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찬욱 감독은 성공한 시네필(cinéphile)이다. 대학시절 영화서클에서 세상의 온갖 잡다한 영화들을 찾아봤고, 영화잡지에 영화에 대한 해박한 글을 썼으며, 직접 영화판에 뛰어들어 영화를 찍기 시작했다. 그렇게 영화에 ‘깃발’을 꽂은 박찬욱은 충무로를 넘어 세계에 자신의 이름을 떨쳤다. 그의 최신작은 영화가 아니라 TV드라마이다. 지난 연말 영국 BBC를 통해 처음 방송된 존 르 카레 원작의 ‘에스피오나지 드라마’ <리틀 드러머 걸>이다. 이 작품은 지난 달 29일부터 (넷플릭스가 아닌) 국산 토종 동영상플랫폼인 ‘왓차플레이’를 통해 6부작 전편이 공개되었다. 왓차 공개에 앞서 ‘감독판 1,2부’에 대한 언론시사회가 열렸고, 한국취재진과의 라운드 인터뷰가 진행되었다.
<리틀 드러머 걸>은 존 르 카레가 1983년 발표한 동명의 원작소설을 6부작으로 극화한 것이다. 1980년대 유럽 각지에서 팔레스타인 조직에 의한 ‘테러’가 잇달아 발생하자 이스라엘 모사드가 작전을 펼친다. 영국출신의 무명 연극배우 찰리를 포섭하여 적진에 심어 넣는 위험천만의 스파이 작전을 펼치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벌어지는 정체성 혼란이 박찬욱 감독 특유의 미장센으로 펼쳐진다.
● 1980년 팔레스타인-이스라엘 문제는 한국 관객에겐 낯설다. 이 이야기를 택한 이유는.
“지금 보아도 정치적, 사회적인 이슈를 다루는 현재성이 있는 이야기이다. 주인공이 운명적 만남을 하게 되고, 같이 여행을 떠나며, 그 과정에서 많은 조력자, 또는 악마나 괴물을 만나게 된다. 장애물을 극복해 가는 일련의 과정을 거쳐 주인공이 성숙하게 되는 이야기이다. 주제 면에서 보면 예전부터 많이 다뤄진 것이다. 무엇이 진짜이고 무엇이 가짜인지. 그런 혼란 속에서 무엇을 분별해내려고 하는지. 그런 문학적인 주제를 다루고 있다.”
박찬욱 감독은 존 르 카레의 소설을 “좋은 이야기”라면서 설명을 이어갔다. “현대사회에 대한 은유라고 생각했다. 찰리의 직업은 배우이다. 스파이 스토리에서 적절히 활용할 수 있는 캐릭터이다. 그녀에겐 가족에 대한 비밀이 있다. 하지만 모사드의 쿠르츠와 베커에게는 비밀이 없다는 것이다. 너무 순탄하게, 평범하게 살아온, 극적인 삶이 없었다는 게 그녀에겐 치명적인 셈이다.”
“플로렌스 퓨가 연기하는 찰리는 런던을 중심으로 연극활동을 하는 무명 여배우이다. 자신의 과거를 허풍스럽게 이야기하는, 스스로 만든 픽션 세계 속에서 살아온 배우이다. 어쩌다가 모사드의 눈에 띄어 ’스파이‘로 새로운 연기를 하게 된다. 모사드의 공작자 입장에서 보자면 찰리는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은, 여권이 깨끗한, 무엇보다 배우로서 자신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인물로 본 것이다.“
- 찰리를 캐스팅하여, 짧은 리허설을 거쳐 실전에 투입시키는 이스라엘 비밀정보국 모사드의 인물은 책임자 마틴 쿠르츠(마이클 새넌)와 현장요원 가디 베커(알렉산더 스카스가드)이다.
“찰리 같은 배우를 특수한 작전에 이끄는 인물인 가디 베커는 역전의 용사, 전쟁영웅 출신의 스파이라서 이야기가 더 흥미롭다. 가디 베커는 찰리에게 리얼리티를 요구하며 팔레스타인 테러리스트의 애인으로 완벽하게 변신하게 만든다. 완벽한 허구를 만들기 위해, 자기도 완벽한 역할, 실감나게 애인 역을 만들어가다.”
● 존 르 카레의 소설에서 특히 끌린 부분은?
“처음엔 소설이 재미없을 것 같았다. 냉전시대, 동서대결의 이야기를 좋아한다. 직업스파이의 대결은 냉혹하고 비정하다. 차가운 계산, 논리게임을 벌이는 이야기를 좋아하는데, 이 작품은 조금 엉뚱한 면이 있다. 주인공이 직업 스파이가 아닌, 젊은 배우였다. 그만큼 재미가 덜 할 것이라 생각되었다. 와이프 권유로 읽기 시작했는데 매력 없다고 생각했던 점이 오히려 매력적이더라. 장르소설이 아니라 순문학이라고 해도 손색이 없다. 노벨문학상 후보가 되어도 하나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문학적이다.”
- 원작이 있는 작품을 연출하는 것은.
“내가 직접 시나리오를 쓰거나 원작이 따로 있는 작품이나, 연출자 입장에선 똑 같다. 원작이 있거나, 신문의 사회면 기사를 읽고 영감을 얻는다. 꿈을 꾸는 데서 시작한 것도 있다. 다 똑같다. 차이가 없다. 어차피 원작소설이 있다고 해도 처음부터 끝까지 새로 쓰는 것이니. 똑 같은 것은 없다.”
박찬욱 감독은 비록 크레딧에는 오르지 않았지만 각본 작업에 처음부터 끝까지 꽤 많은 분량 참여한 셈이라고. “정확히 몇 프로 참여했다고 말하긴 어렵다. 구성이나 대사에 많이 섞였다.”며 “난 작가조합원이 아니니, 그리고 영어로 쓴 것이 아니니..”라고 덧붙인다.
- 그리스 파르테논 신전에서 찍었다.
“각본이 다 나오기 전에 영화사에서 제일 먼저 그곳을 섭외했다. 그리스의 문화재 관련기관에 끈질기게 쫓아다니며 요청한 것이다. 허용해 줄 수 없다는 의견도 있었다. 다행스럽게 허가를 내주었고, 딱 하룻밤에 찍었다. 당국에서 감시하는 분들이 나와 눈을 부릅뜨고 현장을 지켜봤다. ‘이거 안 돼, 저거 안 돼’라며. 그곳에서 밤에 영화 찍은 것은 이 작품이 처음이라고 하더라. 현장이 경건했다.”
● 유머는 나의 힘
박찬욱 감독이 스릴러를 찍으면서도 절대 놓치고 싶지 않은 게 있었단다.
“찰리는 어느 순간에도 농담하는 것을 포기하지 않고 독설을 날린다. 자기가 만만한 사람이 아니란 것을 보여주려는 것이다.”며 “유머에 대해서는 저는 아주 목숨을 거는 부분이다. 언제나 유머를 중요시 한다. ‘리틀 드러머 걸’ 원작에서는 잘 느껴지지 않는 감정이지만 드라마에서는 곳곳에서 느껴질 것이다. 대사를 빠르게 주고받을 때는 놓칠 수도 있겠지만 두 번째 보면 더 잘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비틀린 유머가 곳곳에 있다.”
-어느 부분이?
“6부작 전체 시사회 때 관객분이 많이 웃어주시더라. 고마웠다. 내 영화 중 로맨스로 말하자면 제일 스윗한 부분이 많은 작품이다. 하나 말씀 드리고 싶은 것은, 스포일러지만 마지막 장면이 연인의 재회로 끝나는데 내겐 그게 아주 로맨틱하기만 한 것은 아니다.”면서 마지막 장면(상황)에 대해 설명해 주었다. (꼭 박찬욱 감독처럼 생각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사지(死地)에서 돌아온 여자와 그녀를 사지로 보낸 남자가 만나서 보여줄 수 있는 행동에 대해서는 말이다)
● 이스라엘과 아랍, 정치적 균형은?
- 한국감독이 첨예한 중동 정세를 다루는 데 어려움은 없었나
“(원작)소설에서는 그런 문제를 상당히 균형 있게 다루고 있다. 그렇지 않았다면 애당초 영화로 만들 생각은 하지 못했을 것이다. 작가는 책을 쓰기 전에 취재를 많이 했다. 이스라엘의 정보부, 군부의 높은 사람에서부터 팔레스타인의 아라파트 (PLO)의장까지 만났다고 한다. 극중 가디 베커의 모델이 된 사람도 만났다고 하더라. 베를린 클럽에서 우연히 만난 게 이 스토리의 출발점이란다.”
르 카레에 대한 새로운 사실도 알려준다. “찰리의 모델이 된 것은 작가의 여동생이란다. 유명한 극좌파며 실제 배우란다. 여동생의 엄청난 활력과 모험심, 위험을 불사하는 열정이 묻어난다. 사랑과 혁명의 대의에 몸 던지는 여동생의 모습에서 출발한 캐릭터가 찰리이다. 이 모든 것이 책상 앞에서 꾸며낸 이야기가 아니라, 생생한 자료와 실재인물에서 기초한 이야기이기 때문에 사실성과 균형감을 갖는 것이다.”
- 촬영 현장은 어땠나
“좋은 원작이 있었기에 부담감은 그만큼 줄었다. 각색 과정에서도 제작사가 양쪽(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인사에게 자문하는 등 충분한 검토를 거쳤다. 사안을 보는 시각, 전체적인 관점뿐만 아니라. 관습 언어 등 세심한 문제까지 체크했다. 현장에는 양쪽 사람이 다 있었다. 그들과 이야기도 많이 나눴다. 술 마시면 눈물이 글썽글썽해진다. 마치 우리가 남북한 이야기할 때와 똑 같다.”
● 기억에 남는 배우
“드라마에서 테러리스트 미셀(쌀림) 역할을 한 친구(아미르 쿠오리)는 텔아비브에 살고 있는 팔레스타인 사람이다. 양측 갈등을 한 몸에 안고 사는 애다. 이스라엘 연극학교의 유일한 아랍 학생이라더다. 얼마 전 졸업공연을 했는데 세익스피어의 ‘베니스의 상인’을 했다. 샤일록을 연기한 최초의 아랍인이란다.”
“플로렌스 퓨는 ‘레이디 맥베스’를 보고 캐스팅하고 싶었다. 예쁠 뿐만 아니라 찰리에게 발견할 수 있는 성격을 갖고 있었다. 겁이 없는 친구다. BBC드라마 ’리어왕‘에서 막내딸로 출연했다. 안소니 홉킨스, 엠마 톰슨 같은 대배우와 공연했는데 전혀 주눅 들지 않았다.“
“각본 작업을 할 때, 찰리 캐릭터에 신경 썼던 것은 찰리가 왜 이 위험한 임무에 가담하는지, 어떻게 설득력을 가질 것인지 였다. 그런데, 플로렌스 퓨가 대사 읽는 것을 보고는 한시름 놓았다. 저 배우라면 기꺼이 사랑 때문에 위험에 뛰어들 것이라고 생각됐다.“
● 극장이 아니라, 왓차에서 개봉된 ‘박찬욱 영화’
“창작자로서 고민이다. 새로운 지형에 어떻게든 적응해야한다. 좋다나쁘다로 말할 문제는 아닌 것 같다. 현실이니까 적응해야죠. 지금 생각은 일단 길이(러닝타임)가 중요한 것 같다. 내용이 아주 길어진다면, 그럼에도 그 이야기를 꼭 하고 싶다면 극장을 포기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리고, 예산문제다. 이만큼 예산이 필요한데 기존의 영화 쪽에서는 충분히 펀딩을 할 수 없다면, OTT에서 준다고 한다면, 그렇게라도 해야죠.”
요즘 젊은 층에서는 핸드폰은 세워서(손에 쥔 상태)에서 동영상을 본다고 ‘새로운 현상’을 일러주자, 박 감독의 입에서 나온 말, “헐.. 안 돼.”란다. 박찬욱 감독은 ‘리틀 드러머 걸’을 어떤 환경에서 보기를 원할까.
“이 작품은 스마트폰으로 안 봤으면 좋겠다. 하다못해 태블릿으로는 봐야지...“
● ‘달은 해가 꾸는 꿈’과 ‘삼인조’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에게 <1941>이 있다면, 박찬욱 감독에겐 ‘달은 해가 꾸는 꿈’이 있다. 가수 이승철을 주인공으로 발탁한 영화 <달은... 해가 꾸는 꿈>은 어설픈 홍콩느와르를 흉내낸 졸작, 혹은 괴작에 속한다. 그 다음 작품 ‘3인조’도 그렇다. 영화감독이 되고 싶어 안달이었던 청년씨네필 박찬욱을 생각하며, 그 영화를 만들 당시를 물어봤다. 박 감독은 기꺼이 대답해 준다.
“그때는 그게 재밌다고 생각했었다. 내 능력의 한계도 있었다. 그런 적은 예산이라면 그만 두는 게 나았을지 모른다. 그때는 어떻게든 데뷔를 하고 싶었다. 어쩔 수 없이 만들지만 다음 번 작품을 할 때 분명 도움이 될 것이라 믿었다. 시나리오를 들고 영화사를 찾아다닐 때 아무 것도 안한 감독지망생보다는 뭐가 됐든 하나 들고 가야지 거들떠보지 않을까 생각했다. 예산도 적었지만, 이런 영화를 만들어 달라는 제작자의 요구가 분명했다. 한계가 있었던 것이다. 물론 제작자 잘못은 아니다. 그걸 받아들일지 말지는 내가 결정하면 되는 것이었다. 찰리처럼 누가 총을 들이댄 것도 아니니. 그걸 받아들인 게 저의 잘못이라며 잘못이다. 그게 실수인지 아닌지는 인생을 두 번 사는 게 아니어서 모르겠다.”
“두 번째 영화는, 그땐 뭔가 B무비스러운 걸 만들고 싶었다. 예산은 적지만 독특한 이디디어와 미학으로 엉뚱한 작품을 만들고 싶었다. 예산이 제대로 뒷받침되지 않았을 때 그걸 극복할 수 있는 미학이라고 생각했다. 결과적으로 그쪽 감각이 안 맞았던 모양이다. 썩 마음에 드는 작품을 만들지 못했다.”
- 찰리는 강인한 여성이다. 박찬욱 감독의 영화에서 여성 캐릭터는 어떤가.
“찰 리가 가장 적극적인 여성캐릭터이다. 공격적일 정도로, 무모할만큼 용감하다. 이전의 여성 캐릭터들을 잘 들여다보면 용감하긴하다. 하지만 조금 다르다. ‘금자씨’처럼 철저하게 계산해서 움직인다거나, 광기에 사로잡힌 캐릭터와는 다르다. 찰리는 굉장히 긍정적인 인물이다. 사랑을 위해서 위험을 무릅쓰는 뜨거운 마음을 가진 사람이다.”
- 서부극을 찍을 것이라는 보도가 나왔다.
“미국매체에 보도된 게 완전히 틀린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투자가 확정된 것은 아니다. 작업이 진행 중이다. 어찌될지 모르니 한국영화도 준비하고 있고, 다른 외국영화도 준비하고 있다.”
● 원작자 존 르 카레는 이 드라마를 어떻게 봤다고 하던가.
“너무 좋아했다. 자랑스러워했다. 이 작품 한 장면 등장한다. 작품 끝나고, 손편지로 좋은 말씀도 해주셨다.”
존 르카레는 3부에 등장한다. 찰리가 차를 몰고, 오스트리아에 도착한 뒤 바에 서 마실 것을 주문할 때 등장하는 할아버지이다.
씨네필에서, B급 영화감독, 그리고, 세계적인 영화감독이 된 박찬욱 감독에게 젊은 영화지망생에게 조언하나 해달라고 하자, 이렇게 대답한다. “세로 화면에 적응하라!”. (KBS미디어 박재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