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를 빨리 감기로 보는 사람들
지금도 있는지 모르겠지만 아주 오래 전 속독학원이란 게 있었다. 초등학생 시절 방학 기간에 두 달 정도 다녔다. 오로지 책을 빨리 읽겠다는 일념으로. 눈동자를 좌우로 왔다갔다하고, 대각선으로 훑고, 도형을 째려보는 ‘안구 혹사’훈련을 했던 것 같다. 어떻게 까만 글자가 가득한 페이지를 한 번에 쑤~욱 뇌리에 집어넣을 수가 있단 말인가. 그런데 그때 주산의 신동이었던 친구는 한 페이지가 가득한 숫자 덧셈을 정말 한 번에 쓰윽 계산해 내는지라 ‘속독’이 가능하리라 생각했었다. 그리고, 요즘 이런 게 등장했다. ‘영화를 빨리 감기로 보는 사람’!
일본 칼럼니스트 이나다 도요시(稲田豊史)가 흥미로운 책을 내놓았다. 작년에 우리나라에도 번역 출간되었지만 늦게나마 소개한다. 이나다 도요시는 영화배급사를 거쳐 일본의 유명 영화잡지인 키네마순보의 DVD잡지의 편집장을 거쳐 독립 칼럼니스트로 활동하고 있단다. 그가 잡지에 「‘영화를 빨리 감기로 보는 사람들’의 출현이 시사하는 무서운 미래」라는 칼럼을 기고하여 큰 반향을 일으켰다. 그리고, 이와 관련된 후속 취재를 더해 단행본을 낸 것이다. 꽤나 흥미롭다.
저자가 보기에 사회현상이라고 할 만큼 특이현상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일부 성질 급한 사람만이 아니고, 의외로 많은 사람들이 이런 시청각 행태를 보인다는 것이다. 저자가 대학 강의를 할 때 학생들을 상대로 한 설문조사에서 ‘빨리 감기를 자주 한다’와 ‘때때로 한다’라고 응답한 비율이 66.5%라는 것이다. 이것은 시작에 불과하다. 이나다 도요시는 그렇게 하는 이유와 그것이 보여주는 시대상, 그리고, 미디어업계의 미래에 대한 통찰력 넘치는 진단을 한다. 요즘 사람들이 그렇게 비디오를 보는 이유는 ‘봐야할 작품이 너무 많다’는 것이다.
예전 같이 비디오를 빌려보든, DVD를 사서 보든, 유료 영화채널에 가입하든, 극장에서 보든 돈이 ‘많이’ 든다. 그런데 요즘은 넷플릭스 같은 OTT를 이용하면 ‘상대적으로’, ‘정말’ 저렴한 비용으로 엄청난 양의 영화나 드라마, 애니메이션을 즐길 수 있다. 그런데 볼 게 많다보니 향유하는 방식에서 변화가 생겼다는 것이다. 시간의 가성비를 따지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일본에서 유행하는 ‘타이파’(타임 퍼포먼스)를 꼼꼼히 따진다는 것이다.
언젠가부터 넷플릭스에서 1배속이 아니라, 1.2배속, 1.5배속씩으로 빨리 돌려보는 버턴이 생겼고 그것을 활용하는 이용자가 늘었다. 예전에 비디오(VHS/베타)시절에도 속도를 올리고, 조그셔틀로 화면 빨리 훑는 기능이 각광받기도 했었다. 일반적으로 영화를 오롯이 ‘감상’하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후다닥’ 넘기게 된 것은 왜일까?
예전에 근엄진하게 ‘작품을 감상한다’는 것은 이제 ‘콘텐츠를 소비한다’고 표현한다. 유튜브에는 ‘패스트무비’라고 두 시간짜리 영화나 수십 편의 에피소드, 시즌을 압축한 영상물이 넘쳐난다. ‘몰아보기’ ‘줄거리 영상’ 등이다. 저작권문제와는 별개로 이런 영상이 소구되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코로나 시대를 거치면서, 개인의 라이프스타일이 바뀌었을 수도 있을 것이다. 친구와 만나 이야기를 나눌 때 화제의 중심은 여전히 ‘어제 본 TV드라마’거나 ‘요즘 핫한 넷플릭스’일 것이다. 적당히 알고, 적절히 맞장구 쳐주기 위해서 ‘후다닥 시청’이라도 필요한 모양이다.
저자는 주의 깊게 관찰해본 결과, ‘건너뛰는 지점’과 ‘이용자의 기대치’를 조금 파악할 수 있었단다. K드라마든 일본 애니이든 ‘쓸데없이 배경’이 많고, ‘대사 없는 시츄에이션’이 불필요하게 느껴진다는 것이다. 그런 부분을 굳이 볼 필요성을 못 느낀다는 것이다. 스토리만 알면 되는 ‘불필요한 요소’는 배제시키는 쪽으로 접근하게 된단다. 한 각본가의 말은 “상대방을 좋아하면서도 겉으로는 ‘싫어’라고 말하는 묘사가 지금은 통하지 않아요.”란다.
어느 정도의 규모인지는 모르겠지만, 이런 변화는 제작사를 당황하게 만들었고, 시나리오 단계에서부터 변화가 생긴단다. ‘설명식 대사’가 많이 늘어나고 있단다. “이해하기 쉽게 만들어달라”는 제작사의 주문이 있단다. 그래서 요즘 시나리오는 친절하게 대사로 다 설명해줘야 한단다. 그러다보니 제목도 만연체가 많아진다. 그게 유행인지, 대세인지, 그런 측면에서 바라본 것이다. 아마 [전생했더니 슬라임이었던 건에 대하여]라는 제목을 들었을 때의 충격일 것이다.
저자는 ‘오타쿠’, ‘덕질’, ‘최애’ 같은 용어에 대해서도 변화된 분석을 한다. 사실 ‘오타쿠’라는 말은 ‘사회성이 떨어진 지질한 놈’이라는 느낌이 많았지만 지금은 ‘특화된 취미생활 향유자’로 받아들인다.
사실, 이 책을 읽으면서 가장 공감한 대목은 ‘평론을 읽지 않는 시대’가 되었다는 것이다. 일본에서는 영화평론서가 팔리지 않는단다. 우리나라도 별반 다르지 않을 것 같다. <씨네21>에서 해마다 영화평론가를 뽑고 있지만 영화관객들이 영화를 선택할 때 ‘영화평론가’들의 의견을 참조하지는 않는다는 것은 영화관계자들은 다 알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한때 영화잡지가 홍수를 이루던 시절이 있었지만 이젠 ‘전문가의 고견’보다 ‘커뮤니티의 한 줄 평’에 더 공감한다. 영화평만 그런 것이 아니라 이제 ‘서평’도 같은 신세라고 한다. 신문이든 잡지든 진지한 서평은 사라졌고(물론 있기는 하다. 영향력이 없어졌다는 말일 것이다), 대신 예능프로그램에서 셀럽이 옆구리에 끼고 있다 한 번 노출된 책이 더 각광받는 시대가 되었다.
이나다 도요시의 책 <영화를 빨리 감기로 보는 사람들>을 총괄하자면 영상작품의 공급과다와 시간가성비를 지향하는 현대인들이 보기 적절한 콘텐츠를 지향한다는 것이다. 그 배경에는 ‘얕은 감상’과 ‘알기 쉬운 것’을 추구한다는 흐름이 있다고 지적했다.
이 말에 동의하든 않든 크리에이터와 업계종사자들은 그런 ‘현대인’을 타깃으로 비디오/콘텐츠를 만들 것이고, 유튜버와 틱톡은 그 물건을 더욱 줄이고, 압축하고, 야마(!)만 뽑아 유통시킬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 <토지>를 다 읽을 것이고, <연희공략>을 다 볼 것이고, < FILO>매거진에 도전해 볼 것이라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분명.
▶영화를 빨리 감기로 보는 사람들 (원제:映畵を早送りで觀る人たち) ▶이나다 도요시 지음/ 황미숙 번역 ▶현대지성/2022년 11월 출간/232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