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와이 슌지(岩井俊二) 감독은 한국 영화팬에게 인기가 높다. 21세기 들어, 일본대중문화가 개방되며 그 첫 수혜자로 기록될 것이다. 나카야마 미호가 설산에서 “오겡끼데스까? 와따시와 겡끼데스”라고 소리치는 <러브레터>(1995)가 개봉되고 이후 그의 작품이 적잖이 소개되었다. 그가 영화감독이 되기 전에 찍은 TV드라마, 단막극인 ‘쏘아올린 불꽃, 밑에서 볼까? 옆에서 볼까?’, ‘프라이드 드래곤 피쉬’, ‘언두’, ‘피크닉’ 등도 등달아 매니아의 부름을 받았다. 이와이 슌지의 신작 <키리에의 노래>가 지난 달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소개된 뒤 곧바로 극장에서 개봉되었다. 이와이 슌지 감독은 부산에 이어 최근 서울을 찾았다. 순정만화 같은 감성영화를 만들고 있는 이와이 슌지 감독을 만나 영화이야기를 들어보았다. 영화 <키리에의 노래>는 2011년 동일본대지진을 피해자가 메인 캐릭터이다. <스즈메의 문단속>과는 또 다른 ‘재난극복’ 영화이다.
“처음 서울에 온 것은 7년 전이었다. 그 때는 날이 추워 옷을 여러 겹 입었던 기억이 있다. 오늘은 날이 따뜻해서 좋다.”며 인터뷰가 시작되었다. (인터뷰는 이달 초 진행되었다)
Q. ‘러브레터’가 여전히 한국에서 많은 관객들에게 인생 멜로로 손꼽히고 있다.
▶이와이 슌지 감독: “‘러브레터’는 서른 살 정도에 만든 작품이다. 30년 정도가 지났는데 아직도 저의 예전 영화를 기억해주는 사람이 있다는 점에 감사드린다. ‘러브레터’는 저와 한국 팬을 이어준 작품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인생을 되돌아 봤을 때 기적 같은 영화라고 생각한다.”
Q. 한국에 소개되는 <키리에의 노래>는 러닝타임이 119분 버전이다. 러닝 타임을 줄이면서 특별히 신경을 쓴 부분이 있다면?
▶이와이 슌지 감독: “무엇보다도 ‘아이나 디 엔드’의 노래를 많이 들려주고 싶었다. 그래서 세 시간을 두 시간으로 편집하면서 가능한 노래를 많이 줄이지 않는 방향으로 신경을 썼다.”
Q. ‘키리에’ 역의 아이나 디 엔드가 지닌 목소리의 어떤 점이 ‘키리에’라는 캐릭터를 완성시켜 줄 거라 생각했는지?
▶이와이 슌지 감독: “이번에 키리에 노래 만들 때 오마주 한 작품이 있다. 오래된 일본영화가 있다. <오린의 노래>(원제:はなれ瞽女おりん,1977)라는 작품이다. 내가 중학교 때 본 영화이다. 일본에는 ‘고제’(瞽女)라는 맹인(시각장애인) 예능인이 있다. 전국을 돌면 샤미센을 연주한다. 전설 중에는 그런 고제 중에 굉장히 샤미센 연주를 잘 하는 사람이 있는데 그 사람이 연주를 하면 모든 집의 창문이 흔들릴 정도로 전율이 일었다는 소문이 있을 정도이다. 아이나 디 엔드의 노래를 들었을 때 그 이야기가 떠올랐다. 제 머릿속의 가수의 모습과 겹쳐졌다. 그래서 캐스팅했다.”
Q. <러브레터> 이전 TV드라마, 단막극을 찍었고, 오랫동안 소설도 쓰고 영화도 만드는 작업을 이어왔다. 어떻게 보면, 감독님은 '이와이 월드'를 누린 것 같다. 넷플릭스 같은 스트리밍 서비스가 영화산업을 변화시키고 있는데, 감독님은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자신의 작품 세상을 펼쳐나갈지?
▶이와이 슌지 감독: “영화나 영상작품을 만드는 사람의 입장에서 보자면 영상업계는 격하게 변하는 곳이다. 비유하자면 카약 같은 아주 작은 배에 몸을 싣고 격랑 속을 헤쳐 나가는 각오로 작업하고 있다. 여유를 갖고 작업을 한다는 생각을 할 수 없다. 그래서 고된 것 같다. 최근엔 A.I.도 나오고 해서 이 업계가 상상도 못한 시대로 접어들 것 같다. 그 속에서 제 나름대로 할 수 있는 표현이나 방식을 찾으려고 한다.”
Q. 2011년 일본 후쿠시마 지진 이후 이를 애도하는 여러 영화가 나오고 있다. 감독님에게 2011년은 어떤 기억으로 남아 있는지
▶이와이 슌지 감독: “동일본 대지진이 일어났을 때 일본이 큰 상처를 입었다고 생각했다. 그 뒤로 정말로 많은 생각을 했다. 재해에 관한 다큐멘터리도 만들기도 했다. 그리고 ‘꽃은 핀다’라는 노래도 만들어서 10년 동안 피해지역 관련 프로젝트에 참여했다. 실제 재해가 일어난 그날 하루보다 그 뒤 아주 긴 시간 동안 일본을 생각하고 느끼면서 오늘에 이르렀다. <키리에의 노래>가 나온 것은 2023년이다. 재해가 일어나고 12년 동안 나름대로 세상을 바라보며 걸어온 것 같다.”
Q. 츠나미가 몰려올 때 언니 키이라가 동생 루카를 찾기 위해 사방을 헤맨다. 다리에서 루카를 만나고, 츠나미가 몰아닥치는 순간을 흑백 스틸 한 장면으로만 처리한다. 이유가 있는지. 만약 더 세밀하게 이야기한다면?
▶이와이 슌지 감독: “특별한 이유가 있었다기보다는 츠나미가 밀려오는 그 지점에서 이야기가 한 단락 지어진다는 느낌으로 흑백으로 보여드렸다. 구상 단계에서는 그 뒤 이야기가 있기 한다. 어린 루카가 혼자 구출되는 이야기도 있고, 나츠히코가 계속 달려가서 재해 현장에 도착하는 장면도 있었다. 영화를 만들면서 모두 넣지 않기로 했다. 소설에서도 츠나미가 밀려온 뒤의 구체적인 이야기는 넣지 않았다. 재해에 관해서는 나침판과 같다고 생각했다.”
Q. ‘키리에’라는 이름에 대해.
▶이와이 슌지 감독: “키리에 집안은 크리스천이다. 종교적인 집안이란 것을 초반부터 생각했었다. ‘키리에’에는 미사곡의 의미도 있다. 모차르트의 ‘레퀴엠’에 ‘키리에’ 파트가 있다. 동시에 키리에는 일본의 여성 이름으로도 이상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이름으로 사용한 것이다.”
Q.기억에 남은 장면?
▶이와이 슌지 감독: “이 작품에는 모든 장면에 추억이 있다. 아이나 디 엔드와 히로세 스즈, 두 사람이 설원을 뒹굴며 노래하는 첫 장면은 이 영화의 크랭크인 장면이기도 하다. 아직 눈이 남아있을 때 그 장면을 찍어야 했다. 아이나 디 엔드가 ‘사요나라’를 부르고, 히로세가 그 노래를 듣고 있는 장면을 보면 영화의 모든 것이 담긴 것 같은 특별한 느낌이 든다. 그래서인지 첫 장면부터 마음이 숙연해졌다. 그 장면은 오프닝뿐만 아니라 엔딩을 장식했다.“
Q. 일본관객들의 반응은 어땠는지. 소개해 주신다면.
▶이와이 슌지 감독: “제가 지금까지 만든 영화 중 이렇게 많은 리뷰를 받은 게 있나 싶은 정도이다. 영화의 여운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다음 날에도 울고 있다는 내용이 많았다. 내가 그렇게까지 여운이 남는 영화를 만들지는 않았는데 생각했다. ‘내가 감수성이 약해졌나?’ 이 나이가 되니 영화를 보고 우는 일은 없어진 것 같다. 그런 관객들의 순수한 감수성이 부러웠다.”
Q. 엔딩 크레딧에서 보여주는 영상에 대해.
▶이와이 슌지 감독: “엔딩에서는 어린 루카의 노래 소리도 들려오고 지금의 키리에의 일상을 보여준다. 영화에서는 키리에의 진짜 일상을 보여주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마지막에 키리에가 어떻게 살고 있는지, 어떻게 여행하고 있는지 제대로 보여주면서 관객들을 천천히 일상으로 돌려 보내주고 싶었다. 노래가사에는 ‘지금 이곳을 걷고 있어..’라는 내용이 나온다. 이 영화가 진짜 그리고자 한 것이다. 훌륭한 장소를 걷거나, 완벽한 미래의 성공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지금 이 곳을 걷고 있다는 것 자체가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시대적인 변화라고 이야기할 수 있다. 과연 프로페셔널한 가수가 되어 성공하는 것만이 이 영화의 엔딩일까. 업계에서 인정받고, 노래가 대성공을 거두는 것이 그 소녀의 성공은 아닐 것이다. <키리에의 노래>에서는 성공하는 이야기는 하나도 그려지지 않는다. 그런 현재의 모습을 느낄 수 있는 것이 어쩌면 이 영화의 클라이막스라고 생각했다.”
Q. <러브레터>도 <키리에의 노래>에도 죽은 사람 이야기이다. 특별한 이유가 있는지.
▶이와이 슌지 감독: “<키리에의 노래>에서는 죽은 자와 산 사람, 1인 2역을 시키는 것은 이야기 흐름에 필요했다. 그리고 저는 어릴 때 생물학자가 되고 싶어했다. 사람들을 생물학적 관점에서 보는 습관이 있었다. 부모가 나와 공유된다고 생각했다. 형제자매도 이어져 있다는 차원이 아니라 어떤 부분이 같다고 생각하고 살았다. 윤회(輪回)에 대해서도 실제로 그런 게 일어나고 있다고 생각한다. 보통 윤회하면 전생(轉生)하여 아예 다른 인간이 된다고 생각하는데 나는 그것이 아니라 말하는 사람이 계속해서 이어진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어떤 면에서 가족은 ‘클론’ 같은 면이 있다고 본다. 도플갱어나 쌍둥이처럼 어딘가 살고 있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고, 젊었을 때부터 그런 걸 작품에 표현하고 싶었다. 이번 영화에서도 세 시간 버전을 보면 나츠히코 가족이 모두 모이는 장면이 있는다. 그 장면을 찍기 위해 최대한 얼굴이 닮은 유명한 배우를 모아서 한 번에 보여주고 싶었다. 내겐 그런 것을 표현하고 싶은 경향이 있는 모양이다.”
Q. <러브레터>이후 오랫동안 팬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이와이 슌지 감독: "20여 년 전에 처음 부산을 찾았었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 일본에서 가장 재능 있는 배우와 영화를 만들어 다시 부산을 찾게 되었을 때 감회가 남달랐다. 그 때 <러브레터>를 본 세대뿐만 아니라 다음 세대에 걸쳐 봐주셨다는 것이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러브레터> 개봉 때는 세상에 존재하지도 않았던 세대가 <키리에의 노래>를 봤다고 하니 묘한 감정이 든다. 제가 흡혈귀처럼 나이를 먹지 않는지, 타임머신을 타고 뚝 떨어진 것 같기도 하다. 다양한 관객이 거듭 제 영화를 봐주시면서 인연이 이어진 것 같아 감사드린다.“
Q. ‘이와이 월드’는 어떻게 형성되었나.
▶이와이 슌지 감독: “학창시절 8밀리 필름으로 작품을 찍었었다. 그때부터 직접 손으로 만화를 그리고, 음악도 만들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작업하는 방식은 변한 게 없다. 뮤직비디오도 찍고 TV드라마도 만들고, CF도 찍었다. 그러다가 영화를 만들었다. 나만의 페이스로 작품을 만들었는데 그것을 두고 ‘이와이 월드’라고 불러준다면, 공감했기 때문일 것이다. 기쁘다. 창작은 높은 허들이 아니다. 내가 이렇게도 하고 저렇게도 하며 변함없이 일하는 것이 이 업계에 입문하는 젊은이들에게 본보기가 되는 것 같다. 나도 그런 것에 자극받는다. 이 영화에 나오는 젊은 배우, 재능 있는 신인들에게 자극받고 있다. 만화계에서는 20대 작가에게 자극을 받고 한국에서는 BTS를 보며 자극받는다. 청년들이 제대로 된 형태로 자신을 드러내고 표현하는 방법을 아는 것 같다. 젊은 예술가의 등을 보면서 열심히 쫓아가고 있다.”
<키리에의 노래>는 츠나미가 몰려온 뒤, 그 충격으로 목소리가 제대로 나오지 않는 키리에(아이나 디 엔드)가 음악으로 상처를 치유하고 세상과 소통하는 뮤지션의 성장을 노래한다. 지난 1일 개봉해 절찬상영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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