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9년 1월 1일 타이틀곡 ‘어머님께’로 데뷔한 지오디(god)는 ‘고생과 의지’의 아이돌그룹이다. 멤버 윤계상은 데뷔 준비 단계의 고달픔 때문이었는지 음악을 그만두고 연기자로 새로운 길을 모색한다. 2004년, SBS 드라마 <형수님은 열아홉>과 영화 <발레교습소>에 출연하며 가수보다는 연기자를 꿈꿨다. 이제 연기경력이 15년 되는 연기자이다. 많은 영화 팬들은 작년 <범죄도시>의 장첸을 연기한 윤계상을 다시 보기 시작했다. 그가 2019년 새해 벽두에 ‘말모이’라는 영화로 돌아온다. 장첸만큼 특이하다면 이 영화에서 그가 안경을 쓴다는 것. 그의 변신을 직접 들어보았다. 영화개봉을 앞두고 진행된 라운드인터뷰였다. 지난 연말 진행된 인터뷰에는 10여 명의 기자가 둘러앉았는데, 영화이야기 반, 지오디이야기 반이었다.
‘말모이’는 일제강점기 시절 우리말을 지키기 위해, 제대로 된 한글사전을 만들기 위해 분투하는 조선어학회(한글학회의 전신)의 목숨을 건 ‘사전편찬 작전’을 담고 있다. 윤계상은 류정환을 연기한다. 한때는 조선을 위한 교육자였기에 존경해 마지않았던 아버지(송영창)가 친일파로 변절하자 더욱 ‘조선어사전 편찬’이라는 민족적 과업에 매달리는 인물이다.
영화를 선택하게 된 이유는?
“이야기의 힘이 좋았다. 류정환이라는 인물도 궁금했다. 시나리오에서는 어떤 인물인지 알겠지만 실제 연기하기는 어려웠다. ‘말모이’라는 이야기 자체가 모르는 내용이었고, 궁금하기도 했다.”
영화제목 ‘말모이’는 한글학자 주시경 선생이 1911년부터 사전편찬을 위해 모으기 시작한 국어사전의 초기 원고이다. 이후 조선어학회에서 이 원고를 바탕으로 본격적인 조선어사전 편찬사업을 펼친다. 서슬 퍼런 일제강점기에 말이다.
“말들이 어려웠다. ‘말은 우리 민족의 정신이요’ 뭐 이렇게 이야기하는 게. 문어체여서 힘들었다. 좀 바꾸고 싶었지만 정환이가 가진, 그 당시 시대배경을 생각하면 그게 맞을 듯하다. 감독님은 그게 정환스럽다고 말씀하셨다. 정환이의 전사(前史)가 나오지만 희망이 보이지 않는 시대였다. 그런 걸 표현해야하는 것이 어려웠다. 조금만 잘못해도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으니. 연기를 하면서도 불안감이 있었다.”
윤계상은 배우에겐 자극이 되는 이번 영화가 너무 마음에 들었다고. “한곳에 머물러 있으면 안 될 것 같았다. 배우로서 다른 것을 하고 싶은 약속. 내겐 강박 같은 게 있었다. 그래서 더욱 열심히 연기한 듯하다.”
윤계상이 연기한 인물은 누구일까. “한글학회의 사전만들기 작업에는 여러 사람이 관여했다. 감독님이 자료를 많이 주셔서 사전에 공부를 많이 했다. 내가 연기한 류정환이라는 캐릭터는 여러 선생님을 합쳐 놓은 상황이어서 딱 누구라고 말하기가 힘들다.”
연기할 때 가장 힘들었던 지점은
“오랫동안 수집한 자료를 모두 압수당했을 때. 감정이 올라오니까 현장에서 소리도 많이 지르고 미치겠더라. 연기를 하면서 그렇게 펑펑 울기는 처음인 듯하다. 통곡 수준으로. 완전 오열했다. 10년 동안 모아놓은 자료들을 한 순간에 잃는다는 것이 참을 수가 없었다.”
가장 힘들게 연기한 장면이 그 장면인가?
“중반부에 등장하는 ‘민들레 이야기’ 장면을 스물 번 넘게 찍은 것 같다. 배우에게 테이크를 그렇게 많이 하도록 한 것은 대단한 기회를 주신 거다. 에너지를 바닥까지 다 썼다. 그 때가 그립다. 언제 또 그런 기회가 주어질까 싶다.”
유해진과는 <소수의견>이후 다시 한 번 호흡을 맞추었다. (‘소수의견’은 용산참사를 다룬 영화로 윤계상은 국선변호사를, 유해진은 이혼전문변호사로 팀을 이룬다)
“유해진 선배님을 존경하고, 절대적으로 신뢰한다. 시나리오가 왔을 때 유해진 형님이 이미 캐스팅되었다고 하더라. 너무 행복했다.”
여전히 따라다니는 ‘아이돌 출신 연기자’, 윤계상은 연기에 대한 속 깊은 생각도 털어놓았다.
“사실 연기에 자신감이 없어요. ‘범죄도시’에 이어 ‘말모이’에 나오지만, 배우로서 어떻게 연기했다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이고 잘했다 못했다고 하기엔 너무 힘들다. 항상 드는 생각은 더 잘 할 수 있었는데 하는 후회밖에 없다. 매력적으로 연기할 수 있는 부분이 좀 더 있지 않을까 고민이 든다.”
“이제 연기경력 14년차이다. 미친 듯이 예민해지는 것 같다. 그런 의미에서 작년 너무 행복했다. 자만했던 시절도 있었고. 이제는 그런 고민과 불안했던 시간들이 합쳐지는 것 같다. 그 때 느꼈던 감정들이 하나도 버릴 것이 없구나 생각한다. 너무 좋은 시간을 보낸 것 같다. 14년을. 그 진정성과 절실함. 꿋꿋하게 지킨 것이라고 생각한다.”
‘말모이’는 ‘택시운전사’의 극본을 썼던 엄유나 감독의 데뷔작이다. “신인감독이랑 작업하면 좋은 점이 있다. 신인 때에만 느낄 수 있는 에너지. 그때 밖에 못 보는 것 같다. 열정, 이런 것을 좋아한다.”
윤계상은 첫 영화(발레교습소,2004), 첫 촬영에서 울었던 ‘지질한 기억’을 떠올린다.
“아직 기억난다. 현장의 에너지에 숨이 막힐 것 같았다. 지오디를 벗어난 바로 그 시절이었다. 제가 뭐라고. 주위에서 너무 애쓰는 게 느껴졌다. 감독님도, 매니저도. 연습실 빌려 몇 달간 연습을 했었다. 그때 감동을 너무 많이 받았다. 끝나고 함께 맥주 마시며 울었다. 찌질하게. 이 많은 사람들로부터 나 한 사람이 케어를 받는다는 게. 그때는 연기가 뭔지도 모를 때였고, 재계약할 때 오해도 많았고, 감정이 많이 업 되었던 것 같다.”
윤계상은 ‘풍산개’(2011) 때 즈음하여 자신의 찌질함이 바닥을 친 것 같다고 표현한다.
“찌질함은 결핍이다. 연기자는 그런 감정의 밑바닥까지 가봐야 아는 것이다. 생각도 못했던 사실성이 첨가되어 연기에 나타나는 모양이다. 디테일이 살아난다. 그게 좋은 감정으로 남는다.”
지오디 이야기로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지오디랑 다시 뭉쳤을 때도 좋은 것은 돈을 버는 게 아니라, 그들과의 추억을 같이 한다는 게 좋았다. 스타로서 윤계상은 고맙긴 한데 그게 전부인 것은 아니다.”
안무가 틀렸는데.
“제가 너무 많이 틀렸다. 그래서 더 죄송하다. 20년 동안 해온 안무를 틀리는 시기가 된 것 같다. 순간순간 잊어버린다. 마흔 살 넘으니 순간순간 까먹는다.”
팬들은 여전히 떼창으로 화답한다.
“연기자는 작품으로 평가받지만, 가수는 본질 그 자체인 것 같다. 팬들도 ‘노래가 좋아요’라기 보다는 여전히 ‘오빠 좋아요’라고 말한다. 내가 아직도 사랑을 받는다는 말일 것이다.”
다음 작품은?
“‘유체이탈자’라고 <심장이 뛴다>를 연출한 윤재근 감독의 신작이다. 하고 싶었던 액션물이다. 현란하다. 만화 같은 작품이다. 힘들어질 것 같다.”
이날 인터뷰가 끝나자 기자들의 사심대결이 펼쳐지기 시작했다. 한 여기자가 오래된 지오디 공연DVD에 싸인을 요청했다. “엄마가 부탁했어요.”란다. 윤계상의 대답. “오, 그래요? 내일 지오디 멤버들 다 만나는데, 싸인 다 받아줄게요.”란다.
다시, 영화 ‘말모이’를 하고 달라진 게 있다면? “그 당시(일제강점기), 그 분들(조선어학회)의 엄청난 노력과 희생, 사명감을 어찌 제가 흉내 낼 수 있겠는가. 그저 영화로 잘 보일 수 있도록 노력했다. '말모이'를 하면서 공연현장이나 영화촬영장에서 일본어 잔재가 많다는 걸 새삼 깨달았다. 가급적이면 우리말로 쓰려고 노력했다. 광화문을 지나다가 한글 간판을 보면 괜히 마음이 뿌듯해진다. 영화를 찍으며 그런 마음이 생겼다.”
영화 <말모이>는 9일 개봉한다. 참, 이날 윤계상과 인터뷰가 진행된 곳은 종로구 소격동의 한 카페였다. 그곳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옛 조선어학회 터(율곡로3길)가 있다. 지금은 표지석만이 남아있다. 혹시 삼청로-한옥마을 근처를 가시는 분들은 이곳에서 인증샷을 남기는 것도 뜻깊은 일 것이다. (KBS미디어 박재환)
[사진=롯데엔터테인먼트/ 더램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