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준호 감독은 2019년 <기생충>으로 세계를 흥분시켰다. 그의 첫 작품은 무엇일까. <플란다즈의 개>(2000) 전에, <지리멸렬>(1994)이 있었고, 그 전에 <백색인>(1993)을 만들었단다. 그런데 그 전에 단편이 하나 더 있‘었’단다. 영화모임에서 단편 스톱애니메이션을 만들었단다. 제목은 ‘Looking for Paradise’(룩킹 포 파라다이스). 그 필름/영상이 남아있을까? 봉준호가 가입했다는 그 모임의 멤버들은 기억할까. 1977년, 가난 때문에 공부 대신 미싱을 탔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40년 만에 담은 <미싱타는 여자들>을 만든 이혁래 감독이 ‘30년’만에 ‘봉준호’와 그 영화모임 ‘노란문’과 화제의 단편 ‘룩킹 포 파라다이스’를 행방을 담은 다큐멘터리 <노란문: 세기말 시네필 다이어리>를 완성했다. 부산국제영화제 상영에 이어 오늘(27일) 넷플릭스를 통해 공개된다. 이혁래 감독을 만나 ‘그 때 그 사람들, 그 때 영화들’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Q. [노란문]은 어떻게 만들게 되었나.
▶이혁래 감독: “작년 1월 20일 <미싱타는 여자들>이 개봉되었다. 2월 중순쯤에 상영관이 관객이 줄어들 때 이 영화를 제작한 김영옥 대표(브로콜리픽쳐스)의 전화를 받았다. ‘노란문’이 30년 되었다는 것이다. 오랜만에 사람들 연락해서 만나서 술자리를 가졌다. 그때 모인 사람이 최종태 감독, 이동훈씨, 김영옥 대표 그렇게 넷이엇다. 최종태, 이동훈은 자주 만났었다. 이야기 나누다가 그 시절 함께 영화공부하던 이야기를 했다. ‘봉준호의 필사(筆寫)’이야기도 나왔다. 그런 식으로 영화공부한 사람은 지금 봐서는 ‘얼빵해’ 보이기도 하지만 재밌겠다 싶었다. 자연스레 다큐 만들어볼까 그랬다.”
Q. [노란문] 멤버는 그 시절 대학생들이 주축이었다. 봉준호 감독은 연대생(사회학과)이었다. 이혁래 감독은 어떻게 합류하게 되었나. (이혁래 감독은 서울대 미학과 92학번이다)
▶이혁래 감독: “그 때 친구 중 하나가 연대 사회학과 다녔다. 고등학교 때 영화 보러 다니는 친구였는데 ‘헐리우드 영화의 문제에 대해 이야기하는 강의 시간에 손을 번쩍 들고는 ”저는 배트맨이 걸작이라고 생각합니다“라고 했었던 친구이다. 수업 끝나고 키 큰 선배가 와서는 연대 어느 서점에 와보라는 것이었다. 운동권조직에 끌어들이려나 생각했었단다. 며칠 뒤 우리모임에 한번 와 보지 않을래 해서 가 봤더니 그게 ‘노란문’이었다. 그 친구 소개로 나도 ‘노란문’ 들어간 것이다. 그 당시에는 할리우드에서는 팀 버턴, 한국감독으로는 이명세 감독이 취향이었다. 그런데 난 다큐 감독이 되었다.”
Q. 당시 ‘노란문’ 사무실이 기억나는가?
▶이혁래 감독: “기억난다. 처음 들어갔을 때 이 영화에 나오는 선배들이 거의 다 있었다. TV가 있고, 왼쪽에 원탁이 있는데 꼽슬꼽슬한 머리의 형이 전지에 자를 대고 선을 긋고 있었다. 모나미 볼펜으로. 줄 한 번 긋고는 옆에 휴지에 볼펜 똥을 닦고. 마치 인쇄한 것처럼 선이 가지런하게 나오더라. 그러면서 계속 엄지손가락을 코에 대고 냄새를 맡는 것이 인상적이었다. ‘킁킁. 왜 손톱 밑에서 똥냄새가 나지?’ 하며. 영화에도 나오지만 봉 감독은 주번 같은 역할이었다. 거의 모든 게시물을 봉준호가 담당했었다. 군대에서 차트 만들면서 칭찬받았다고 하더라. 그게 첫 인상이었다. 며칠 뒤에 소장님이 따로 있다고 하더라. 며칠 뒤에 봤다. 멜빵바지를 하고는 <도어즈>를 보고 있었다. 그때는 내가 어려서 건방졌던 것 같다. ‘올리버 스톤을 보시네요.’했었다. 그 분이 최종태 소장이었다.“
Q. 90년대 초를 생각하면 대학캠퍼스는 혼란스러웠다. 이데올로기적으로 들끓던 시절이었다. ‘노란문’의 좌표는 어떤 것이었나.
▶이혁래 감독: ”그때가 1991년, 92년이었다. 한국도 그렇고 세계적으로 큰 변화가 있었다. 87체제 끝났다. 20대들은 버거운 짐들을 내려놓았지만 후련한 느낌보다는 이젠 무얼 하지 갈피를 못 잡던 시기였다. 1987년 이후 (한국사회에는) 많은 개방이 이뤄진다. 그 이전에는 공식적으로 들을 수 없었던 핑크 플로이드의 <월>이나 <지옥의 묵시록>, <택시 드라이브>를 만나볼 수 있었다. 해외여행이 자유화 되면서 많은 문화의 바다가 펼쳐지게 되었다. 그 바다에 많은 젊은이들이 풍덩풍덩 빠져들었다. 노란문은 그런 시절 모인 것이다.“
Q. 참, 서울대에도 ‘얄라셩’이라는 영화써클이 있었잖은가.
▶이혁래 감독: ”대학에 들어갔을 때 얄랴성을 잘 몰랐다. 내가 가진 인상은 약간 학생시위 할 때 비디오 촬영하고, 영화자체보다는 사회운동 차원에서 접근하는 이미지가 더 컸다. 그런 것 보다는 영화가 좋고, 영화를 보고 싶은 욕구가 컸다. 그런 사람끼리 영화이야기만 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었다. 나중에 이야기 들어보니 ‘얄라셩’ 회원들 사이에서도 비슷한 욕구들이 있었다고 하더라. 얄라셩 갔었더라도 만족스럽게 활동했을 것이다.“
** ‘얄라셩 영화 연구회’는 김동빈, 홍기선 등이 만든 한국 최초의 대학 영화 동아리로 알려져 있다. 박광수 감독, 김홍준 감독(현, 한국영상자료원장), 송능한 감독, 장선우 감독 등이 이곳 출신이다. **
Q. 그 때 본 영화들은 어떤 영화였나. 봉준호 감독이 노트에 꼼꼼히 정리한 리스트에는 4~500편의 영화가 있다.
▶이혁래 감독: ”그때를 생각하면 우리 눈앞에는 너무나 많은 음악, 영화, 문화의 바다가 펼쳐졌는데, 그것과는 별개로 당장 누릴 수 있는 조건은 열악했다. 그 때 우리가 만나본 영화들은 화질과 음질이 너무 떨어졌다. 정식 출시된 비디오가 아니라 누군가 몰래 반입한 비디오를 두 번, 세 번 거쳐 복사한 테이프였다. <노스탤지어>가 흑백인 줄 아는 사람들이 많았다. 자막도 없었고. 정상적인 감상은 아니었다. 보고 싶고, 알고 싶다는 열망이 컸다. 그때와 비교하면 지금은 영화 보는 것이 너무 편해졌다.“
** <노스탤지어>는 러시아 안드레이 타르콥스키 감독의 1983년 작품이다. 칸영화제 감독상을 받은 이 영화는 ‘엄청난 지루함’에도 불구하고 당시 영화팬들의 필견의 명화였다. 그 열정에 힘입어 1996년 백두대간에 의해 수입되어 정식상영 되었다. 흥행기록은 11,918명이란다.“
Q. [노란문]을 만들면 재밌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는데, 재미의 포인트는 어디인가.
▶이혁래 감독: ”지금은 볼 영화가 너무 많아 채널 돌리다 TV를 꺼버리는 시대이다. 그래도 이걸 보여주면 흥미를 느낄 것 같았다. 시대적 차이에도 공감을 할 포인트를 찾아낼 수 있지 않을까. 뭔가 몹시 좋아해서, 주변 사람들이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비슷한 부류의 사람을 만나는 것이다. 인생의 도움이 전혀 안되지만, 목적의식 없이 즐겼던 그런 열정들이 30년 전 한국에서만 벌어지는 일이 아닐 것이다. 지금도 벌어지고 있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재밌는 이야기란 것은 생경하면서도 보편적인 이야기이다. 그런 점을 만족시킬 것이다. 이건 제 표현이 아니라 봉준호 감독이 한 말인데 ‘봉준호를 미끼로 해서 그때의 이야기를 끌어올려주면 지금의 관객도 만족하는 이야기를 만들 수 있지 않을까’. 무도한 시도를 했다.“
Q. 이혁래 감독도 멤버였다. 영상에 등장하는 장면이 있는지.
▶이혁래 감독: “최대한 빼려고 했다. 딱 한 컷 나온다. ‘노란문’ 개소식 장면에서 ‘개소식이네. 고릴라2가 있네’라고 말하는 장면. 제가 등장하는 장면 때문에 혼란스럽지 않기를 바랐다. 관객들이 영화 속 인물들을 보는데 제가 들어가면 레이어가 하나 더 생기는 것이다. 제가 ‘노란문’ 밖에 있었으면 상관없는데 제가 멤버이기도 했으니. 그리고, 저는 경험치가 조금 다른 부분도 있다. 대부분의 멤버들은 80년대 끄트머리에서 90년대 맞은 세대이다.”
Q. 작품 비디오를 구하고, 장비를 구하고, 사무실 운영을 해야 한다. 회비 갹출 같은 것은 어떤 식으로 진행되었는지.
▶이혁래 감독: “처음에는 회비가 없었다. 모임을 지속하다 보니 운영부분을 생각해야했을 것이다. 그 때 주로 고민한 것은 소장이었던 최종태 감독과 사업부의 김대엽씨였다. 다른 사람들은 돈 생각 하나도 없이 ‘이 영화가 좋네 싫네’ 할 때, 그 사람들은 구석에서 어떻게 돈을 벌까 고민했다. 월세도 내야하고, 테이프도 사야하니. 실제로 꽤 큰 금액을 운영비로 내어주는 사람도 있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1인당 만원씩 냈다. 그때 최종태 감독이 그 이야기 꺼낼 때 덜덜 떨면서 이야기했다고 하더라. ‘노란문’은 대학 동아리와 학교밖 모임으로 중간쯤 위치에 있었다. ”
Q. 당시 대학 캠퍼스에서는 ‘정식루트로 개봉되기 힘든 작품’을 비디오로 유료 상영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혁래 감독: “회비로만으로 힘들었는지 93년부터는 신입회원 모은다고 그랬다. ‘개론반’, ‘진출반’ 나눠서. 그런 식으로 수익사업을 한 것 같다. 1992년에 서울의 대학가를 강타한 영화제가 하나 있었다. 불법으로 들어온 비디오에 자체적으로 한글자막을 달고, 돈을 받고 영화를 상영하는 것이 유행인 적이 있다. 그 때 엄청나게 화제가 된 것이 ‘성(性)과 파시즘영화제’였다. 연대 노문과에서 진행한 것인데 대박이 났었다. ‘파시즘’은 미끼였고 ‘성’이 방점이 찍힌 것이다. <파리의 마지막 탱고>, <유기체의 신비>(두산 마카베예프 감독, W.R: Mysteries of the Organism) 같은 센 영화가 대박을 쳤다. ‘노란문’도 93년 말인가 ‘신촌영화제’인가를 기획했다. 멤버들이 나눠 자막작업을 했다. 봉준호 감독은 스파이크 리 감독의 ‘정글피버’를 맡아 흑인 슬랭을 번역했다고 하더라. 그 영화제는 크게 재미를 못 봤고, 운영상 어려움을 겪었다고 하더라.”
Q. 지금은 영상자료원장으로 있는 김홍준 위원장이 등장한다. 프랑스문화원에서 영화를 보고, 공부했던 1세대 시네필이다. ‘노란문’은 확실히 그 뒤에 등장한 자생적 시네필인 것 같다. 어떤 세대였다고 자평할 수 있는가.
▶이혁래 감독: “준비가 안 된 상태에서 가능성이 확 열리면서 갈피를 못 잡았던 세대였다. 헤매는 과정에서 많은 뛰어난 분들이 만들어진 것 같다. 그 때 그렇게 헤매지 않고 정규적으로 영화를 보고 배웠다면 지금과 다른 영화를 만들지 않았을까 싶다. 우리는 ‘자습세대’인 셈이다. ‘야간자습세대’. 조건은 안 되어 있었고, 영화를 감상하고 해석했다기 보다는 상상하며 보았다. 자막도 없고, 음질, 화질 다 떨어지니. 롱샷 같은 경우는 등장인물이 구분이 안 될 정도였다. 영화에 대한 정부는 제한되었다. 지금은 DVD에 풍성한 셔플먼트가 있고, 유튜브엔 관련영상이 넘쳐난다. 실제로 영화를 만드는 사람들이 어떻게 만드는지 알려주는 게 많잖은가. 그런데 그 때 우리는 우리끼리 상상하면서 논쟁을 펼쳤다. 왕가위 감독의 <열혈남아>보면서고 그랬다. 마지막에 장학우가 죽는 장면, 유덕화의 반응 샷이 나오는데, 뒤로 빨간 색 트럭이 싹 지나간다. 우리는 그게 ‘감독의 의도다, 아니다’고 싸웠다. 그게 아주 절묘하니까.”(하하하)
“그런데 재밌는 것은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 초반부에 박서준이 최우식 찾아와서 과외 제안하는 장면에서. 슈퍼 앞인데 트럭이 지나간다. 지금의 영화광들이 그 장면을 ‘의도가 있다 아니다’로 논쟁을 하더라. 비슷한 상황이다.”
Q. 당시 ‘노란문’ 말고도 대학마다 영화 써클(동아리)이 있었고, 충무로 주류가 아닌 창작집단이 활동을 했었다. 당시의 지존은 어디였는가.
▶이혁래 감독: “모임으로 보자면 당연히 ‘장산곶매’였다. 세상을 뒤흔든 영화 <파업전야>를 만들었다. 장산곶매의 방향성에 공감을 하지 않더라도 그런 모임을 만들고 싶다는 욕심은 다 있었을 것이다. 개인으로는 그 때 가장 많이 회자된 것은 ‘영화제작소 청년’의 정지우 감독이다. 그때까지 나온 단편영화의 수준을 확 뛰어 넘었다. 그리고 제작시스템이 좋았다. 그들은 품앗이라고 부르며 연출, 촬영, 조명을 서로 도와주었다. 너무나 이상적으로 보였고, 그 영화들 수준이 높았다. 그리고 아마 그때 가장 큰 충격을 준 단편은 김성수 감독(비트/아수라)의 <비명도시>(93)일 것 같다. 그때까지의 단편영화의 수준과 격을 뛰어넘는 작품이었다.”
Q. 불법 유통 해외비디오와는 달리 그런 영화들은 또 어떻게 보았나.
▶이혁래 감독: “소문을 듣고 어떻게 볼 수 있을까 찾아다니는 것이다. 비디오로 출시된 것도 아니니, 건너건너 알음알음해서 보는 것이다. ‘영화소 현실’에서 김성수 감독의 스태프와 엮여 있어서, 그 사람을 통해 볼 수 있었다. 지금은 어떤 영화 제목 듣고, 1초면 알 수 있지만, 그때는 제목 알고 1년도 더 걸리기도 했다.”
Q. 그 뒤에는 어떤 일이 펼쳐졌는가.
▶이혁래 감독: “흐름으로 보자면 하이텔 같은 PC통신이 등장했다. 그곳에서 영화열정을 나누는데, 실제 구체적인 공간이 없어도 된다는ㄴ게 신기했다. 최종태 감독과 이병훈씨는 노란문이 여러 결과물을 PC통신에, 온라인 디비로 만드는 것을 시도하기도 했다. ‘노란문’을 포함해서 그 때 영화모임할 때는 영화 보고, 조잡한 워크샵하던 이런 사람들이 실제 영화산업에 진입하리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그때 제일 충격적이었던 것이 <파업전야>에서 봤던 이은과 장윤현의 이름을 <접속> 크레딧에 나타났을 때다. 그리고 시기적으로 좀 뒤에 류승완 감독이 단편 네 개를 묶어 장편(죽거나 혹은 나쁘거나) 데뷔 했을 때이다. ‘이런 일들이 벌어지네’ 생각했다.”
Q. 당시 노란문 멤버들이 수집하고, 감상한 영화들의 목록에는 4~500백 편의 영화가 있다. 예상 가능한 목록들이다. 왕가위의 <열혈남아>도 있고, 지블리도 있다. 한국영화는 기억나는 게 있는가? 김기영 감독 같은?
▶이혁래 감독: “사실 그때는 김기영 감독을 몰랐을 것이다. 당시 유럽영화를 많이 봤었다. 그 영화들만 본 것은 아니다. 대단히 잡식성이었다. 한국영화 중에서 이장호 감독의 <바보선언>이 대단했다. 배창호 감독 영화들도 있다. <꿈>을 보며 같이 분석한 기억이 난다. 목록에는 TV드라마도 있다. 저도, 봉준호 감독이 좋아한 작품이 1992년 베스트극장에서 방송된 <누군가를 사랑하려는 이유>이다. 황인뢰 연출, 주찬옥 극본에 김혜수가 출연한 단막극이다. 그 연기는 정말 특별한 연기였다. 김혜수는 1992년 이 드라마와 이명세 감독의 <첫사랑>을 남겼다. 다시 봐도 너무 좋더라. 황인뢰 감독 작품 보면서 로베르 브레송이나 오지 야스지로 영화를 못 볼 때 ‘이 분들은 이런 식으로 만들었구나’라고 생각했었다. 봉준호 감독은 황인뢰 피디 팬이다. 이번 작품에서 음악은 안 나오지만, 원본에는 기차 신에서 봉 감독이 기타 연주를 직접 한다. 그때 친 음악인 ‘여자는 무엇으로 사는가’ 곡이다. 김혜자, 김희애, 하희라가 나왔던 작품인데, 송병준이 영화음악을 맡았던 작품이다. 그런 식으로 우린 잡식성이었다. (지블리는?) ”봉준호 감독이 미야자키 하야오 마니아였다. 러시아 다큐도 있고.“
Q. ‘루킹 포 파라다이스’는 어떻게 다시 세상에 나오게 되었나.
▶이혁래 감독: “봉 감독은 처음엔 ‘없어진 걸로 해달라’고 그랬다. <미키17> 촬영 때문에 런던 가야하는데 보여주기 싫어서 거짓말한 줄 알았다. 그런데 ‘필모분실의 공포 끔찍하다’라는 카톡을 보내주었다. 얼마 뒤에 원본VHS는 못 찾고 DVD에 구워둔 것을 찾았는데, 그것도 시간이 오래되니 데이터가 지워졌더라. 용산 가서 복구 작업을 했다. 전체를 다 복구하지는 못했다. 다행히 단편 ‘루킹 포 파라다이스’는 살려낼 수 있었다. 감독의 허락을 받고 안 받고가 아니라 ‘잃어버렸어?’, ‘날아갔어?’ 하다가 겨우 사용할 수 있게 된 것이다.”
Q. 넷플릭스와의 작업을 어떤 식으로 진행되었나.
▶이혁래 감독: “이거 처음할 때부터 넷플릭스와 하고 싶었다. <미싱타는 여자>가 극장에서 개봉할 때와 겹친다. 사실 다큐멘터리가 극장에서 상영되는 것은 너무 힘들다. 새 작품을 극장에서 거는 것에 대해 회의적이었다. 작품으로 욕 듣는 것은 상관없지만 일단 관객 만나는 것이 힘들다. 그래서 다음에 다큐 만들 때는 극장용 다큐는 만들지 않겠다고 다짐했었다. 처음에 런닝타임을 50분으로 하겠다고 한 것은 그런 이유이다. 극장용으로 만들고 싶지 않다는 이야기이다.”
Q. 사람들은 세계적인 거장 ‘봉준호’의 시네키즈 시절에 관심이 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혁래 감독: “그렇다. 이런 작품은 봉준호 감독이 관심의 중심에 서게 될 것이다. 나는 봉준호 감독을 주인공으로 만들고 싶지 않았다. 봉 감독도 ‘내가 주인공이면 안 된다. 1/n이 되어야한다.’고 말했었다. 초기 편집본에서는 봉준호 이야기가 많았다. 다른 멤버들이 이야기하고, 봉준호 이야기를 끌어내면서 균형이 생기더라.”
Q. 멤버들 인터뷰는 어떻게 진행되었나. 코로나 시기였는데.
▶이혁래 감독: “전체 인터뷰 장면은 세 개로 나눠진다. 첫 촬영은 봉준호 감독 단독 인터뷰이다. 그리고 봉 감독과 이동훈의 대화 장면이 4월에 이뤄졌고, 다른 분들 단독 인터뷰가 10월, 11월 진행되었다. 화상통화는 3월 중순에 사흘에 걸쳐 찍었다. 3팀을 나눠 촬영했다. 봉감독은 두 팀의 대화에 참여했다. 그 영상들을 섞었다. 한 번 촬영할 때마다 5시간 정도 촬영했다.”
Q. 인터뷰할 때 이혁래 감독만의 방식이 있는지.
▶이혁래 감독: “<미싱타는 여자>를 할 때 느낀 것인데 인터뷰할 때 그 사람의 말을 들려주는 것보다는 반응을 보여주는 게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최대한 반응을 이끌어내는 것을 많이 준비한다. 자료화면을 보여줄 때 그 반응을 보여주고 싶은 욕구가 있다. 이야기 듣고 반응을 할 때 더 친밀감이 있다고 생각한다. 자료와, 자료에 대한 기억, 경험을 공유하는 사람의 모습을 보여줄 때 관객들이 더 쉽게 감정적으로 동화하고 참여하는 것 같다. 어떻게 좀 더 좋은 반응을 이끌어낼 수 있을까 고민했다.”
Q. ‘노란문’ 멤버들은 이 작품을 어떻게 보았는지.
▶이혁래 감독: ”작품이 완성되기 전에는 한 번도 보여주지 않았다. 봉 감독은 <미키17> 작업 때문에 참석할 수 없었지만 나머지 멤버들은 이달 초 열린 부산국제영화제 상영 때 부산에 와서 같이 영화를 봤다. 미국에 사는 이병훈 씨도 왔었다. 영화제에서 상영될 때 무척 떨렸다. ‘노란문’ 모임은 조기축구회 같은 것이다. 제작에 참여한 사람에게는 향수가 될 수 있겠지만 저는 감독으로서 영화의 톤앤매너를 만들어야한다. ‘노란문’이 중요한 위치의 모임이 아니란 것을 이야기해야하니. 그런데 의외로 좋아해주셨다. 최종태 감독은 ‘노란문’ 시절을 생각하면 기쁘기도 하고, 응어리가 풀린다고도 했다. 전체적으로 기분 좋게 봐주셨다.“
”봉준호 감독은 따로 이 작품을 봤다. 사실 다큐 만든다고 했을 때 이게 우리들끼리 보고 좋아할 영화가 되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완성된 작품 보니 ‘노란문’과 관계없는 사람이 봐도 재미를 느낄 수 있겠다고 했다. 그런 평을 들으니 기분이 좋았다. 큰 산을 넘은 것 같다.“
Q. 이혁래 감독에게 ‘노란문’은 어떤 의미인가.
▶이혁래 감독: ”산업적으로 ‘노란문’은 뚜렷한 성과가 없었다. 어쩌면 아무도 모르게 잊혀졌을지 모른다. 멤버들의 사소한 경험들을 모으다보니 ‘노란문’을 회고하는 사람들이 ‘그 순간이 나한테 가치가 있었구나’ 생각하고, 관계가 없는 사람들도 자신의 비슷한 경험을 떠올리면서 흘려간 시간을 다시 한 번 반추하게 되는 것 같다. 이게 중요할 것이다.“
[사진=넷플릭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