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달 열린 제 39회 청룡영화상 시상식에서 김혜수는 후배배우 유연석과 함께 무대에 올라 두 시간 여에 걸친 시상식을 매끄럽게 진행했다. 그도 그럴 것이 24년째 청룡상 사회를 도맡아 해오고 있기 때문이다. 영화에서, 드라마에서, 그리고 시상식 무대에서 오랜 세월 정상을 달리고 있는 김혜수를 만나 한국에서 ‘여자’ 배우로 산다는 것이 어떤지 들어봤다. 물론, 요즘 세상엔 ‘여자’라고 성별을 따로 언급하는 것은 큰 문제이지만 그만큼 ‘영화계’가, ‘한국’이 특별하기 때문이다. 1997년의 ‘한국은행’ 사정이야 더했을 것이다. 영화 <국가부도의 날>에서 한국은행 통화정책팀장 한시현을 연기한 김혜수를 만나봤다.
김혜수는 1997년 ‘아시아의 작은 용’ 4마리 중 하나로 경제성장의 신화를 써가던 대한민국이 한순간에 나락으로 떨어진 ‘IMF'사태를 다룬 영화 <국가부도의 날>에서, 국가경제의 위기를 감지, 필사적으로 막기 위해 몸부림치는 한시현 팀장을 연기했다. 필모그래피를 보니 김혜수는 IMF 이후 연기자로 더 확실한 길을 보인다. 1999년 안재욱과 출연한 로맨스 <찜>이 개봉되었고, 진원석 감독의 할리우드 작품 '투 타이어드 투 다이'가 11월에 개봉했었다. 이듬해 1월, 차인표와 함께 곽경택 감독의 <닥터K>에 출연했다. 김혜수는 1999년 들어 <국희>, <우리가 정말 사랑했을까>. <황금시대>, <장희빈> 등 TV드라마에 잇달아 출연한다. 김혜수는 그때를 어떻게 기억할까.
영화를 본 소감은. “영화를 찍을 때와 달리, 기자들과 함께 영화를 보니 긴장되었다. 완성된 것은 기자시사회 때 처음 봤다.”며 “촬영할 때도 울컥 했었던 장면이 있다. 대교에서 한 가장이 뛰어내리는 장면. 도로를 통제하고 찍을 때 모니터로 지켜봤는데 사람의 뒷모습을 볼 때 너무 슬펐다. 영화로 보니 눈물이 나더라.”
“또 한 장면이 있다. 갑수(허준호)의 친구가 구치소에 갇혀서 ‘내 새끼들 이제 어떡하냐’며 울부짖을 때. 당시 가정을 지키는 가장들의 마음 아니겠는가. 한시현이 자기소임을 다 하지 못한 책망까지 복합적인 감정이 뒤섞여 눈물이 나더라. 물론, 마지막 장면도.”
“한시현은 IMF 사태에 가지 않기 위해 나름 최선을 다한다. 약자들이 영문도 모른 채 피해를 보면 안 된다고 애쓰는데, 정작 자신의 피붙이는 직격탄을 맞는다.”며, “그 당시 시대를 알기 때문에 실패할 수밖에 없던 주인공이었다.”고 캐릭터를 이야기한다.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자괴감, 굴욕감, 분노와 비통함....”이라고 덧붙인다.
극중에서 한시현은 ‘여자’로서, ‘팀장’으로서 고군분투한다. “비상한 시국에, 특별한 임무를 맡은 영웅적 인물의 좌절을 그리는, 어마어마한 여성의 표상이라기보다는 묵묵하게 그 시절, 자신의 소임을 다하는 사람을 그리고 싶었다. 가장 주안점을 둔 것은 그런 삶을 산 사람의 진심이 뭘까. 관객에게 어떻게 진심을 담아내고 제대로 전할 수 있을까 생각했다.”
1997년의 일이니까, 어느새 20년의 세월이 지나갔다. ‘국가부도의 날’이 개봉 뒤 어떤 평가를 받을지 궁금하다. 누가 와서 볼까. 'IMF'를 겪지 않았던, 몰랐던, 그리고 IMF를 통해 펀드멘털이 강해진 한국경제의 수혜자들은, 이 고통스런 순간을 어떻게 받아들일까.
이날 인터뷰에서는 “그랬다더라..”라는 기자들의 질문이 이어졌다. 김혜수는 “당시 피해를 입은 사람이 많았고, 분명히 건너건너 그런 이야기를 들었을 것이다. 인물은 영화적 상상력으로 구성한 것이다.”라며 “우리가 잘 몰랐던 협상 내용이란 것이 충격적이었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이런 말을 덧붙인다. “당시 제가 직장생활을 한 것이 아니라 조심스럽지만, 제 친구들 가운데에서도 실직하고, 명퇴 당하고, 연봉 낮춰 이직하는 경우가 있었다. 가족의 안위를 위협하는 두려움과 공포와 맞닥친 것이다.”라며 “그 때 당시만 해도 ‘평생직장’이란 말이 있었다. 별 이변이 없는 한 정년퇴직할 때까지 한 회사에 다닌다는. 자기의 일을 사랑하고, 평생 다니고 싶어도 그럴 수 없다는 것 알잖아요.”
“영화에도 그런 대사가 나온다. 오늘부로 명예퇴직하시고, 비정규직 동의 서류에 서명하시라고. 그러자 사람들이 명퇴가 뭐지, 비정규직이 뭐지 라고 말하잖은가. 이제는 그게 일상이 되었다.” (최국희 감독은 그 근원을 IMF에서 찾는다)
김혜수는 최선을 다했지만 그래도 아쉽다고 말한다. “개인적으로 이 영화에 참여하기로 결정하고서는 관계자들에게 정말 잘 만들었으면 좋겠다고 부탁드린 기억이 난다.”면서 “이 영화를 보신 분들이 개인적인 경험이든, 영화 속 의견이든, 생각이든 이야기를 나눌 수 있기를 바란다. 한시현같이 준비하고, 따져보고, 검증하고, 그러길 바란다.”
한국은행 금융전문가를 연기하니 생경한 대사를 하기 어려웠겠다. “경제용어가 워낙 어려우니. 쉽게 풀이를 해서 페이퍼를 만들었는데 설명을 봐도 모르겠더라. 설명 자체가 경제용어이니. 50개를 보면 2개 정도 알겠더라. 그런데 그것도 덮으면 또 모르겠고. 그래서 교수님께 자문 겸, 전반적인 경제상황을 알 수 있는 수업을 받았다.”
영화를 보면 1997년의 경제엘리트 ‘한국은행 여팀장’의 위상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물론, 영화적 재미를 위해서이겠지만, 인상적인 장면들이다. 여성영화의 관점에서 이 영화를 보자면? “거창하게 생각한 것은 아니다. 한시현이란 캐릭터도 여자가 해도, 남자가 해도 상관없다. 진심만 담기면 말이다. 그런데 이 영화의 제작자도 여성이었고, 현장피디도 여성이었다. 근사한 여성캐릭터를 만들어보자고 이야기한 적은 없지만 영화에 그렇게 투영되었으면 한다. 이게 정답이라고는 할 수 없겠지만 각자 본분에 최선을 다하다 보니 결과적으로 나름 바람직한 여성 캐릭터가 만들어진 것 같다."
지난 28일 개봉된 <국가부도의 날>은 개봉 첫날 30만 명을 시작으로 주말까지 흥행 톱을 유지하며 첫 주말에 157만 명을 불러 모았다. (KBS미디어 박재환)
[사진= 호두앤유엔터테인먼트, 강영호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