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상수 감독 영화 세 편을 거쳐 <부산행>과 <염력>, 그리고 <82년생 김지영>에 출연했던 정유미를 오랜만에 스크린에서 만나게 된다. 봉준호 감독의 <옥자> 연출부를 거쳤던 유재선 감독의 데뷔작 <잠>이다. 이 영화에서 정유미는 수면장애의 남편(이선균) 때문에 위기에 내몰린 아내 수진을 연기한다. 남편은 자면서 자신이 무슨 행동을 하는지 모르고, 아내는 점점 남편의 수면장애가 더 큰 화를 불러일으킬 것이라 염려한다. 결국, 무시무시한 라스트신으로 내달린다. 개봉을 앞두고 정유미 배우를 만나 <잠>에 대한 이야기와 연기철학에 대해 들어보았다.
Q. 시나리오를 보고 든 생각은.
▶정유미: “시나리오가 간결해서 좋았다. 이런 시나리오를 쓴 감독님이 궁금했다. 시사회 때 보셨으니 잘 아실 것이다. 매력이 있는 분이시다. 영화에 대해 설명을 컴팩트하게 해 주셔서 실제 현장에서 어떻게 해나갈지 궁금했다.”
Q. 유재선 감독은 '봉준호 키드'라 불린다.
▶정유미: “이건 봉 감독님 허락받고 이야기하는 것이다. 인터뷰 때 이야기해도 된다고 하셨다. 어느 날 봉 감독님 전화를 받았다. 그래서 ‘와, 드디어 나에게도!’ 생각했었다. 그런데 봉 감독님이 ‘이런 친구가 있다. 이런 시나리오 썼는데 한번 읽어봐 주세요’라고 하셨다. 그래서 읽어본 것이다. 그리고 다른 정보도 좀 더 들었고. 회사에 시나리오 찾아달라고 해서 읽어보았다. 봉 감독님의 추천이 영향을 끼쳤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저도 봉 감독 영화 좋아하니까. 작품 들어가서는 제가 가진 생각을 빼려고 노력했다.”
Q. 작업은 어땠는지, 봉준호 감독 스타일이 나는지.
▶정유미: “저는 봉 감독님과 작업해본 적이 없어서 잘 모르겠다. 작품은 다르다고 생각한다. 각자의 스타일이 있다고 생각한다. 유재선 감독이 가장 좋아하고 존경하는 분이 봉준호 감독이라고 했다. 그런 부분에서는 영향이 있지 않았을까. 전 다르게 보인다. 우선 영화가 짧다. 봉 감독님 영화는 길잖아요.”
Q. 유재선 감독은 연기에 대한 디렉션을 많이 주었다는데.
▶정유미: “그날 찍을 것에 대해 ‘이렇게 할 것인데, 이렇게 해 주세요’라고 말한다. 석 달 정도 촬영했다. 순서대로 찍었다. 정확하게 기억은 안 나지만 시사회에서 감독님 하신 말 들어보면 연기시범을 했던 것 같다. 크게 도움이 되진 않았다. ‘이렇게 해주세요. 이거 빼주세요’식이었다.” (하하하)
Q. 여자주인공의 내면을 따라 간다. 수진 캐릭터를 어떻게 파악했는지.
▶정유미: “이번 영화는 제가 생각을 별로 안하고 작업(연기)했다. 제가 한없이 생각을 하고, 해석을 보태면 오히려 시간이 많이 걸리고 분산이 될 것 같았다. 그냥 감독님 의도에 맞춰, 생각을 표현해내고 싶었다. 가끔 ‘이건 이럴 것 같아요.’라고 말하면 테이크를 한 번 더 갔다. 그런데 편집에서 어느 게 들어갔는지 눈치 채지 못할 정도였다.”
Q. <부산행>에 이어 임산부 역할을 또 했는데.
▶정유미: “그런 연기는 하면서 느는 것 같다. 주어진 상황이 다르기도 하다. <부산행>에서는 생존하기 위해 좀비 떼들을 피해서 달려야했다. 만삭이면서 어떻게 저리 뛸 수 있느냐는 말을 많이 들었다. 그래도 뛰어야지 어떡해요. 살아야하니까. <82년생 김지영> 때는 좀 더 큰 애기였다. 그때 감독님이 두 아이의 엄마이고 하니. 진짜 육아에 대해 자세히 설명을 해줬다. 아참, 이번 작품에서 허리를 툭툭 치는 장면은 감독님이 그렇게 하라고 하신 것이다. 이 영화는 감독님이 가장 많이 생각하고 글을 쓴 것이니 그 누구보다도 훨씬 많이 알 것이다. 감독님께 많이 의지했다.”
Q. <잠>에는 호러, 미스터리, 스릴러가 다 섞여있다.
▶정유미: “이런 반응이 신기하다. 여러 장르가 나온다니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보시는 분들마다 다르게 해석할 수 있지 않을까. 처음에는 그냥 ‘스릴러의 외피를 두른 러브스토리’라고 생각했다. 한 부부가 고난과 역경을 극복해 나가는 이야기. 그 말은 감독님 처음 만났을 때 하신 말이다. 꽁냥꽁냥한 것만이 러브스토리가 아니라면서 편견을 깬 작품인 것 같다.”
Q. 이선균 배우와는 홍상수 감독 작품을 세 편이나 같이 했다. (‘어떤 방문:첩첩산중’(2009), ‘옥희의 영화’(2010), ‘우리 선희’(2013))
▶정유미: “거기도 (홍상수 감독의) 틀이 있고, 여기도 (유재선 감독의) 틀이 있다. 홍상수 감독 작품이라면 일상의 모습을 자연스럽게 연기한다고 생각하겠지만 감독님 디테일이 있다. 애드립 같아 보이는 것도 그렇다. 테이크를 많이 간다. 두 사람의 호흡은 항상 재밌었다. ‘다음에 또 만나자’고 그랬는데 벌써 10년이 지났다. 그 때 영화 힘들게 찍었지만 영화가 재밌었다.”
Q. 극중 수진 캐릭터에 대해 이해하지 못한 부분이 있었는지.
▶정유미: “이해하지 못한 것은 없다. 제가 선택한 시나리오이고 스토리이다. 있는 그대로, 그 안에서 충실하게 표현해내려고 했다. 감독님이 하라는 대로 한 것이다. 배우가 너무 많이 관여하면 방해가 될 것 같았다. 상대배우와 별다른 이야기를 안 해도 술술 연기가 나왔다. 배우에 대한 믿음인 것 같다. 액션과 리액션에 있어 오빠(이선균)가 잘 받아주었다. 어떤 배우라도 잘 받아준다.”
Q. 강단 있는 역할을 잘하는데.
▶정유미: “저한테 오는 것(시나리오) 중에서 제일 재미있는 것, 끌리는 것을 택한다. <도가니> 같은 경우는 거부하기도 했다. 선택할 때 조금 힘들었다. 유재선 감독이 시사회 때 한 말에 동의한다. 영화든 드라마든, 대중에 선보일 때는 재밌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맞는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상업적이든 아니든. 영화의 완성도나 배우의 연기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Q. <잠>은 다채로운 장르의 특징을 가지고 있지만 분명 호러이다. 호러영화를 좋아하는지.
▶정유미: “못 봐요.” (이 영화 무서운데..) “영화는 촬영할 때 옆에 사람이 많이 있다. 물에 뛰어들거나 위험한 장면 촬영을 할 때에는 보호 장비가 다 있고, 빠지더라도 옆에서 구해주니까 그냥 하는 거지. <콜>은 무서워서 친구랑 봤다. 재밌었다. <잠> 시나리오가 무섭게 느껴지진 않았다. 무섭다기보다는 전체적으로 이야기가 한 번에 쫘~악 진행되는 게 재밌었다. 그런데 촬영하면서 ‘이거 어떡 하냐’ 그랬다. 연기할 때 ‘이거 잔인한데’라는 생각이 들긴 했다.“
Q. 병원에서 나와 다시 집으로 돌아왔을 때 이야기가 휘몰아친다.
▶정유미: “어쨌든 영화는 순서대로 찍는 것을 알고 있으니까. 상황이 그렇게 주어지면 그렇게 해야 할 것 같았다. 부족한 것이 있으면 감독님 디렉션으로 채워나갔다. 상대 배우의 액션이 강렬하면 그에 맞춰 따라간 것 같다. 마지막 장면에서 부적 같은 것은 처음 보고 놀랐다. ‘이렇게까지 하는 게 맞나?’ 생각했었다. 감독님이 하라는 대로. 정말 제대로 미친 것 같다.”
Q. 엔딩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는지.
▶정유미: “저도 완성된 것을 보고 알았다. 오빠(이선균)가 여러 버전으로 찍은 것으로 알고 있다. 감독님이 편집하면서 마지막으로 선택한 것이니. 이것도 열린 결말이라고 하지만 나는 잘 모르겠다.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하나, 어떻게 떼어놓나 그 생각뿐이었다.”
Q. 정유미 배우의 연기 때문에 영화가 무섭다고 하는데.
▶정유미: “인터뷰하면서 ‘제대로 미쳤다’고 말하지만. 연기하면서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칸영화제에서 그런 이야기 듣고는 ‘아, 내가 극중에서 미쳐야 되는 것이었구나’ 생각했다. ‘광기 어린 연기’라고 말하는데 제가 생각하기엔 그런 건 아니다. 부족했다고 생각한다.”
Q. <염력>에서 보여준 사이코 연기는 요즘 말하는 이른바 ‘맑눈광’의 원조이다.
▶정유미: “그것도 그때는 잘한다고 열심히 했는데. 요즘 돌아다니는 <염력>의 짤 영상을 보니까 아니더라. ‘짤’은 편집된 것이다. 전체적으로 봐야 어색하지 않다. 어쨌든 그런 것은 광기가 아닌 것 같다. 저는 더 보여줄 게 있다고 생각한다. 광기는 아니고, 그냥 사투, 가족을 지키기 위한 사투의 한 부분이라고 말해두고 싶다. 만약 시나리오에서 그렇게 느꼈다면 이렇게 연기하지 않았을 것 같다.”
Q. 연기나 작품에 대한 의견을 개진하는 편인지.
▶정유미: “시나리오 읽고 미팅하면서 감독님과 처음 이야기할 때부터 제 생각이 특별히 중요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시나리오를 보면서 바로 느낌이 왔다. 촬영하면서 ‘이렇게 하는 게 어때요?’라고 하는 것이 군더더기가 생길 것 같았다. 깔끔한 글을 믿고 감독님에게 의지해서 연기했다. 문을 열 때 손잡이를 오른손으로 돌릴 때와 왼손으로 돌릴 때의 느낌의 차이같이 디테일 한 게 있었다. 오른손으로 돌리는 게 편한데 왼손으로 돌려 달라 식으로.”
Q. 신혼부부의 거실 벽에 <부부가 함께라면 극복 못할 문제가 없다>라는 글귀가 걸려있다.
▶정유미: “그 문장이 애매하다. 몇 번 잘 못 말했는데 감독님은 그 문장을 틀리지 않게 말하기를 원했다. 대사를 하면서 헷갈렸다. 그러면 감독님이 바로 지적해 줬다. 눈치로 감독님 스타일을 알 수 있었다.”
Q. 나영석 피디와는 식당시리즈를 많이 했다. 특별한 이유가 있는지.
▶정유미: “그 팀과는 처음에는 낯설었다. 스태프도, 작가도, 피디들도. 좀 알게 되니 편해지더라. 그분들에게 배우는 게 많았다. 개인적으로 존경한다. ‘이렇게까지 열심히?”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영화나 드라마와는 또 다른 작업이잖아요. 출연자들이 걱정할 일은 말하지 않더라. 그래서 배우들이 믿음을 가지는 모양이다. 그 프로그램 하고 나서는 저보고 김밥 말아달라는 사람 진짜 많았다. 친구들이 생일 때 선물보다 김밥 말아달라는데. 그런데 방송 이후 김밥 말아본 적이 없다. (’유미네 집‘ 나올 것인가?) “아니, 남의 집이 편하다. ’서준이네‘나 ’서진이네‘가.“
Q. <내 깡패 같은 애인>같은 로맨스물은 어떤가.
▶정유미: “이제 그런 나이는 아닌 것 같다.” (연기 말고 다른 것은? 연출 같은..) “연출욕심은 전혀 없다. 연기나 잘해야지. 연출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다. 브이로그 찍어보려고 카메라 들고 돌아다녀봤지만 안 되더라. 남이 써주는 것 열심히 읽고 연기할 것이다. 얼마 전에 박희순 오빠 유튜브를 보면서 저도 잠깐 연기 그만 둘까 생각했었다. 그래도 할 수 있는 게 이것이다. 다른 일도 마찬가지로 힘들 것이다. 힘들지 않은 게 어디 있겠는가. 제 의지라고 생각하고 발버둥 치면서 가야할 것이다.”
Q. 어떤 배우로 남기를 바라는지.
▶정유미: “그런 것 전혀 없다. 어떤 배우로 남을 생각이 없다. 아직까지 찾아주시는 분들이 있다는 것에 감사드린다. 그래서 잘 하고 싶고, 더 잘해야겠다고 생각한다.”
Q. 데뷔 20년이 다 되어 간다.
▶정유미: “18년이다. 2005년 <사랑니>가 데뷔작이다. 그전에 <폴라로이드 작동법> 같은 단편을 찍기는 했다. 그 작품으로 감독님들에게 소개되었고, 오디션 보러 오라는 이야기 들었다. 감독님 사이에선 유명한 작품이긴 하다. 하지만 그때는 뭘 하려고 해서 한 게 아니다. 제 기준으로는 <사랑니>가 데뷔작이다.”
<82년생 김지영>(2019)이후 오랜만에 나온 <잠>에 대해 “시간이 이렇게 갈 줄 몰랐다. 영화 계속 찍을 수 있어서 감사하다. 컴백작이라고 하기엔 부끄럽다. 개인적으로 연기에 대한 아쉬움도 있다. <잠>을 보시고 ’이거 뭐야? 한 번 봐!‘ 이런 이야기 해주셨으면 한다. 데뷔 18년이 된 정유미 배우의 부탁이다. 영화 <잠>은 내일(6일) 개봉한다.
[사진=롯데엔터테인먼트]