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시대를 배경으로 소설을 쓴다면 ‘화랑’이 주인공이지 않을 수가 없을 것이다. 그런데 통일신라시대라면? 뭔가 ‘흥망성쇠’의 끝자락에 다다른 경주를 배경으로 사바세계의 중생을 그릴 수 있을 것이다. 여기 정세랑 작가가 경주를 거닐며 이야깃거리를 찾아 나섰다. “이번에 미스터리 추리소설이야!”라며. 불탑과 왕궁도 있고, 골품제라는 근사한 신분제도 있다. 이제 미스터리한 살인사건과 왕궁 넘어 전해서는 안 될 특급비밀만 펼쳐놓으면 된다. 아뿔사! <조선왕조실록>같은 이야기보따리가 없구나. 어쩔 수 없이 정세랑 작가의 이야기꾼의 솜씨를 기대할 수밖에. 정세랑 작가는 일단 흔히 만나볼 수 없는 주인공을 내세운다. ‘남장 여자’이다. 집안 사정으로 죽은 오빠를 대신하여 ‘남자 행세’를 하는 여자가 주인공이다. 아주 흥미롭다. 영화로 만들어도 될 것 같다.
정세랑의 소설 [설자은, 금성으로 돌아오다]는 통일신라시대, 콕 집어 신문왕 즈음이 배경이다. 주인공 설자은은 원래 설미은이었다. 미은의 오빠 자은이 당나라 유학 떠나기로 한 무렵 덜컥 죽은 것이다. 집안 맏이 큰 오빠(호은)는 기울어가는 가문을 되살리기 위해 여동생 미은을 ‘자은’이라 하고, 당나라로 보낸다. 그리고, 유학을 끝내고 서라벌로 돌아오게 되는 것이다. 소설은 이 집안의 사정과 ‘자은의 내력’을 그저 서너 페이지에 걸쳐 간단히 알려줄 뿐이다. 당나라 장안에서의 유학생활, 타국살이에 대해서도 긴말이 없다. 그냥 신라 땅으로 오는 배에서의 이야기로 시작된다. 이제 ‘남자 설자은’은 ‘여자 설미은’으로 하지 못했던 새로운 경험과 새로운 내일을 맞이하게 되는 것이다. 그에게는 뛰어난 기억력, 명석한 두뇌가 있었다. 또한 배에서 만난 남자가 있다. 백제 출신의 장인, 목인곤이라는 사람이다. 셜록 옆의 왓슨처럼 둘은 함께, 따로 사건의 실마리를 쫓아, 사라진 범인을 잡고, 숨겨진 비밀을 풀어헤칠 것이다.
소설에서는 네 개의 사건을 처리한다. 귀국하는 배위에서 생긴 의문의 살인사건, 금성(경주)의 대저택에 칩거하는 전쟁영웅 집안의 숨겨진 진실, 신라 여성들의 일상을 엿볼 수 있는 길쌈대회에서 일어난 소소한 사건, 그리고 드디어 신라의 왕이 베푸는 연회장에서 발생한 의문의 익사사건을 마주하게 된다. 설자은은 감과 촉으로, ‘왓슨’ 목인곤은 장인의 솜씨와 여유로 미스터리를 파헤쳐나간다.
정세랑 작가는 펜데믹 기간 장르소설, 즉 추리소설의 재미에 흠뻑 빠졌던 모양이다. 그것도 당대의 잔혹살인사건이 아니라, 시간을 꽤 거슬러 올라가, 그 시대의 한 인물이 되어 추리력을 뽐낸다. 이 책은 한 편의 소설 같은데, 각기 다른 방식으로 엮은 연작이다. 작가는 계절마다 경주를 찾아, 다음 이야기를 건져올 것이라고 한다. 그래서 설자은 시리즈가 3권이 될지, 10권이 될지 모르겠단다. 네덜란드 사람이 쓴 [적인걸 이야기](적공시리즈)나, [판관 포청천], 그리고 꽤 흥미로웠던 시리즈 [조선명탐정]처럼 ‘설자은’도 풍성한 프랜차이즈의 주인공이 되기를 기대한다. 경주는 넓고, 역사는 흥미로우며, 사건은 미해결이고 사체는 미발굴인 게 많을 테니. 참, 정세랑 작가는 역사교육과 출신이란다.
▶설자은, 금성으로 돌아오다 ▶정세랑 지음 ▶문학동네/ 296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