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정우성에게는 ‘미남’을 뛰어 넘는 독특한 아우라가 있다. 오래 전 ‘비트’와 ‘태양은 없다’ 때부터 청춘의 아이콘이었으며, 언제부터인가 신념의 배우가 되어버렸다. 최근 ‘더 킹’, ‘아수라’, ‘강철비’ 같은 조금 하드한 영화에 잇달아 출연하며 충무로 중견배우의 위상을 단단히 다지던 그의 최신작은 <증인>이다. 20년 이상 충무로에서 ‘미남배우’로 살아남고, ‘멋진 배우’로 팬들을 만날 수 있다는 것이 흔한 일인가. <증인>은 최근 출연작과 비교하면 어깨에 힘을 빼고, 얼굴에 잔주름을 조금 더 넣은 작품이다. 대신 ‘인간’ 정우성의 매력을 십분 녹여낸 작품이다. 그를 만나 영화 <증인>과 배우 정우성의 연기에 대해 물어보았다.
지난 달 한 카페에서 만난 정우성은 검은색 터틀넥 셔츠에, 손목에는 디지털 워치를 차고 있었고, 머그잔을 이용하고 있었다.
영화 ‘증인’(감독 이한)에서 정우성은 한때는 민변에서 나름 정의를 위해 활동하였지만 지금은 신념은 접어두고 현실적 이유로 대형로펌에서 새로운 삶을 모색하는 변호사 순호를 연기한다. 그는 작심하고 속물이 되려는 듯 큰 기회가 걸린 살인사건의 변론을 맡게 된다. 그러면서 만나게 되는 인물은 자폐증세의 소녀 지우(김향기 분)다.
● 양순호 변호사, 흔들리는 신념
“인간으로서 가진 기본적인 신념이 마음에 들었다. ‘노력해 볼게’라고 말하는 것이 저의 성향과 닮은 것 같다.”며 자신이 맡은 캐릭터에 대한 소감을 밝혔다.
● 극중 변호사 양순호는 어떤 사람인가.
“영화의 시작은 순호의 현실적인 타협을 보여준다. 확신을 갖고 있지만 세상 삶이 그런가. 운명적으로 지우라는 아이를 만나게 되고, 마치 거울을 통해 자신을 보듯이 스스로에게 질문하고 성장한다. 지우를 통해 세상을 바라보는 것에 대해 다시 한 번 확신하게 되고, 원래의 자신으로 돌아가는 인물이다.”
아버지 박근형
“아버지(박근형 분)와의 관계가 순호의 인성을 규정짓는 뿌리라고 생각했다. 같이 연기하는 장면은 많지 않지만 시나리오를 다 읽고 나니 감성의 반을 차지하는 것 같았다. 아버지가 나오는 장면은 익숙할 수도 있지만 내겐 낯선 장면이다. 순호가 아닌 정우성으로 대리만족하고 싶은 욕심이 있었다.”
● 사람의 가치관은 바뀌는지
“순호처럼. 변한다는 것은 성장한다는 의미일 수도 있다. 우리는 늘, 잘 변해야할 것이다. ‘성숙한 자’라는 표현이 적절한 것 같다.”
● 촬영하면서 행복했던 순간은?
“촬영 내내 행복했다. 첫 씬이 광화문이었다. 광화문은 많은 사람이 오고가는, 소통의 공간이지만 배우 정우성에게는 쉽게 접근할 수 없는 공간이기도 하다. 그 안에 섞일 수 있다는 짜릿함이 있었다. 광화문에서는 들뜬 느낌이었다.”
이한 감독
“일상에 숨어 있는 편견들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그런 것을 강요하지 않는 방식으로 문제의식을 공유한다. 이한 감독은 심성이 따듯한 분이시다. 그런 관계를 사랑하시는 분이시다. 보통 영화감독들은 장르에 대한 욕심이 많다. 그런데 이한 감독님은 온전히 자신이 원하는 작품을 추구하신다. 그런 특화된 모습이 멋있다고 생각한다.”
● 영화에서는 정의를 선택한다. 실제로는 어떤가.
“그런 가치를 추구하려고 노력하는 것이 중요한 것 같다. 인생의 방향을 결정하는데 거창한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니다. 사소한 선택으로 바뀔 수도 있다. 어떻게 보면 사회적 분위기로 인해 그 정당성이 빛을 잃기도 한다. 그런 것을 당연하다고 여기는 시대를 거쳐 왔다.”
정우성은 말을 보탠다. “세상을 살다보면 어떤 계기든 성장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나와의 관계, 사회와의 충돌을 바꾸기 위해 조급함을 가지면 스스로 다치는 경우가 많다. 문제에 직면했을 때 그 문제를 깨기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하다. 조금은 거리를 두고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자세가 필요하다.”
화면에서 얼굴의 주름이 느껴진다. 여러 의미에서.
“영화를 찍고 색보정 작업을 할 때 감독들은 배우를 아끼는 마음에 손을 좀 대려고 한다. 이한 감독님에게 DI작업할 때 주름 같은 것 잡지 말자고 그랬다. 얼굴의 주름은 삶의 흔적이다. 잘못하면 캐릭터를 훼손할 수 있다. 물론, 배우마다 입장의 차이가 있을 수 있다. 순호의 경우에는 그런 자연스런 주름이 드라마의 자연스러움으로 돋보이게 할 것이다.”
정우성은 인터뷰 내내 굉장히 신중하게 어휘 선택을 하고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려고 노력한다.
“전 어릴 때부터 나이를 잘 들어야지 그런 생각을 한 것 같다. 아름다운 것만 내 것이 될 수는 없잖은가. 하나하나가 소중하다고 생각한다.”
영화에서는 몇 차례 “당신은 좋은 사람입니까?”라는 질문이 나온다. 정우성이 생각하는 좋은 사람은?
(정우성은 이 질문에 대해서도 한참 고민하는 모습을 보이더니 가까스로 입을 연다)
“우리 사회에서는 입 밖으로 내뱉으면 손해 본다고도 한다. 양심, 정도, 서로에 대한 예의, 직업에 대한 윤리 등등. 기본적인 것은 다 포함하고 있을 것이다. 극중 순호는 변호사로서, 그 직업이 가져야하는 기본적인 것이 있다. 그 기본적인 것을 지키려는 마음. 그게 방금 한 질문에 답이 되지 않을까 한다.”
● ‘증인’을 선택한 이유가 있는지
“시나리오가 담고 있는 것이 큰 주제일 수도 있지만 그것을 강요하지는 않는다. 소소한 이야기이지만 여운이 길다. 배우 정우성이 지난 몇 년간 좀 센 캐릭터를 연기했던 것 같다. 시대적 함의를 지닌 거대한 이야기. 그런 작업을 계속 하니 나도 모르게 피로감이 쌓인 것 같다. 마음을 툭 내려놓고, 나를 돌아볼 수 있는 시간이 되었으면 한다.”
● 배우가 가진 사회적 영향력을 인지하고 폭력적 영화 출연을 자제하고 싶다고 이전에 밝혔었는데.
“그런 생각은 ‘비트’ 끝나고 바로 들었었다. ‘비트’가 저에게 많은 것을 안겨 주었지만 영화의 파급력이 컸다. 어린 아이들이 나를 보면 자랑스럽게 이야기하더라. ‘교실에서 친구들과 비디오 켜놓고 봤다’, ‘극중 대사를 다 외는 친구도 있다’고. 나를 만나면 흥분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한다. 어떤 이야기인지 알잖은가. 나 때문에 담배 배웠고, 나 때문에 오토바이 배웠고, 나 때문에 다리 부러졌다는. 그런 이야기를 들으면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영화 ‘똥개’를 찍을 때는 이런 일도 있었다. 밀양의 한 고등학교에서 야간 촬영할 때였을 것이다. 잠시 쉬는 틈에 밖으로 나와 담배에 불을 붙이는데 저쪽 어둠 속에서 아이들이 ‘와. 멋있다.’하는 거다. 그 때, 어둠 속에서 불붙인 담배를, 손을 어디에 둬야할지 모르겠더라. 한창 조폭영화들이 나올 때였다. 함부로 영화하는 게 아니구나, 함부로 캐릭터 선택하는 게 아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똥개’ 때 확고해졌다.”
● 그런 생각을 지금도 유효한지.
“유효하죠. 악인을 그릴 때. 악인에게 인간적이 연민을 둘 순 있지만 미화해서 ‘저렇게 살 수도 있지’라고 만들면 안 될 것이다. 캐릭터나 이야기가 지향하는 바를 충분히 고민해야할 것이다.”
● 그럼, 앞으로 연기는 잔잔한 쪽으로?
"아니죠. 그건 모르죠.." (정우성이 크게 웃었다. )
● 정우성의 아이덴티티는 뭐라고 생각하는가... 관객의 만족도는?
“그 점에 대해서는 크게 생각하지 않으려고 했다. 지금도 마찬가지. 저도 찾아가는 과정이다. 제가 출연한 영화들을 보면 저를 찾아가는 과정 같다. ‘비트’에서 청춘의 아이콘이었지만 계속 ‘민’과 같은 캐릭터만 찾았다면 이미 무너졌을 것이다. 나는 한 모습으로만 머물러 있긴 싫다. 새로운 캐릭터를 만날 때마다 걸음걸이와 말투 등을 연구하고 새로운 시도를 해본다.”
● 다음에 만나게 될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짐승들’(김용훈 감독)이란 작품이 있다. 어떤 작품인지.
“스릴러라기보다는 블랙코미디. 그냥 찌질한 남자이다. 저의 또 다른 성격의 표현이다.”
어느새 청춘의 아이콘에서 20년이 넘게 스크린을 불태우고 있다. 가장 기억에 남는 작품이나 순간이 있다면.
“어제 안(성기)선배 부친상 갔더니 그곳에선 제가 완전 애더라. 기본이 30년 이상 연기하신 분들이 앉아계셨다.”며 “매 순간이 기억에 남는다. ‘비트’와 ‘똥개’ 이야기도 했지만 작품을 하면서 추억이 많다. 하다 보니 어느새 관성적으로 비슷한 연기를 한 때도 있었던 것 같다. 그걸 깬 작품이 ‘아수라’이다.”
자신이 출연한 작품은 가끔 돌려보는지
“안 봐요. 잘 안 봐지더라. 다른 배우들도 그렇다더라.”
정우성은 최근 자신이 출연한 영화의 캐릭터를 소개했다.
“한강식(더킹) 같은 경우는 명확하다. 영화에서는 이런 삶이 바람직한 삶인가 묻는다. 그런 캐릭터에 대해 관객들이 오해하고, 나도 저렇게 살아야지 동요를 일으키지는 않을 것이다. ‘아수라’의 한도경은 악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어쩔 수 없이 순응하고 살아가는 나약한 사람이다. 작가의 바라보는 ‘아수라’의 세상은 비관적이다. 자멸하지 않고서는 이 시대의 악을 어떻게 무너뜨릴 것인가. ‘감시자’는 워낙 영화적인 내용이다. 일상에서 거리가 먼, 결코 닮을 수 없는 악역이다. 청소년에게 어떤 (나쁜) 영향을 미칠 우려가 적었다고 생각한다.”
‘증인’은 어떤 영화인가
“많이 지쳤잖아요. 걱정과 불안에 싸인 뉴스들이 쏟아지고 있다. 과하게 전달되는 것 같다. 마치 제가 시나리오를 읽고 숨을 고를 수 있었던 것처럼 뭔가 치유 받은 느낌을 줄 것이다. 최고의 치유제는 아니지만, 나를, 주위 사람을 보담아줄 수 있는 영화가 될 것이다.”
● TV드라마 출연 계획은 없는지
“어떻게 하다 보니 영화스케줄이 잡혔다. 드라마 제안도 많이 오긴 했다. 일부러 안 한 것은 아니다. 물리적 시간의 제한 때문이다.”
● 올해 계획은
“올해 작품 하나를 연출하려고 준비 중이다. 물론 못할 수도 있고.”
“사실 연출을 너무 하고 싶다. 제가 20대 후반 때부터 ‘감독할래요 감독할래요’라고 떠들고 다녔었다. 뮤직비디오도 연출했고, 단편도 찍었고, 브랜드 필름도 연출해 봤었다. 2000년대 초반에 뮤직비디오에 화면분할 하는 게 유행했었다. 그거 제가 유행시킨 거다.”
● 자신이 출연한 영화 평을 보는 편인지
“이전에는 잘 안 봤었지만 요즘은 보는 편이다. 영화리뷰를 보면 어떻게 이해하고 어떻게 공감하는지 알 수 있다. 그런 걸 보는 것도 중요한 것 같다.”
● 정우성씨는 착한 일을 많이 하는 연예인으로 유명하다. 그러다보니 여러 민감한 이슈에 곤혹을 치르는 것 같다.
“제주도의 예멘 난민 때 일을 이야기하자면. 반대의견에 대한 댓글이 좋다 나쁘다고 말할 수는 없다. 이해의 충돌이자 의식의 차이이다. 정치적인 논리로 이용하는 게 비쳐지는 것 같아 조금 안타깝다. 그런 논리에 영향을 받는 분들이 있을 수 있다. 염려도 된다. 이런 사안은 거대한 담론이기에 오랜 시간을 두고 차분히, 꾸준히 소통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정재와 정우성
“관객이 바라보는 객관적인 평가는 어떤지 모르겠지만. 정재 씨는 제 옆에서 자극을 주는 친구이자 동료이다. 정재 씨는 정재 씨가 추구하는 연기법이 확실하고, 저도 저만의 연기법이 있다. 서로 다른 연기를 하니 어떤 것을 선호할지는 모르겠다. 분명한 것은 정재씨도 쉬지 않고 자기 연기에 대한 고민을 하고 노력한다는 것이다. ‘태양은 없다’ 때와 비교하여 둘 중 누구의 연기가 성장했는지 함부로 이야기할 수는 없다.”
● 관객들한테 마지막으로 <증인>을 다시 한 번 소개한다면
"담담하지만 작은 울림이, 길게 가는 영화이다. 나를 돌아볼 수 있고, 주변을 안아볼 수 있는 그런 영화이다.“
정우성, 김향기 주연의 영화 <증인>은 지난 13일 개봉되어 관객의 호평을 받고 있다. (KBS미디어 박재환)
[사진제공=롯데엔터테인먼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