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 사실이나 실존인물, 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영화나 드라마는 필연적으로 ‘역사왜곡’ 논란에서 자유로울 수가 없다. 오랫동안 ‘한글창제’와 관련된 신화 가운데 하나는 집현전에서 밤새 연구하다 잠이 든 정인지에게 세종이 곤룡포를 덮어주었다는 것이다. 이 장면은 이야기에서 소설로 전승되면서 ‘애민의 상징 세종, 고뇌의 결과물 한글’의 이미지를 만들어 내는데 일조했다.
그런데, 한글이 집현전에서 만들어지지 않았고, 세종의 힘이 아니었다면? 하늘에서 떨어졌나? UFO를 타고 온 외계인이 전해주었나? 조철현 감독은 ‘한글 창제설’에 얽힌 많은 버전 중에 신미대사 이야기를 스크린으로 불러낸다.
영화에서 거듭 나오는 말이 고려는 불교 때문에 망했고, 조선은 반면교사로 삼아 유교를 숭상하고, 명을 받들어 천세만세 살아남자는 것이다. 세종의 생각은 조금 다르다. “고려가 망한 것은, 세상의 지식을 한자라는 어려운 문자에 가둬 놓았기에 그랬다. 뭇 백성이 쉽고, 편하게 쓸 수 있는 문자를 만들어 널리 보급하여, 중국 없이도 천년 동안 망하지 않을 국가를 만들고 싶다”는 것이다.
전해오는 훈민정음 언해본에는 세종의 그러한 생각이 명확하게 드러난다.
나라의 말이 중국과 달라 문자(한자)로 서로 통하지 아니하여서 이런 까닭으로 어리석은 백성이 말하고자 하는 바가 있어도 마침내 제 뜻을 능히 펴지 못하는 사람이 많다 내가 이를 위하여 가엾이 여겨 새로 스물여덟 자를 만드니 사람마다 하여금 쉬이 익혀 날마다 씀에 편안케 하고자 할 따름이다
그럼, 과연 세종과 그의 학자, 혹은 스님들이 한글을 창제했을까.
한글반포 500년이 되었지만 그런 ‘정설’ 외에는 그다지 신뢰 가는 이야기는 없다. 그리고, 이설이 있다손 치더라도, 하다못해 산스크리스트 어(語)까지 참조하는 열정에 스님의 크리에이티브한 아이디어가 역할을 했다고 ‘한글의 위대함, 세종의 심미안’이 무너지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중국 한자(漢字)는 창힐이라는 사람이 만들었단다. 역사, 아니 기록에 남은 이야기로는 이 사람은 눈이 네 개라는 이야기부터 시작하여 많은 전설이 있다. 중요한 것은 그가 새 발자국에서 영감을 얻어 상형문자를 만들어냈다는 것이다. 물론, 곧이곧대로 믿는 사람은 없다. 오랜 과정을 거쳐 한자가 형성, 정형화, 표준화 되었다는 것을 알기에.
한반도에 사는 사람이 ‘우리 말’을 한 것은 언제부터일까. (사투리/방언 수준의 차이가 있겠지만) 고구려나, 백제나, 제주도 옛 사람이나 구사하는 말은 비슷할 것이다. 그걸, 문자화 하겠다는 생각을 한 것이 대단할 것이다. 전 세계에 언어는 수천 가지이지만 (그것을 고스란히 옮길 수 있는) 자기 문자를 가진 나라는 그보다 훨씬 적다. 지난 세기 초 중국도 근대화로 들어서면서 한자를 폐지하는 문자개혁을 시도한 적이 있을 정도였다.
영화 ‘나랏말싸미’는 무겁고, 답답하고, 지루하고, 고루하고, 심심하고, 허전하다. 주야장천 “절대 아니 되옵니다”만 읊조리는 조정 대신들, 국사보다 학문에 매달리며 세종은 눈도 나빠지고 옥체도 피폐해진다. 하지만 한글이 ‘창조되는 과정’은 흥미진진하다. 세종의 심미안은 삼성 IT의 정밀함과 스티브 잡스의 디자인 감각을 합친 듯하다.
그런데, 영화를 보면서 문득 이해하기 힘든 게 있다. “한자는 어렵고, 한글은 쉬워서 발전이 될 것”이라는 어젠더. 자부심의 표현일 것이다. 중국은 발전이 안 되어야하지 않은가, 울면서 시작해서 웃으면서 끝난다는 독일어는? 세종대왕이 백성을 너무 우습게 본 것은 아닐까? 문자는 언어를 전달하는 도구의 기능을 하지만, 우리에겐 어느새 그 문자에 얼을 담은 민족 공동유산이 되었다.
어쨌든, 세상에서 가장 쉽게 배우고, 가장 과학적이라는 ‘한글’의 창제 과정을 영화로 보는 것은 흥미롭다. 실제 영화 속 이야기를 전적으로 믿을 사람은 없겠지만, 세종의 고뇌와 당시 조정의 상황, 호국불교의 마음은 느껴지니 말이다. 이 영화는 배우 전미선의 유작이다. 한글창제에 일조하는 소헌왕후 역으로 관객에게 애틋함을 남긴다.
참, 세종대왕이 창제한 한글 28자 중 지금은 쓰지 않는 소실된 낱자는 닿소리 ㅿ(반시옷), ㆁ(옛이응), ㆆ(여린히읗)과 홀소리 ㆍ(아래아) 등 네 글자이다. (KBS미디어 박재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