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일(일) 밤 9시 40분, KBS 1TV <역사저널 그날>에서는 ‘대한제국을 지워라-을사조약’이 방송된다.
1905년 11월 17일. 이토 히로부미는 군대를 동원해 경운궁을 둘러싼다. 강압적인 분위기에서 진행된 의정부회의. 고종의 의중을 파악하지 못한 대신들은 갈팡질팡하고 단호히 반대 의사를 밝힌 한규설은 일본군에 의해 끌려 나간다. 때! 대신들을 겁에 질리게 한 이토 히로부미의 한마디는 무엇이었을까?
‘을사오적’과 ‘을사늑약’
의정부회의에 참석했던 대신은 권중현, 민영기, 박제순, 이완용, 이근택, 이지용, 이하영, 한규설까지 총 8명. 이 중 조약 체결을 반대한 사람은 민영기와 한규설 2명뿐이다.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는 왜 을사오적만을 기억할까. 체결 당일로 돌아가 을사오적에 가려졌던 또 다른 이들을 알아본다.
을사늑약이라고도 불리는 을사조약. ‘늑약’은 강제로 체결됐음을 의미한다. 이를 뒷받침하는 대표적 증거는? 첫째. 찍히지 않은 고종의 직인. 둘째, 일본군 개입. 셋째. 국제협약표준 기준 위반이다. 이때 국제협약표준 위반이란 충분한 절차를 거치지 못했음을 의미한다. 이 외에도 을사조약이 ‘무효’인 증거는 무엇일까?
고종은 서구 열강이 을사조약을 인정하지 않을 것이라는 희망을 품었는데, 그 이유는 대한제국이 국제사회의 일원이라고 믿었기 때문. 그러나 고종의 기대와 달리 국제정세는 이미 일본으로 기운 상황. 당시 상황을 짚어보며 을사조약이 체결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살펴본다.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한 을사조약! 을사조약이 체결된 그날의 진실은 25일 밤 9시 40분 KBS1 TV <역사저널 그날> ‘대한제국을 지워라, 을사조약’에서 확인할 수 있다. (KBS미디어 박재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