨(神氣)이 좋은 김고은은 MZ인 셈이다. 그런 사람들이 비즈니스 측면에서 만나 어떤 파트너쉽을 보여줄지가 관건이다. 처음 만나 대본 리딩할 때 느꼈다. (유)해진과는 ‘봉오동(전투)’에서 같이 일본군과 싸운 적이 있지만 고은이와 도현이는 처음 같이 연기한다. 둘 다 넉살이 좋고, 술 좋아하고... 옛날부터 함께 작업을 많이 한 친구 같았다. ‘묘벤저스’가 되기에는 긴 시간이 필요하지는 않겠다는 느낌이 왔다.”
Q. 마지막에 도깨비와 싸울 때는 어떤 정서적 통쾌감을 안겨준다. 무서운 괴물과 맞서 싸운 소감은?
▶최민식: “저 같으면 안 싸운다. 바로 도망간다. (하하) 그 역할 맡은 배우가 내 앞에 딱 서있을 때 ‘너도 참, 고생한다’고 했었다. 예닐곱 시간을 일찍 와서 그렇게 분장하고 있어야 한다. 밥도 못 먹는다. 손까지 분장해서. 현장에서 바나나우유 먹여주고 그랬다. ‘미안하다. 내가 너를 죽여야 된다’고. 그 장면에서 호불호가 나뉠 것이다. 초자연적인 힘을 시각적으로 보여준다. 야구에 비교하자면 직구라면 연기하기가 더 쉬웠을 것이다. 여태까지 이게 우리 숨통을 조이고 있었구나. 그런 모습에서 상덕으로서의 캐릭터 몰입감이 더 좋았던 것 같다. 도깨비 역할 맡은 배우 고생 진짜 많았다. 군소리 안하고 말이다.”
Q. 김고은의 대살굿 장면은 어땠는지.
▶최민식: "아, 정말이지 김고은은 ‘파묘’에서 손흥민이었다. 이도현은 김민재였고. 난 벤치에서 물 나르는 사람이었다. 게토레이 갖다 주는. 상덕이 극중에서 아무리 까불어봤자 칼 들고 휘두르니 끝나잖은가. 배우들은 한 이미지에 갇히는 경우가 많다. ‘예쁜 내가 이걸 해?’ ‘잘 생긴 내가 살인마를 어떻게 해?’ 이런 아마추어 마인드가 없다. 그런 것에 갇히지 않고, 용감하게 도전한다. 여배우가 무속인 역할 한다는 게 쉽지가 않다. 연기하는 선배 입장에서 대견하다고 칭찬해주고 싶다. 그런 자세 때문에 앞으로가 기대된다. 김고은의 다른 모습이 기대된다.“
Q. 김상덕을 연기하면서 특히 신경 쓴 부분이 있다면?
▶최민식: “내 연기가 천편일률적으로 보이는 걸 싫어한다. 내 생각으로는 김상덕은 손주 때문에 그랬던 것 같다. (극중 딸이) 독신주의자라면 달랐을지 모른다. 화림과 봉길에게는 각자의 목표가 있었을 것이다. 내가 영근을 설득하면 ”이 땅은 내 손주가 태어나서 앞으로 밟고 살아갈 곳이다.“고 말한다. 그런 마음이었다.”
** 극중 이름인 김상덕, 이화림, 윤봉길, 고영근은 모두 일제 강점기 독립운동을 한 실존인물들이다. 한 번씩 이들을 검색해보는 것도 영화 보고 난 뒤의 작은 기쁨일 듯하다 **
Q. 최민식 연기 인생 35년을 반추한다면.
▶최민식: “되돌아보고 싶지 않다. 얼마 전에 연극 <고도를 기다리며>를 봤다. (신구,박근형,박정자가 출연한다) 그분들도 하시는데 저는 핏덩어리죠. (연기한 세월을) 되돌아보면 안 된다. 누가 그걸 세고 있나. 그걸 세는 것은 뒤로 주저앉는 것이다. 앞으로 할 게 많다. 욕심도 많고, 하고 싶은 것도 많다. 의욕도 넘치고. 노인네 흉내 내고 싶지 않다. ‘왕년에 이랬지’ 하는 것도. 그런 것은 배우나 창작하는 사람이 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미술이든, 음악이든, 연극이든, 배우든. 후배의 귀감이 되고 존경 받는 예술인은 청년 같다. 미친 듯이 일한다. 몸이 말을 안 들어도. 신구 선생님 보고 눈물이 나더라.”
Q. 앞으로 어떤 연기를 더 해보고 싶은지.
▶최민식: “허구의 세상이고, 허구의 인물이겠지만 내가 아직 만져보지 못한, 접하지 못한 세상이 있다. 유명한 작품을 했다고 해도 한정되어 있다. 앞으로 내가 겪어봐야할 영화적 세상은 많다. 여태 한 작품은 빙산의 일각도 안 될 것이다. 이걸 다 못해보고 죽는다면 얼마나 아쉽겠는가. 일단 멜로를 해보고 싶다.” (‘파이란’ 했잖은가?) “그게 무슨 멜로인가. 얼굴도 못 봤는데. 앞으로 그런 연애는 이젠 다신 안 해요. 멜로란 얼굴도 마주 보고, 차도 마시고, 밥도 먹어야하는 것이다.”
Q. 예전에 <힐링캠프>에서도, 이번에 <유퀴즈온더블럭>에서도 멜로를 하고 싶다고 했다. 인간에 대한 호기심 때문인 듯하다.
▶최민식: “그렇다. 수십 만, 수백 만 갈래의 인간의 감정을 어떻게 다 표현하겠는가. 정형화된 인간의 감성을 표현할 때, 그것이 멜로라면 어떻게 해야 할까. 저 사람을 사랑한다고 할 때 그게 과연 뭘까. 얼마나 많을까. 달달한 바닐라 라떼 같은 앞에 놓고 달달한 이야기 한다고 그게 사랑일까. 사랑의 정의에 대해서도 고민해 보고 싶은 것이다.누군가를 좋아한다는 감정이 뭔가. 꼭 선남선녀만의 사랑으로 국한할 필요가 있을까. 사랑의 형태란 서로 공감하고, 교감하는 것이다. 그것을 어떻게 사랑으로 표현할 수 있을까. 다 다를 것이다. 궁금한 게 많다. 표현해 보고 싶은 게 많다.”
Q. 배우 생활을 오래 하며 얻은 인생의 교훈이 있다면.
▶최민식: “작업할 때도 그렇지만 저는 하자투성이의 삶이었다. 작업을 통해서 많이 배우는 것이다. 실수할 때도 있고, 후회할 때도 있다. 저라고 왜 구멍이 없겠는가. 어릴 때부터 그런 실수를 하면서, 연기를 하면서 많은 걸 배울 수가 있었다. 다행히 저한테는 좋은 영향을 준 사람이 많았다. 그림 그리는 사람이라면 찢어버리면 된다. 혼자 하는 작업이니까. 그런데 영화는 그런 작업이 아니다. 여러 사람이 협업하는 것이다. 어렵지만 해볼 만한 일이다. 중심을 잡고, 서로 교감하며 일한다. 배우뿐만 아니라, 카메라, 조명, 소품 담당까지. 그리고 투자한 사람이 손해 보면 안 될 것이다. 선순환이 이뤄지게. 그 안에서 내 것을 잃지 않도록 해야 하는데 이건 부처님이나 할 수 있는 일이다. 그 과정에서 많이 공부하고 배운다.”
Q. 아까 김고은이 손흥민이라고 했는데, 손흥민이 되고 싶은 욕심은 없었는지.
▶최민식: “배우는 경쟁하는 직업은 아니다. 그러면 망한다. 이번엔 벽돌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건물로 치자면 색깔이 일정해야 한다. 연출에 따라 그 색깔을 맞추는 것이다. 튀어나오면 안 된다. <파묘>는 김고은이 돋보여야하다. 욕심에 제가 같이 나서서 춤(무당춤)을 추면 안 된다. 정교한 연출라인에서 결정된다. 배우 개인의 욕심이 앞서며 절대 안 된다. 배우끼리는 작품을 할 때 ‘누가 똑 따먹는 신이냐’를 이야기하는데 전체를 흩트리지 않는 선에서 해야 한다. 저한테 볼이 들어오면 손흥민처럼 드리블을 해서는 안 되지만 지단처럼은 할 수 있다.”
한편, 지난 22일(목) 개봉된 영화 <파묘>는 4일 만에 200만 관객을 돌파하며 흥행 돌풍을 일으켰다.
[사진=쇼박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