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품 다큐멘터리의 산실 KBS가 지난 해 9월, ‘안녕, 나의 소녀시절이여’를 시작으로 ‘신의 눈물’, ’집으로 가는 길’, ‘4300km, 한 걸음 나에게로’ 등 네 편의 <순례> 시리즈를 방송하며 시청자들로부터 뜨거운 찬사를 받았다. <순례> 시리즈는 많은 상을 타며 작품성도 함께 인정받았다. 바로 그 ‘순례’의 첫 번째 이야기가 극장판으로 다시 찾아온다. ‘안녕, 나의 소녀시절이여’를 연출한 김한석 피디를 만나 작품이야기를 들어보았다.
‘순례 – 안녕, 나의 소녀시절’은’ 인도 북부, 파키스탄과 중국과 국경이 맞닿아 있는 라다크에 사는 소녀의 출가(出家)기를 담고 있다. 히말라야 산골소녀 ‘쏘남 왕모’는 가난한 가족을 위해 자신의 꿈을 포기하고 비구니로 출가하기로 마음먹는다. 가족의 이야기와 함께 승려로서의 수행을 통해 평범한 소녀의 눈으로 바라보고 겪게 되는 인생의 희로애락을 섬세하게 담아낸다.
라다크, 마모트, 그리고, 소녀의 꿈
우선, ‘마모트’라는 동물이 굉장히 귀엽게 등장한다. “소녀 왕모의 집 근처에 사는 놈이 있었다. 야생이라 원하는 그림이 나오질 않았다. 판공초라고 유명한 호수에서 따로 찍었다. 그쪽에 서식하는 마모트는 관광객 손을 많이 타서 그런지 사람을 덜 무서워하더라. 그런 장면은 따로 찍었다.”
- 왕모네 가족의 이야기가 재연된다. 현장에서는 어떤 식으로 진행되었나.
“오랫동안 접촉을 이어가며 계속 인터뷰를 했다. 그들의 이야기를 듣다보면 재연할 필요가 있는 장면이 있다. 지나간 과거이야기 같은. 꼭 필요한 부분은 협의하고, 그분들의 동의하에 이야기를 담아냈다.”며, “눈표범(설표,雪豹)가 등장하는 장면 같은 것은 영화적 기법을 차용한 것이다.”고 덧붙였다.
보통 다큐멘터리에는 내레이터를 많이 내세우는데. “처음엔 내레이션을 쓰려고 했다. 그런데 찍으면서 그런 게 필요 없겠다는 생각이 들더라. 극중 소녀의 독백은 모두 내가 쓴 원고였다. 주인공 소녀가 읽는 것만으로도 현장에 있는 듯 감정이입이 되더라.”
작품에서 장엄한 설산과 유유하게 흐르는 강물의 모습은 드론을 이용한 ‘직부감’ 촬영으로 효과를 극대화시킨 것 같다.
“인도는 드론 반입금지 국가여서 촬영장비로 가져갈 수가 없었다. 그래서 인도 델리에서 제일 저렴한 걸 구매해야했다. 델리에서 라다크로 이동하다 검문에 걸렸다. 라다크는 인도, 중국, 파키스탄 접경지역이라 꽤 민감한 곳이다. 함부로 못 가져간다. 이걸 왜 가져 가냐고 해서 드룩파 법왕에 드릴 선물이라고 했다. 그런데 막상 그곳에 가니 그들도 드론을 갖고 있더다.”
밤하늘 별이 돌아가는 장면이 환상적이었다.
“한 장 한 장 스틸을 찍어서 연결한 동영상이다. 제가 한 작업이지만, 대형 스크린에서 보니 TV에서 보는 거랑은 완전히 느낌이 달랐다. 자연을 압도하는 풀 샷은 제가 만들었지만 굉장하다.”
김한석 감독은 KBS의 또 다른 명품 다큐 ‘색, 네 개의 욕망’의 ‘블루’를 연출하기도 했다.
이번에 극장에서 상영하며 제목에서 ‘순례’는 빠졌다. “제목이 너무 종교적인 것 같다고 기존 타이틀로 가자는 의견이 있었다.”고 소개한다.
극장판과 TV방송분의 차이가 있다면?
“처음부터 영화판을 염두에 두고 제작했다. 두 가지 버전을 준비한 것이다. 원래는 TV콘텐츠 제작 후 극장상영을 위해 영화판 버전을 만드는 것이 통례인데 우리 프로젝트는 영화를 먼저 생각했었다. 영화로 만들고 TV에서 시리즈로 방영하는 게 전략이었다.” 어쨌든 이 작품은 TV에서 먼저 방송된 뒤, 영화판이 만들어졌다.
영화에 등장하는 라다크는 인도 땅이다. 티베트 이외에 티베트불교가 가장 많이 보존된 곳이다. 작품에 등장하는 드룩파(Drukpa)는 티베트불교의 한 종파이다.
이곳에서 이런 작품을 찍게 된 계기가 있나? “유튜브에서 ‘패드 야트라’ 영상을 우연히 보게 되었다. 원래 <순례>를 같이한 윤찬규 선배가 불교에 조예가 깊었다. 그런데 종교적 순례 이야기만 하기가 너무 어려웠다. 인간의 이야기에 초점을 맞추고 싶었다. 그래서 ‘출가할 소녀’를 찾게 되었고, 연락해서 어렵게 선정한 것이다.
“이 지역에선 한해 2천명 이상이 출가한다”면서, “비구니들과 이야기를 나눠보니, 가정형편보다는 종교적 의미로 출가하는 분이 많다고 한다. 이곳에선 그야말로 종교가 생활이다.”고 현지 분위기를 소개한다.
패드 야트라를 카메라에 담다
촬영하며 가장 힘들었던 장면은? “물론 패드 야트라이다. 저랑 촬영감독, 현장 코디, 운전사. 이렇게 넷이서 촬영했다. 패드 야트라는 인원도 많고. 커버할 지역이 넓어서 촬영감독 셋, 현지 조연출까지 합류해서 다섯 명이 찍었다. 그런데, 5천 미터 넘는 고지에서 촬영감독들이 다 쓰러졌다. 승려들도 쓰러지는 형편이니.”
김한석 감독은 보름동안 이들과 함께 걷고, 자고, 먹고, 생활하며 ‘패드 야트라’ 여정을 팔로우 했다. “촬영이 끝난 뒤 체중이 8킬로 빠졌더다.”라는 말에 그 고생이 느껴진다.
왕모 가족이 모여앉아 수제비 같은 현지음식 ‘츄때기’를 먹는 장면이 있었다. “맛이 어땠나?”고 물어봤다. 김 피디, “사실, 인도음식은 내 입에 안 맞았다. 고수 특유의 향 있잖은가.”
찍다 보면, 어린 나이에 종교에 귀의하는 산골 소녀가 측은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던가? “그런 삶은 그들이 선택한 것이다. 그들은 그것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것 같다. 어찌 보면 산골짜기에 갇혀 사는 것보단 더 많은 기회가 주어진다. 종교적으로, 신앙심으로 출가하는 경우도 있지만.”이라면서, “어린애들이 종교적 신앙이 얼마나 있겠어요. 영화에선 그건 상징일 뿐. 작품에서는 소녀의 삶에 더 파고들었다.”고 덧붙인다.
영화판은 감독의 시점으로 시작하다. 소녀를 만나며 펼쳐지는 이야기이다. 극장판 엔딩 크레딧 올라갈 때 소녀 왕모가 친구와 히치하이크 하는 장면이 나온다. “친구 까르장과의 이야기가 많았는데 다 담지 못해 아쉬웠다. 그래서 고민하다가 ‘좋은 이미지’로 작품을 끝내는 것보다는, 두 소녀의 열린 결말을 선택했다.”고 한다.
김한석 피디는 <순례> 시리즈의 3편 ’집으로 가는 길’도 연출했다. 그 작품은 어땠나. “개인적으로 3편에서 실험적인 시도를 더 많이 했었다. 그리고 3편이 스토리가 훨씬 많고, 색감도 풍성하다. 극단적인 상황이 나열되어 드라마틱하다. 다시 보니 너무 힘들더라.”란다.
김한석 피디는 지금까지 KBS가 찍은 자연 다큐멘터리를 모아 새로 가공하는 큐레이션 프로그램 작업을 하고 있다고 한다. 앞으로 계획은? “‘순례’라는 큰 시리즈를 이어가고 싶다. 어디를 향해서 걸어가는, 연작시리즈로 해보고 싶다. 기존 다큐형식이 아닌 영화적인, 드라마같은 구성을 가진 새로운 장르로 해보고 싶다.”
김한석 피디는 전직이 조금 이채롭다. 원래는 카메라맨으로 입사했다가 다큐PD가 되었단다. 카메라를 한 10년 하다가 처음 맡은 작품은 ‘6시 내고향’이었다고. 첫 다큐 작품을 물어봤다.
“2005년 방송된 ‘환경스페셜’의 ‘교실은 숨 쉬지 않는다’이다. 교실 내 미세먼지를 다룬 작품이다. 원래는 유아원/유치원 미세먼지를 다루고 싶었는데 취재가 어려워 교육청 협조로 교실을 찍었다.”
촬영감독 출신이면 대상을 보는 눈이 남다를 것 같다고 하자 손을 휘휘 내저으며 “전혀 그렇지 않다”며, “나의 지론은 카메라 장비는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다. 장비보다는 얼마나 더 많은 스토리가 있나, 좋은 구성을 하냐에 작품의 완성도가 달려있다.”고 강조한다.
김한석 피디는 “이런 작업을 계속 하고 싶다. 시청자에게 위안을 주고, 통찰을 줄 수 있는 프로그램이 너무 적은 것 같다. 내 스스로를 돌아보고 내 삶의 가치를 되돌아볼 수 있게 하는 그런 프로그램을 계속 만들고 싶다.”고 말한다.
야생/자연 다큐이다 보니 카메라에 담은 것을 다 보여줄 순 없었단다. 왕모의 어린 동생이 어린 양들에게 둘러싸인 너무나 푸근한 장면을 이야기하다가 이런 이야기를 꺼낸다. “걔들은 이상하게 산에 가서 새끼를 낳더라. 그런데 너무 추워 동사하는 경우도 많았다. 그런 장면은 넣을 수가 없었다. 대신 유쾌한 시퀀스로 (새끼양과 노는) 그 장면이 들어간 것이다.”란다.
‘순례’ 타이틀 대신 ‘안녕, 나의 소녀시절’을 사용하니 대만 청춘영화가 떠오른다고 하자 감독은 “사실, TV방송 때 쓴 제목이다.”며, “젊은 사람을 대상으로 소녀의 감성적 이야기를 들려주려는 듯하다. 그런데 사실 나는 어릴 적 우리 누나들의 모습을 떠올렸다. 어렸을 때 ‘식모’라고 부르던, 누나들의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그런 70년대의 우리네 삶과 비슷한 보편적인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4-50대 분들이 공감을 많이 해 주셨으면 한다.”고 이 영화를 바라보는 정서를 대변했다.
UHD가 잡아낸, 누나의 거친 얼굴피부, 추위에 손이 튼 어린 동생의 튼 손등을 보면 고달픈 우리의 한 시절을 연상케 한다. KBS 명품다큐 <안녕, 나의 소녀시절이여>는 12일 개봉될 예정이다. (KBS미디어 박재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