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프로야구선수 장훈이나 프로레슬러 역도산은 ‘재일동포’라 불렀고, LA의 한인들을 ‘재미교포’라고도 불렀다. 중국과의 교류가 왕성해지면서 ‘재중동포’들에 대한 명칭과 바라보는 시선이 복잡해지기 시작했다. 이들이 한국에 건너와서 살게 되면서 더욱 그러하다. 핏줄은 분명한데 말이다. ‘중국 조선족 출신’의 장률 감독도 그러하다. 장률 감독의 최신작 <군산, 거위를 노래하다>에는 이런 대사가 나온다. “일본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죽은 민족시인 윤동주가 살아있으면? 그냥 조선족이지.” 무언가를 생각하게 하는 대사임에 분명하다. 지난 8일 개봉한 <군산,거위를 노래하다>의 장률 감독을 만나 한국에서 영화 만드는 것에 대해 물어보았다.
영화제목 ‘군산’은 개봉을 앞두고 영화사에서 붙인 것이란다. “원래는 그냥 '거위를 노래하다'였다. 그런데 영화에 '군산'이라는 공간이 잘 나온 것 같다면서 '군산'으로 하고, 뒤에 부제를 붙인 것이다. 전에 찍은 영화 중에 '경주' 같은 영화도 있어서 나쁘지 않아서 찬성했다.”란다.
그러면서 “제목을 고쳐서 관객이 많이 들 수 있다면 만족한다"고 덧붙였다. 실제 장률 감독은 ‘이리’, ‘경주’ ‘중경’ 등 도시 이름을 제목으로 많이 삼았다.
영화 제목을 이야기하다 영화 속 인물이야기로 흘렀다. 박해일이 연기하는 인물이 ‘윤영’이다. “윤영이란 이름은 남자이름 같기도 하고, 여자이름 같기도 하다. 내가 있는 학교(연세대)에 이윤영 교수라고 있는데 그분이 그런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고 하더라. 그래서 부탁해서 주인공 이름으로 삼았다. 그 분 이 영화에도 나온다.”
박해일은 영화에서 중국 한시를 읊는다. 중국 당나라 시인 낙빈왕(駱賓王)의 ‘영아’(詠鵝)라는 작품이다. 박해일은 극중에서 엄마가 자신을 ‘영아’라고 불렀다며 애틋해한다.
장률 감독은 ‘경주’와 ‘필름시대의 사랑’에 이어 다시 박해일을 캐스팅했다. "자기만의 리듬을 가진 사람이다. 보통 사람들은 시대의 리듬을 따르는데, 박해일은 자기의 리듬을 가진 사람이다. 자기의 리듬을 가진 사람이 시인에 조금 더 가깝지 않느냐"면서, "나는 그런 사람들이 끌린다.“라며 시인 같은 답변을 이어갔다.
영화 ‘군산’은 박해일과 문소리가 군산으로 갑자기 내려와서 보내는 ‘뜻밖의 여정’을 보여준다. 그들이 왜 내려왔는지, 어떤 사정이 있었는지는 후반부에서 보여준다. 마치 이창동 감독의 <박하사탕>의 시간흐름처럼. 전반부와 후반부가 통째로 바뀐 것이다. 이에 대해 장 감독은 "영화는 사실을 찍는 게 아니고 기억을 찍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 기억이란 것은 사실의 순서가 아니다. 이 영화에선 중간지점이 이 영화의 순서가 맞는 것 같다. 우리는 시작과 결말을 중시하는데 사실은 중간까지 와봐야 그 앞과 뒤가 보인다. 우리 삶에서 중간을 한 번 더 바라보자는 그런 생각이었다.“이라고 설명한다.
영화에서는 ‘조선족’이라 칭해지는 사람들에 대해 몇 차례 응시한다. 혹시나 장률 감독이 한국에 온 뒤에 겪었을, 혹은 들었을 차별과 부조리에 대한 반응일까.
감독은 어눌하게, 조곤조곤 자신의 생각을 밝힌다. “피해의식 같은 것은 없다. 우리가 역사를 이야기할 때는 정치적 관점을 갖게 된다. 부당하면 항의하고. 그런데 그런 것은 나쁜 것은 아니다. 그런데 실제 소통이 더 잘 되지 않는 면이 있다. 내가 관심을 가진 것은 일상에서 비주류사람들이 어떻게 사는 가였다. 조선족 아주머니는 식당이나 파출부로 많이 일하더라. 메시지를 던진다기보다는 일상에서, 시선이 가지 않는 부분에 대해 조금이라도 관심을 기울이면 소통이 훨씬 잘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며 이 영화는 ‘일상’을 이야기한다고 강조했다.
영화에서 정진영, 박소담이 군산의 민박집 주인 부녀로 등장한다. 그들은 이따금 일본어를 한다. 알아듣든 말든. “일상에서 술 먹고 있는데 옆 테이블에 일본사람이 있으면 욕하고 그런다. 하지만 그 일본사람이 실제 죄인은 아니잖은가. 일상에서 서로 소통이 되지 않으니깐 어색한 부분을 피한다. 일상의 그 모습을 더 보여주어야 역사문제에 도움이 될 것 같다. 어차피 같이 가야 한다.”며 “일상의 틀을 깨야 한다.”고 덧붙인다.
이 영화에는 독립영화라고는 믿기 어려울 만큼 쟁쟁한 배우들이 많이 출연한다. 박해일, 문소리, 정진영, 박소담과 함께 한예리, 윤제문, 정은채, 그리고 문숙과 이미숙까지.
문숙은 군산의 한 식당의 여주인으로 등장한다. 문소리, 박해일과 함께 술잔을 나누는 장면은 오래 전 이만희 감독의 ‘삼포가는 길’의 그 ‘백화’를 떠올리게 한다. “사는 곳이 상암동 쪽이고, 시간나면 그곳에 있는 영상자료원에서 영화를 즐겨본다. 그곳에서 <삼포가는 길>은 재밌게 봤었다. 문숙을 캐스팅하고 싶었다. 어떻게 만날 기회가 있어 부탁드렸고, 출연까지 이어졌다.”고 말한다.
치과의사로 등장하는 이미숙은 그의 영화스타일에 봐서는 정말 깜짝 캐스팅이다. “한 번 만나보자고 제안하려 했는데 스태프가 다들 말리더다. 거절당해도 좋으니 한 번 볼 수 있겠는가 했다. 어느 날 커피숍에서 만나 뵙고 영화이야기를 했고 승낙을 받은 것이다.”란다. 그러면서 “영화를 찍을 때는 용기와 운이 필요해.”라며 다소 돈키호테같은 면모를 내보인다.
영화 개봉을 앞두고 열린 시사회에서 객석에서 한 초로의 신사가 눈에 띄었었다. 궁금해서 물어보니 영화에 등장하는 박해일의 집주인이시란다. 초대받아왔단다. 장률 감독에게 그 이야기를 하니, 이런 대답을 하신다. “촬영 장소를 구할 때 제작진에게 집집마다 부탁해보라고 했다. 한 집에서 할아버지가 아들에게 한 번 물어봐야겠다고 하시더라. 전화로 이야기하는데 무슨 영화 찍은 감독이냐고 해서 ‘경주’라고 했더니. 자기가 ‘경주’를 아주 재밌게 봤다면서 촬영을 허락해 주시더라.”며, “내가 이렇게 대중적인 감독인지 몰랐다. 앞으로 매사 조심해야겠다”며 활짝 웃었다.
장률 감독은 “배우들의 연기가 너무 좋다. 관객들도 좋은 연기를 봐 주셨으면 한다.”고 마지막 부탁을 했다. 독립영화란 게 극장에서 만나보기 어렵다. 서둘러 극장에 가보시길. (KBS미디어 박재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